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43화 (343/404)

외전 - 77. 베아트리 영애(3)

마크는 비터의 예상보다 이틀이 더 지나서야 장원으로 돌아왔다. 무려 50명의 용병과 그들 가족 수십 명이 짐마차를 나눠타고 장원 안으로 들어섰다.

“저 녀석들 용병 맞냐?”

비터가 마크의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무장을 하고 장원 앞에 열을 맞춰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잘 훈련된 정규병을 보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도 무기나 장비 대부분이 정규 병사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모두 E급 용병들이다.”

“최하급?”

마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쉽게 볼 녀석들은 아니다. 대부분이 서북부 정규 방어군에 복무하던 전역 병사 출신이다.”

“서북부 방어군이면, 아스틴 왕국!”

“그래, 야만인 녀석들을 상대하던 녀석들이다. 오러는 다룰 수 없어도 각종 무기술과 집단 전에선 굉장히 뛰어나지.”

“서북부 방어군이면 왕실 소속일 텐데, 어떻게 용병이 된 거냐?”

왕실 정규병은 왕실 직영지 출신의 직업군인이다. 그중 서북부 방어군은 난폭하고 야만적인 아스틴 왕국을 방어하기 위해 창설한 부대이다. 보통 성년을 갓 넘긴 18세에 입대해 10년을 서북부 방어군으로 복무하며 각종 훈련과 실전을 겪은 뒤 왕궁 수비병이나 왕실 직영지 병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왕실은 적은 비용으로 실전을 겪은 충성심 높은 최정예 병사들을 꾸준히 확보할 수 있는 방편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강도 높은 훈련과 죽음을 넘나드는 실전을 10년이나 겪어야 하지만, 일단 살아남기만 하면 정규병으로서 높은 급여와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되었다. 그러니 서북부 방어군 출신 병사들이 용병이 되는 일은 없었다.

“뭐…. 내부 권력 암투의 희생양이라고나 할까?”

“무슨 소리야?”

“나도 잘 모른다는 소리다. 알아봐야 좋을 것 없고, 그보다 카일은 어디 간 거냐? 아직 평원에서 백토를 찾고 있는 거냐?”

“백토는 무슨, 그 녀석 지금 공방에서 벌써 열흘째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있다.”

“뭐? 어째서?”

“도자기가 대성공했다는 소리지! 보름 동안 백 점이 넘는 도자기를 만들어 팔았는데도 주문이 밀려 있다.”

“그게 정말이냐!”

마크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지난번엔 백여 점을 만들어 구웠지만 성공한 도자기는 고작해야 30점, 산술적으로만 따지면 보름 동안 최소 서너 번 이상 도자기를 새로 구워냈단 뜻이었다.

“아직 놀라긴 이르다.”

“또 놀랄 일이 있냐?”

“트라발트 영애에게 선물한 도자기, 기억나냐?”

“당연하지, 그때의 일로 아일론 상회와 앙금이 생겼잖아! 내가 북부까지 용병들을 구하러 간 것도 그 때문이고.”

“아일론 상회로부터 당시 가져간 도자기 30점에 대한 대금이 들어왔다. 트라발트 공녀께서 전부 매입하셨다고 하더군.”

“30점 전부?”

비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헬레나 영애가 선물한 찻잔 세트를 제외한 24점이었지만 처음 생산된 모든 도자기가 트라발트 공녀의 차지가 된 것이었다.

“총 150골드다.”

“뭐라는 거냐?”

“150골드, 도자기 판매 대금이다.”

“세상에, 미… 미쳤군.”

카일이 피라네시아 장원을 매입한 금액이 300골드인 걸 감안하면 첫 도자기 판매 대금으로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이것 역시 아일론 상회에게 떨어진 몫을 제외한 금액이다. 실제 거래 가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백 골드는 족히 넘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 이번에 판매했다는 백여 점의 도자기들도….”

“그렇게 받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고 하더라고. 무슨 상징성이라나 뭐라나. 아무튼 공작가라서 그렇게 받았지만 계속 그렇게 받을 수는 없다면서 대충 가격을 정하고 가셨다. 사치품치고는 상당히 고가에 거래될 거라고 하셨다.”

“대단한데?”

“대단한 정도가 아니지! 보름간 백여 점을 팔아서 얻은 수익만 수십 골드다. 몇 달이면 웬만한 남작 영지 한해 수입에 버금갈 거다. 일 년이면… 상상만 해도 엄청나다.”

