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76. 베아트리 영애(2)
응접실 안, 베아트리 영애와 마주 앉은 카일이 찻잔을 내밀었다.
“버섯차입니다.”
카일이 내민 찻잔을 베아트리 영애가 신기한 듯 살폈다.
“토기는 많이 봤지만 이런 건 처음 보는군요.”
“옹기라는 겁니다. 이번에 판매를 위해 만든 물건입니다.”
“그럼 여긴 이 옹기라는 걸 만드는 공방이겠군요.”
“당분간입니다. 저택 뒤편에 짓고 있는 공방이 완성될 동안 말입니다.”
“그렇군요.”
카일의 말 고개를 끄덕인 베아트리 영애가 뜨거운 기운을 불어내며 찻물을 조심스럽게 마셨다.
“버섯 향이 좋군요.”
“입맛에 맞으신다니 다행입니다.”
카일이 담담하게 대답은 했지만, 마치 서로를 탐색하듯 이어지는 대화와 분위기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와 나누는 대화가 마음에 들지 않나 보는군요.”
카일의 내심을 읽은 듯 찻잔을 내려놓은 영애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름다우신 영애와의 대화인데… 그럴 리가요.”
“훗… 거짓말이 서투르시군요.”
“거짓말은 아닙니다. 단지, 첫 만남이 좋지 못한 것 같아서요.”
카일의 시선이 베아트리 영애의 어깨로 향했다. 치료는 잘 된 듯 보이나, 아직 어깨를 사용하긴 힘들어서인지 행동 하나하나가 부자연스러웠다.
“…아셨군요.”
“어깨를 다치신 것 같더군요. 행동도 부자연스럽고, 저기서 절 노려보는 노인네도 불편하고 말입니다.”
카일의 시선이 영애 뒤쪽의 지팡이를 든 노인에게로 향했다. 지팡이에는 영롱한 붉은 보석과 함께 큼지막한 푸른 마나석이 박혀 있었는데, 불편한 몸을 지탱하는 단순한 지팡이는 아닌 것 같았다.
“흠…. 그렇긴 하겠군요.”
고개를 돌려 노인을 바라본 베아트리 영애가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하게 했다면 사과하겠어요. 하지만 델린 마법사님은 제 말도 잘 안 들어서요. 거부하면 저도 방법이 없답니다.”
“뭐, 어쩔 수 없죠. 그보다 영애께서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지금 제가 굉장히 바빠서….”
카일이 바쁜 건 거짓이 아니다. 당장 점토를 채취하는 평원도 살펴야 했고, 새롭게 증설될 가마터도 직접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장원 곳곳에 남은 백토의 흔적도 조사해야 했다. 그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백토의 흔적이 남은 장원 곳곳을 파헤쳐 보았지만, 어디에도 백토를 찾을 수 없었다. 즉 백토는 원래부터 장원 흙이 아닌 어딘가에서 가져온 흙이란 뜻이었다. 토성을 축조하면서 어디선가 가져온 흙에 백토가 섞였을 가능성이 있었는데, 때문에 최근 장원 인근 토양을 살피느라 하루가 부족할 지경이었다.
“재밌군요.”
“네?”
“저와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 중에 이렇게 노골적으로 먼저 대화를 끝내려 한 사람은 처음이거든요. 아니, 어쩌면 서로가 배척하던 종족이니 당연한 건가?”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지?”
갑자기 내뱉은 종족이란 말에 카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베아트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는 듯한 말투에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흠…. 당신, 정말 모르나요?”
“계속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데, 말장난하러 오셨다면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얼굴을 찌푸린 카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제가 온 이유를 말씀드리기 전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어요.”
“확인?”
“당신이 가진 카누스를 보고 싶어요.”
“카누스? 불의 신 카누스 말인가요?”
“당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베아트리가 오히려 당황한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잠시 고심하듯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휴, 당신이 가진 드워프의 대궁, 보여줄 수 있나요?”
“영애께서 그걸 어떻게…?”
카일이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대궁이란 말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어쨌든 카일이 가진 활은 드워프가 만든 것이 분명했으니 놀랄 수밖에는 없었다.
“제가 가진 세계수의 활에 필적할 활은 오직 드워프의 대궁, 카누스가 유일하니까요. 보여줄 수 있나요? 그럼 드워프의 대궁에 얽힌 비밀을 알려주죠.”
