외전 - 80. 상행(1)
“휴… 아무리 그래도 아직은….”
“생각하실 시간이 필요하시다면, 좋아요. 더 시간을 드릴게요.”
베아트리 영애가 미소를 지으며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이번에 뜻밖에 제안이 들어왔어요. 에렌 공국의 상단에서 대형항아리와 찻잔에 대한 구매를 요청해 왔어요.”
“아일론 상회가 아닌 우리에게 직접 거래를 요청했다는 말입니까?”
“네, 우리에겐 거래처를 다방면으로 늘릴 수있는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에렌 공국은 본국은 물론 바이런 왕국과 카테인 제국과도 인접한 무역국이에요. 에렌 공국에 도자기나 옹기가 알려지면 자연스럽게 다른 두 국가에도 도자기나 옹기를 판매할 기회가 생길 거예요.”
아일론 상회를 통해 독점적으로 도자기와 옹기를 공급하고는 있지만, 이미 틀어지기 시작한 마티슨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언제 거래가 끊겨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공방 건립에 도움을 준 아일론 상회와 무작정 거래를 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에렌 공국과의 거래는 달랐다. 아일론 상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거래처 다변화할 수 있어 아일론 상회에 끌려가지 않으면서도 꾸준히 수익을 늘려갈 수 있었다.
“조건이 상당히 좋군요.”
“일단 대금은 선금 절반에 운송이 끝나면 나머지 대금까지 바로 지급하기로 했어요. 대신 운송은 우리가 책임져야 해요.”
“흠… 운송까지라면 조금 곤란하군요. 국경을 넘으려면 상단을 개설하고 영주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 곤란할 건 없어요. 운송은 국경까지만 가면 되니까요.”
“공국까지 직접 가는 게 아닙니까?”
“네, 다른 상단들도 보통 국경에서 운송한 뒤 거래 상단에게 물건만 넘기는 게 일반적이죠.”
“그럼 큰 문제가 없다는 말이군요.”
“맞아요. 더구나 이번 거래는 주문 양도 많고 가격도 아일론 상회에서 받는 것 보다 두 배는 더 받을 수 있죠.”
“반드시 가야 한다는 말이군요.”
베아트리 영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점보다 장점이 많으니까요.”
“좋습니다. 그럼 출발은 언제입니까?”
“기일은 십일 뒤입니다.”
“흠…. 물량을 맞추려면 빠듯하군요.”
“일정이 빠듯하긴 하지만 상단만 따라가면 될 테니 우리가 따로 준비할 건 없을 거예요. 어려울까요?”
“아닙니다. 시간이 조금 빠듯한 것 같지만,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겁니다.”
“다행이군요. 그럼 계약 진행할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 * *
며칠 후 마을로 마차 하나와 커다란 짐마차 두 대가 장원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에덴 공국의 상단에서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상단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특이하군, 상단에 일꾼이 하나도 없다니.”
마크가 의아한 얼굴로 상단을 바라보았다. 상단엔 일꾼 대신 마차를 끄는 마부까지 용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몬스터 사냥 시 간혹 실력 없거나 나이 든 용병을 고용하기도 하지만, 이번처럼 상행에 일꾼을 대신해 E급 용병 다수를 고용하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다.
“처음부터 상행을 위해 왕국을 찾은 게 아니라더군요.”
“그게 무슨 소리냐?”
“지인을 만나기 위해 왔다가 필요한 물건을 매입해 돌아가던 중이라고 하더군요. 도자기와 옹기도 그 과정에서 발견했다고 하고요.”
“상행 때문에 온 건 아니지만 결국 상인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거라는 말이군.”
“그런 거죠.”
피식 웃으며 마차를 향해 다가가던 카일이 주춤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사내는 검과 갑옷만 입으면 기사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당당한 체구의 사내였다.
“보샨트 상단의 바런이라 합니다.”
“아! 공방 책임자 카일입니다.”
바런이란 자가 딱딱한 얼굴로 카일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굳은 표정과 퉁명스러운 목소리는 일반적인 상인의 태도로 보긴 어려웠다. 무엇보다 수백 골드가 오가는 거래에서 상대인 카일과 별로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고 사들인 항아리나 찻잔을 직접 확인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카일과 인사를 나눈 뒤 잠시 짐마차에 실린 항아리와 찻잔을 힐끔 보곤 가죽 주머니에든 보석과 골드를 내밀었다.
“약속한 대금입니다.”