비터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마크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다행이군, 끌고 온 용병들 숫자가 많아서 걱정이 많았는데.”

“그런데 어떻게 된 거냐? 용병들 숫자가 늘어난 건 다행인데, 짐마차에 사람들까지?”

“저들은 용병들 가족들이다.”

“가족들까지 데려왔다고?”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북부 사정이 조금 복잡해졌거든 그건 나중에 카일과 만나면 이야기하고, 그보다 저 녀석들은 누구냐? 못 보던 녀석들인데?”

마크의 시선이 저택은 물론 토성 곳곳에 배치된 사내들에게로 향했다. 대략 30명 정도였는데, 느껴지는 기운이나 분위기가 용병보다는 기사에 가까웠다.

“저 녀석들은… 휴, 좀 복잡하지만 대충 카일의 정혼녀가 데려온 기사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저… 뭐?”

마크가 황당한 얼굴로 비터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이야? 카일에게 정혼녀가 있었다고? 그것도 귀족가의?”

“나도 몰라! 오래전 집안 어른들 간 언약이라는데… 나도 더는 묻기 힘들어서, 아무튼 당분간 여기서 머물 거라고 하더라!”

“당분간은 무슨? 정혼녀가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으면 눌러살러 온 거지.”

“카일도 처음엔 엄청 당황하고 불편해했거든, 그런데 지금은… 다시 돌아갈까 봐 걱정이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잘 알겠지만, 우리나 카일이야 그냥 되는대로 성벽을 보수하고 일꾼을 썼는데, 역시 귀족가 아가씨라 그런지, 장원을 관리하는 게 보통이 아니던데? 일꾼을 부리는 것도 능숙하고 비용도 엄청 줄었다.”

“그 정도야?”

“자세히 봐라! 장원이 많이 달라지진 않았냐?”

“그러고 보니….”

장원의 가장 큰 변화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거다. 고작해야 인부들만 머물던 장원 곳곳에 건물이 올라갔고, 그곳에서 거주하는 사람도 적지 않아 보였다.

“크로먼 성 빈민들이다.”

“빈민?”

“장원에서 일할 사람들을 빈민 중에 뽑아서 가족들까지 함께 이주시켰다. 대략 열 가구 정도?”

“일꾼이라면 빈민들보단 노예 몇 명 구하는 게 좋지 않냐? 빈민들을 쓰면 크로먼 백작가에 빌미만 만들어 줄 것 같은데?”

빈민이라도 이들은 크로먼 백작령의 평민들이다. 아무리 카일의 장원에서 살더라고 크로먼 백작령에 세금을 내야하고, 영주의 명에 따라 부역을 해야 했으며, 때로는 징집되어 전쟁터에 나갈 우려도 있었다. 이것 모두 백작의 고유 권한이었다. 비록 피라네사아 장원의 소유권을 가지지 못한 백작이라도 장원에서 일하는 일꾼들을 통제해 얼마든지 카일을 압박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건 아가씨께서 해결했다. 재정관과 직접 만나, 정해진 세금만 납부하면 부역과 징집은 면제하겠다는 서류를 받아오셨다.”

“그게 정말이냐?”

“그래! 인두세가 일반 평민들보다 조금 높긴 하지만, 어차피 백작령에 살면 각종 세금에 시달릴 필요가 없으니 오히려 전체적인 부담은 줄었을 거야! 이주한 사람들도 나름 만족하고 있다.”

“아무리 귀족가의 아가씨라지만, 크로먼 백작가의 늙은 여우가 순순히 서류를 만들어 줬다고?”

재정관 카츠 남작은 골드에 있어서는 까다롭고 꼼꼼할 뿐 아니라 백작가를 방문한 상단에게 각종 명목으로 골드를 착취하기로 유명했다. 그렇다고 백작성에 방문한 상인이나 상단이 손해를 보느냐? 그런 것도 아니다. 딱 적당한 선, 손해를 보지 않을 만큼 뜯어가기에, 상인들이 부르기 시작한 별명이 바로 크로먼 백작가의 늙은 여우였다.

“그뿐인 줄 아냐. 원한다면 빈민들을 얼마든지 더 데려가라더군. 그래서 2차 이주 계획도 생각하고 있다. 북쪽 성벽 아래에 마을을 만들고 평원 쪽으로 농토도 만들 거라던데?”

