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79. 마라스 용병대(2)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게 있습니다.”
씁쓸하게 돌아서는 마크를 보며 물었다.
“뭘 말이냐?”
“아무리 E급이지만 용병 50명이면 적지 않은 전력인데, 왜 갑자기 거점인 북부 설원까지 버리고 동부로 이주한 겁니까? 아틸런 자작가가 아무리 동부의 명문이라지만 북부에서 동부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가 아닙니까. 더구나 이주를 선택할 정도로 좋은 조건도 아니었을 텐데요.”
“그건 아이스 랜드 때문이다.”
“북부 설원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지 마크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가려던 몸을 돌려 다시 의자에 앉았다.
“지난번에도 말했듯 마라스 용병대의 주 수입은 몬스터 사냥이다.”
“네, 아이스 트롤을 잡는다고 하셨죠. 엑스퍼트가 포함된 파티라도 굉장히 잡기 어려운 놈이라고 들었는데,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바로 집단전의 위력이지. 서북부 방어군 출신을 높이 사는 이유도 바로 집단전이나 공성전에서 타고난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만한 전력에 다져 놓은 기반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갑자기 용병 전체가 이동하다니 말입니다.”
“그건 설원 전체가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통제요?”
“그래, 두 달 전부터 서북부 방어군 일부가 설원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아니, 갑자기 왜?”
“누군가 화이트 와이번의 서식지에 침입했다. 와이번까지 동원된 최정예 집단으로, 왕실에선 화이트 와이번의 알을 노린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마크의 말에 깜짝 놀란 카일이 물었다.
“화이트 와이번이라니! 미쳤군요.”
“그래, 나도 처음엔 미친 짓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정확하진 않지만, 타국에서 와이번의 부화에 성공했다고 하더군.”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그 일로 지금 왕국이 발칵 뒤집혔다. 만약 이게 사실이면 왕국 간 지켜오던 균형이 무너질 만큼 큰일이지. 더구나 화이트 와이번 알이 반출이라도 되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요.”
“맞다. 그래서 왕실의 통제가 더욱 엄격해졌지. 사냥을 주업으로 하는 마라스 용병대로선 생존을 걱정해야 할 심각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서북부 방어군, 마라스 용병대와는 좋지 않은 인연이 있는 곳이지.”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래서 나도 마라스 대장을 더 믿었다.”
“뭐, 저도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닙니다. 마라스 대장 입장에선 신생 공방보다는 아틸런 자작가의 병사가 더 안정적이라고 생각했겠죠.”
“그건… 미안하다. 좀 더 확인했어야 했는데 이건 내 실수다.”
“아닙니다. 누구라도 그 상황에선 마라스 대장의 말을 믿었을 겁니다.”
“휴… 그래서 앞으로 어쩔 생각이냐? 저들을 오래 붙잡아 둔다고 해도 나올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
“그쯤은 알고 있습니다. 저도 딱히 바라는 건 없습니다.”
마크의 걱정스런 모습에 카일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정말 보름 뒤에 풀어줄 생각이냐?”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죠.”
카일의 말에 얼굴이 찌푸린 마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들에겐 가족이 있다. 우릴 속인 건 나쁘고 화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동부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기회를 빼앗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대로 보름 뒤 풀려나면 그들이 갈 곳은 한곳 뿐이다.”
가진 것 없는 E급 용병 가족이 갈 곳은 빈민가뿐이다. 아무리 서북부 방어군 출신의 전역병이라고 해도, 결국 개개인의 실력은 다른 E급 용병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대규모 전쟁이나 몬스터 토벌 같은 대규모 전투가 아닌 이상 마라스 용병대 전체를 고용할 일은 찾기 힘들 뿐 아니라, 설령 있다고 해도 효율성이 극히 떨어졌다.
“…제가 심술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건….”
“뭐, 화가 난 것도 사실이니 틀린 것도 아닙니다.”
피식 웃으며 카일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화가 난다고 저들을 잡아둔 건 아닙니다. 화풀이를 하려 했다면 오히려 순순히 보내 줬을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북부 설원에 있는 마라스 용병대가 아틸런 자작가의 정규병 모집을 어떻게 알고 이주를 하려 한 걸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동부의 명문인 아틸런 자작가다. 용병을 대상으로 정규병을 모집하려 했다면 동부 안에서도 얼마든지 수급이 가능했다. 그런데도 북부의 마라스 용병대가 동부까지 이주를 택했다면, 아틸런 자작가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이 그들에게 있었다는 소리였다.
“흠… 모종의 협약이 있었단 말이냐?”