“확인해 보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최상의….”
“필요 없습니다. 어련히 잘 준비하셨겠죠.”
“아… 네.”
카일은 바런의 말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고개를 저으며 베라트리 영애에게 주머니를 넘겼다.
“아무래도 이상해요. 지난번 거래에서 만난 자 와도 달라요. 그리고 상단 간 거래는 왕립은행을 통하는 게 일반적이에요.”
베아트리 영애 역시 이상함을 느꼈는지 카일에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이제 와 거래를 무를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죠. 일단 함께 움직여 보겠습니다.”
“조심하세요.”
“걱정 마십시오.”
카일이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베아트리 영애를 안심시켰다. 그사이 마크와 며칠 전 샤론 마을에서 돌아온 비터가 카일의 옆으로 다가왔다.
“준비는 끝났다.”
“보름치 식수와 식량도 짐마차에 실어 놨다.”
“수고하셨습니다.”
“뭐,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나저나 괜찮으냐? 며칠째 주문량을 맞추느라 고생이 많았을 텐데.”
“맞다. 굳이 너까지 갈 필요는 없다. 우리 둘만으로도 국경까지는 얼마든지 갔다 올 수 있다.”
“아닙니다. 저도 계속 장원에만 있었더니 좀 답답해서요.”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지.”
마크가 고개를 저으며 카일의 뒤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우린 상단 행렬 중 음식이나 야영 물품을 제공하지는 않소. 그런 건 알아서 준비하시오.”
짐마차에 올라탄 카일을 향해 바런이 일반적 통보하듯 말하고는 마차에 올라 타버렸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비터가 투덜거렸지만, 어차피 따라가는 입장에서 딱히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마크,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요?”
“이상한 점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를 제기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마크의 말에 카일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카일 일행은 상단을 따라 보샤트 상단이 머물고 있는 여관으로 이동했다. 숙소는 백작 성에서 가장 고급스럽고 비싼 여관으로 기사 두 명이 말을 타고 상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가 여관 앞에 멈춰서자 바런이 마차에서 내려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곧 고급스런 옷을 입은 다부진 체구의 중년 귀족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마치에 탄 귀족은 에렌 공국의 보샤트 남작이라고 이곳에 온 건 약 한 달 정도, 백작 성에 들어온 사람은 저들 4명이 전부였다.”
카일은 마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굳은 얼굴로 마크와 비터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좀 이상해요. 저 바런이란 상인도 그렇고 상단을 이끄는 사람들이 물건엔 전혀 관심이 없어요. 일단 우리도 나름대로 경계를 해야 될 것 같아요.”
“좋아! 일단 나도 용병대장을 찾아가 이야기 해 보겠다.”
비터가 용병들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중년의 용병과 함께 일행에게 다가왔다.
“이쪽은 C급 용병 던트, 이번 용병을 이끌 대장으로 선정되었다는군.”
비터의 말에 카일과 마크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반갑네! 난 이번에 용병들의 책임자가 된 던트라 하네!”
던트는 이제 중년이 된 용병으로 제법 경험과 노련함을 가졌지만, 이번처럼 상단 전체의 호위 책임을 맡을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다.
보통 이 정도 규모와 상행기간이면 경험 있는 B급 용병을 대장으로 용병들을 이끌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번에 함께할 용병은 몇 명이고 실력은 어느 정도 됩니까?”
마크의 질문에 던트라 불린 용병대장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좀 이상하단 말이야! 보통 이 정도 규모의 상단이라면 엑스퍼트급 용병에 소드 유저 두셋과 하급 용병을 섞어 고용하기 마련인데 이번엔 엑스퍼트인 날 제외하면 모두 하급 용병이라네. 실력 있는 용병을 고용해 달라 몇 번 건의했지만… 보는 것처럼 모두 거절당했네. 엑스퍼트 급 기사들이 있으니 더 이상 병력은 필요 없다나. 고용주가 저리 나오니 어쩌겠나? 따르는 수밖에.”
“그런 이유라면 더 말해봐야 소용이 없겠군요.”
던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번에 고용된 E급 용병이 15명 정도인데, 경험도 있고 제법 무기도 다뤄본 놈들이라 그나마 다행이라네. 내 알기로 다들 엑스퍼트라고 들었는데, 이번에 많이들 도와주게나!”
던트의 말이 이어질수록 마크와 비터 역시도 상단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지 표정이 점점 일그러져 갔다.