“하지만 물이 없잖아!”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때였다. 저택 안쪽에서 수수한 원피스를 입은 베아트리 영애와 함께 윌리스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장원에서 흘러나온 물을 가둘 저수지를 만들 겁니다. 일단 그 정도면 장원과 마을이 자급자족할 정도의 식량은 생산할 수 있을 거예요.”

“아!”

“마크라고 하셨나요?”

비터가 멍하니 영애를 바라보는 마크의 어깨를 툭 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혼자다.”

비터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마크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마, 마크입니다. 아가씨.”

“베아트리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아, 예! 아가씨.”

마크가 당황한 얼굴로 얼떨결에 인사를 나누는 사이, 비터가 환하게 웃으며 베아트리 옆으로 황급히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나오셨습니까?”

“비터 님은 오늘 떠나는 건가요?”

“며칠 뒤면 여유분으로 남겨 놓은 백토까지 모두 떨어질 겁니다. 그 전에 다시 채워 놔야 도자기 생산에 지장이 없을 겁니다.”

“고생이 많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세요. 평원에서 백토를 찾고 있으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예요.”

“고생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이 정도 고생이야 용병에겐 아무것도 아닙니다.”

비터가 씨익 웃으며 말했지만, 보름 동안 가장 고생이 많았던 사람은 카일을 제외하면 비터 였다. 그는 부족한 백토를 수급하기 위해 벌써 두 번이나 샤론 마을을 쉬지 않고 오갔다.

“그래도 조심히 다녀오세요.”

“걱정 마십시오. 안전하게 다녀오겠습니다.”

비터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모습 어디에도 당황했다거나 불편했던 모습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저… 카일은.”

시간이 지나도 카일이 나오지 않자 마크가 베아트리 영애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런, 깜빡했군요. 따라오세요. 카일에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네.”

마크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참 전부터 한쪽에 서 있던 중년 사내와 함께 베아트리 영애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두 사람을 데리고 1층 가장 끝방, 붉게 칠한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섰다.

“카일!”

“들어오십시오.”

안에선 카일의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베아트리 영애가 뒤로 물러났다.

“들어가 보세요. 전 다른 할 일이 있어….”

“…아! 감사합니다.”

마크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후 문을 열고 안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베아트리 영애가 몸을 돌려 2층으로 향했다.

“어떻게 되었나요?”

“거점 일곱 곳이 파괴되었고, 가신들 다섯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게이츠 경이 최대한 수습을 하고는 있지만 오래 버티진 못할 겁니다.”

“바르칼 경이 결국 검을 뽑았다는 말이군요.”

“자작과는 소원하지만, 헬레나 영애만은 끔찍이 아끼는 바르칼 경입니다. 그녀가 공격을 당했으니… 제 불찰입니다. 미리 거점들을 정리해야 했는데.”

“모든 책임은 제게 있어요. 이번 일을 승인한 것도 저니까요.”

“아, 아가씨….”

“남은 병력은 얼마나 되나요?”

“울프 팩 기사단 중 붉은 갈기 기사단은 전멸했고, 검은 늑대 기사단 중 일부를 게이츠 경이 인솔해 이곳으로 이동 중입니다.”

“이 한 번의 실패로 기사단과 거점 대부분을 잃었군요.”

“…그건…….”

“살아남은 가신들과의 접점도 모두 정리하세요. 꼬리가 자칫 몸통을 드러나게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의 지원이 없다면 기사단을 다시 복구하긴 힘들 겁니다.”

“어차피 가신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돌아설 겁니다. 그들은 그런 자들이니까요.”

가신들이 베아트리 영애를 지지한 건 그녀를 통해 권력과 부를 차지하려는 것뿐, 정통성이나 명분이니 하는 건 처음부터 관심도 없던 자들이었다.

“차라리 카일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가 우릴 이곳에 머무는 걸 허락했다고 해도, 절 완벽하게 믿진 않아요. 오히려 도움을 청했다간 반감만 살 거예요.”

베아트리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최대한 몸을 감추고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 게이츠 경에게도 그렇게 전해주세요. 섣부르게 바르칼 경을 도발하지 말라고. 최대한 병력을 보전해 돌아오라고.”

“과연 게이츠 경이 제 말을 들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부탁해요.”

“휴… 알겠습니다. 이번엔 제가 직접 게이츠 경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윌리스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더니 곧장 밖으로 달려 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