“아틸런 자작가의 정규병 모집은 이상하게도 동부에선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큰 피해를 입었다고는 하는데 정확한 규모는 아일런 상회에서도 알지 못했습니다.”
“병력 피해를 의도적으로 감추고 타 지역에서 부족한 병력을 수습할 정도면….”
“알려진 것보다 병력 피해가 크다는 겁니다. 동부의 다른 영주들에게 감춰야 할 정도로 말이죠.”
“힘의 균형이 깨졌단 말이냐?”
크러먼 백작가, 아틸런 자작가, 그리고 폰드리 자작가는 동부를 삼분하는 삼대 명문으로 오랜 혈맹 관계인 동시에 경쟁상대였으며, 그간 팽팽한 힘의 균형과 견제를 통해 그들 사이의 평화가 유지되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 균형에 금이 간 것이다.
“그건 알 수 없습니다. 귀족들 싸움엔 관심도 없고요. 하지만 한 가지 걱정되는 건 있습니다.”
“걱정이라니?”
“아틸런 자작가에서 모집하거나 접촉한 용병 대부분이 몬스터 사냥에 특화된 자들이나 용병대였습니다.”
“그럼….!”
“아직 몬스터 습격이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죠.”
카일은 한쪽에 말려있던 작은 책자를 마크에게 내밀었다.
“이번에 아틸런 자작가에서 내어놓은 몬스터 부산물입니다. 토일 님께 부탁해 구한 겁니다.”
아일론 상회는 아틸런 자작가의 방계귀족 가문이자 상회이며 몬스터 부산물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상단이다. 비밀리에 부산물을 처리할 가장 믿을 수 있는 상단이기도 했다.
“이게 전부… 아틸런 자작가에서 이번에 내어 놓은 물량이라고?”
“상당하죠. 대부분이 검은 오크인 대형 종입니다. 수량만 해도 샤론 마을에서 한 달간 사냥을 해도 모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양이죠. 제 생각엔 이것도 전부는 아닐 겁니다.”
“전부가 아니라니 무슨 소리냐?”
“오크 가죽 대부분이 최상급 아니면 상급입니다. 사냥도 아니고 목숨이 달린 전투에서 가죽까지 신경 쓰며 오크를 잡지는 않습니다.”
“그럼…!”
“침입한 오크의 숫자가 몇 배는 더 많을 겁니다. 아마도 아틸런 자작가 혼자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말이죠.”
“그런데도 가만히 지켜만 본단 말이냐? 당장 비상령을 내리고 인근 영지에 도움을 청해야 하는 것 아니냐?”
마크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베아트리 영애가 그러더군요. 아틸런 가문은 절대 타 영지에 도움을 청하지 않을 거라고. 명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말입니다. 특히 다른 두 가문에겐 더더욱 말이죠.”
“자존심 때문에 그런 멍청한 결정을 내린단 말이냐?”
마크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멍청한 짓이 아닙니다.”
“무슨… 뜻이냐?”
“피해는 크지만 이번에 공격받은 마을과 요새만 끝까지 지켜낸다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는 말이죠.”
“반전?”
“아틸런 자작가가 필사적으로 요새를 지켜낸다면 오크들은 다른 길을 찾아 남하할 겁니다.”
“남하라면!”
“다음은 크로먼 백작가 입니다. 에바크 산맥과 가장 넓은 영역을 맞댄 곳이죠. 정확하진 않지만, 이 정도 넓은 영역에서 오크들이 한 번에 몰려들면 백작가 역시 막대한 피해를 볼 겁니다. 아틸런 자작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말이죠.”
“…미친 생각이군!”
“미친 생각이긴 하지만 아틸런 자작가 입장에선 이번 일을 백작가의 힘을 약화시킬 기회로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니 일단 용병을 최대한 투입해 소모전을 치르며 전장을 고착화하려는 거겠죠.”
“불만이 있어도 정규병이 된 이상 영주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겠군.”
“맞습니다. 마라스 용병대처럼 타지에서 가족까지 함께 이주해 왔다면 더더욱 죽기 살기로 싸울 겁니다. 물론 살아남긴 힘들겠지만 말이죠.”
“왜 마라스 대장에겐 말하지 않은 겁니까? 사실대로 말했다면….”
“믿어줬을까요?”
“그건…!”
“지금까지 말한 건 그저 예상일 뿐입니다. 정확하지 않은 내용으로 설득할 수는 없을 겁니다. 사실 귀찮기도 하고요.”