아무리 상단에 기사들이 포함되어 있다지만, 그들은 남작의 개인 호위에 불과할 뿐 실질적으로 용병을 이끌고 상단 호위를 책임지는 건 전적으로 용병의 몫이다. 이미 수십 골드를 지급했고, 추가로 지급해야 할 보샤트 상단 입장에선 항아리와 찻잔을 목적지인 에렌 공국 국경까지 안전하고 빠르게 운송해줄 실력 있는 용병이 필요했다. 하지만 보샤트 상단의 행동에선 상행의 안전이나 물건을 보호하려는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만 돌아가 봐야겠네.”
“많이 바쁘신가 보군요.”
“일꾼들도 없고, 상단 사람들은 상행엔 관심이 없으니 어쩌겠나? 의뢰를 수행하려면 내가 직접 챙겨야지.”
“고생이 많으시군요.”
“어쩌겠나! 할 수 없지. 그래도 자네들이 합류해서 다행이네.”
던트 대장은 다시 한번 카일의 일행을 향해 도움을 부탁하고는 급하게 용병들에게로 돌아가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 * *
“이거 우리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건 아닐까?”
벌써 열흘이 지났다. 대부분 넓고 안전한 관도를 따라 이동했다고, 숙식은 모두 마을이나 성에 들러 편안히 해결했다. 상행이 아니라 마치 여행을 나온 것처럼 느긋한 일정이었다.
“야영도 없고 일정이 빠듯한 것도 아니다. 이동 중인 길도 대부분 안전한 관도를 이용하고 있다. 이 정도면 굳이 실력 있는 용병은 필요 없을 거다.”
“보샤트 상단의 선택이 옳았다는 말이군요.”
“이렇게 관도를 타고 계속 이동한다면 오히려 하급 용병 숫자가 과하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이것 역시 일반적인 상단의 모습은 아니다.”
일반적인 상단의 경우 최대한 일정을 줄이려 노력한다. 운송에 소모되는 비용을 최대한 줄여 이윤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특히나 국경을 넘나드는 상인의 경우 운송에 많은 비용을 소모할 수밖에 없어 더더욱 운송 기간을 단축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보샤트 상단은 오히려 반대로 일정을 지연시키며 느긋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이렇게 가다간 국경까지 한 달 이상 걸릴 것 같았다.
“지금 에크바 산맥을 넘는단 말입니까?”
카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또다시 예상치 못한 경로를 잡은 것이다.
에크바 산맥은 크로노스 왕국과 에렌 공국, 그리고 바런트 왕국과 접한 산맥이다. 사실 에렌 공국 국경까지 최단 거리로 이동했다면 에크바 산맥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곳 산맥을 넘는 상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제법 많은 수의 상단들이 에크바 산맥을 넘어 국경으로 향하지만, 문제는 에크바 산맥을 넘어 에렌 공국 국경까지 최소 5일 이상의 산행이 불가피하다는 점이었다. 최근 아틸런 자작가에서 몬스터의 준동까지 일어난 상황이니 지금의 전력으로 5일간의 산행은 무리였다. 용병대장 던트 역시 상단에 강력하게 이야기를 전했지만 간단하게 묵살 당하고 말았다.
“느긋하게 이동하다가 갑자기 에바크 산맥을 넘겠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마크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에 고개를 저었다. 산맥을 나흘만 돌아가면 안전하게 국경지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껏 안전하고 느긋하게 이동하던 상단 주가 갑자기 위험한 에바크 산맥을 넘겠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어쩌면 애초 목적지가 에렌 공국이 아닌 에크바 산맥 일지도 모릅니다.”
카일이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발했다.
“무슨 소리냐? 목적지가 에크바 산맥이라니?”
“지금까지 경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일부러 관도를 이용해 천천히 이동하다가 갑자기 에바크 산맥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약간의 일정만 조정했어도 얼마든지 안전하게 국경을 넘을 수 있음에도 말이죠.”
“그럼 저들이 에렌 공국 상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군.”
“처음부터 상인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흠… 그래서 어쩔 생각이냐? 이대로 저들을 따라갈 생각이냐?”
“어쩔 수 없잖아요. 계약을 파기했다간 위약금만 세배를 물어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죠.”
“하긴, 의심만으로 상행을 포기할 수는 없지. 어쩌면 상단 주의 단순한 변덕일지도 모르는데.”
비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확하지는 않아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마크의 말에 비터와 카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