카일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잠시 망설이던 마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만약… 말이다. 만약 보름 뒤 그들이 여기 남겠다면… 받아줄 수 있겠느냐?”
“마크, 그들은 마크의 믿음을 이용했어요. 그런데도 그들을 믿을 수 있나요?”
“마라스 대장이 우릴 속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나쁜 사람은 아니다. 나에겐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고….”
“흠… 마크의 부탁도 있고, 나쁜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으니, 좋습니다. 다시 기회를 주겠습니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물론이다.”
마크가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외부의 상황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용병들이 창고에 갇히자 함께 온 가족들의 동요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폭동을 일으킬 듯 저택 앞으로 직접 찾아와 격렬하게 항의해댔다. 다행히 마라스 용병대장이 설득해 물러나게 하면서 큰 충돌은 없었지만, 장원 안 분위기는 냉랭하게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카일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태연하게 장원을 돌아다녔다.
“여기도 없어?”
바닥에서 불쑥 솟아오른 놈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외부에서 가져온 흙인가?”
카일이 아쉬운 듯 낮게 독백하며 백토의 흔적이 남은 흙을 움켜쥐었다. 장원 곳곳에 남은 백토의 흔적을 따라 흙의 정령, 놈을 통해 추적했지만 역시 찾을 수 없었다. 카일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백토가 외부에서 유입되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놈, 백토를 따로 모아줘!”
카일의 말이 떨어지자 놈의 몸이 스르륵 흙 속으로 사라지더니 어지럽게 흙과 섞인 백토를 한쪽에 쌓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백토를 확보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는데, 생각보다 모인 백토의 양이 상당했다.
“훌륭하군요.”
갑자기 들려온 베아트리 영애의 목소리에도 카일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직은 서툽니다.”
“그럴 리가요? 단 며칠 만에 이렇게 능숙하게 정령을 다루는 건 쉽지 않아요.”
“그런가요?”
실프와 장난치는 흙의 정령 놈의 모습에 카일이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베아트리 영애가 짧게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요.”
“네?”
“저와 수하들을 받아줘서요.”
“그건… 거래일 뿐이었습니다. 덕분에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정령석은 그저 조금 더 빨리 정령과 만나고 계약할 수 있게 도움을 줄 뿐입니다. 결국엔 카일 님 스스로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 있었을 거예요.”
“그렇다고 해도 큰 도움이 된 건 사실입니다. 이렇게 백토를 쉽게 얻기도 했고요.”
“다행이군요.”
“내일부터는 평원 쪽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장원 주변을 돌아보면 분명 광맥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카일의 말에 배아트리 영애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맹약에 대해선… 생각해 보셨나요?”
“그건…!”
카일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받아들일 생각이 없나 보군요.”
“솔직히 제 몸속에 드워프 종족의 피가 흐르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백 년 전 종족 간 맺은 맹약을 지켜야 한다니…. 솔직히 당황스럽습니다.”
“아마도 이해하기 힘들 거예요. 하지만 엘프나 드워프는 달라요. 수백 년을 살아가는 그분들에겐 아직도 선명하게 살아있을 맹약이죠.”
베아트리 영애의 말에 카일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엘프의 활은 과연 최강인가?’
100년 전 엘프와 드워프 부족 사이에 벌어진 단순한 논쟁이다. 하지만 이 단순한 논쟁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고, 점점 과격해지더니 종내에는 무력 충돌로까지 이어지기 시작했다.
장인족으로 최고의 무기를 생산해온 드워프로선 엘프의 활이 최강임을 인정할 수 없었고, 최강의 궁술을 지녔다고 자부하는 엘프 역시 작달막한 난쟁이족이 만든 활이 엘프의 궁술을 능가한다며 떨어대는 허풍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에 두 종족은 한가지 내기를 하기로 했다.
바로 드워프가 만든 활과 엘프의 궁술 중 어느 것이 최고인지를 가리는 내기였다. 하지만 여기엔 문제가 있었다. 드워프는 무기를 만드는 장인족이지 무사는 아니었다. 활을 만들 수는 있어도 엘프처럼 능숙하게 활을 다룰 수 없었다. 엘프 역시 종족 간 분쟁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내기에 응했지만 그렇다고 드워프를 상대로 궁술 대결을 할 수는 없었다. 엘프 입장에선 이겨도 그만, 지면 그야말로 망신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미 시작한 내기를 무를 수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드워프 족이 내건 최상급 마나석 100개를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엘프족은 이번 대결을 인간과 엘프의 혼혈인 하프 엘프와 하프 드워프 간 대결로 한정 지어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