베아트리 영애의 말에 잠시 망설이던 카일이 허리에 감긴 활을 풀어 탁자에 올려놓았다. 재질을 알 수 없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활대는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드워프와는 전혀 맞지 않게 볼품이 없었지만, 활로서의 가치는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드워프의 활, 카누스.”
베아트리가 떨리는 손으로 활대를 잡더니, 불편한 어깨에도 능숙하게 활대를 잡아 시위를 걸었다.
“역시 대단한 강궁이에요. 아이들이 이렇게 힘들어할 줄 몰랐어요.”
“아이들?”
“바람의 정령 실프라고 하죠.”
베아트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일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일 정도의 작은 바람이 일었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영애께서 정령사일 줄은 몰랐습니다.”
카일이 신기한 듯 바라보자 베아트리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이젠 제게 관심이 생겼나요?”
“아… 그건…….”
“아마도 정령이란 존재에 더 관심이 있겠죠. 하지만 저와 계약한 하급 정령 실프의 능력은 그리 대단하진 않아요. 그저 화살을 당길 때 힘을 보태거나 정확도를 보정해줄 뿐이죠.”
“그래도 정령, 그중에서도 바람의 정령이라면 정찰같은 데 활용할 수도 있지 않나요?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카일의 물음에 영애는 고개를 흔들었다.
“잘못 알고 있군요.”
“네?”
“정령이 중간계에 머물 수 있는 건 정령사의 정신과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달리 말하면 정신력이 미치는 범위를 벗어나면 자연스럽게 정령계로 강제소환 당하죠. 반대로 정신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선 항상 함께할 수 있죠.”
“그럼… 정령은 정령사 곁을 떠날 수 없단 말입니까?”
“약간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맞아요. 예를 들어, 저와 계약을 맺은 실프는 바람의 정령인 덕분에 반경 20M 이상만 떨어지지 않으면 저와 항상 함께 있을 수 있죠. 덕분에 수많은 암살 시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고요.”
“그렇군요.”
20M,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였지만, 카일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상당히 짧은 거리였다. 하지만 영애의 말대로 기습적인 공격이나 암살에는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제법 유용해 보였다. 하지만 그뿐이다. 정령사는 엘프나 드워프처럼 4대 원소와 친화력이 깊은 이종족들과는 쉽게 계약을 맺지만, 인간 중에는 선택받은 극히 소수만이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것도 최근엔 정령사라고 알려진 인간은 아직까지 없었다. 눈앞에 나타난 베아트리 영애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러니 카일로서는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 있다는 기대 같은건 애초부터 없었다.
“정령에 대해선 더 궁금한 건 없나요?”
“정령과 계약을 맺을 것도 아닌데, 더 알아서 뭐 하겠습니까?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포기가 빠르군요.”
“안될 걸 아니까요.”
“왜 꼭 안 될 거라고 생각하죠?”
“그건….”
베아트리 영애의 말에 카일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재밌는지 영애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제가 정령에 대한 재밌는 사실 하나를 말해줄까요?”
“재밌는… 사실요?”
“네!”
영애가 카일에게 비밀스러운 말을 전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건 비밀인데, 정령은 순수 인간과 계약을 맺지 않아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인지?”
“말 그대로예요. 순수 인간과 정령은 계약을 맺을수 없다는 말이죠. 지금껏 세상에 알려진 모든 정령사는 드워프나 엘프의 혼혈들이죠.”
“그럼…?”
카일이 베라트리 영애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미 실프라는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
“그리미엄 자작가는 엘프의 피를 이었다는 소문이 있었죠. 사실 맞는 말이에요. 정확힌 제 할머님께서 엘프셨어요. 아버지을 낳으시곤 곧 숲으로 돌아가셨지만요.”
“엘프가 지금도 존재한다는 말입니까?”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군요. 그럼, 현 그리미엄 자작은….”
“아버지의 배다른 형제죠, 제겐 원수지만.”
“원… 수라고요?”
“정령은 때론 알고싶지 않은 이야기를 알려주기도 하거든요.”
“그렇… 군요.”
카일이 낮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정령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인간이 아닌 정령이 직접 보고들은 이야기를 전했다면 베아트리 영애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흠….”
대화를 이어갈수록 그리미엄 자작가나 베아트리 영애에 대한 몰랐던 사실이나 비밀들이 하나씩 들춰지고 있었다. 더 이상 자작가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은 카일로서는 이런 대화가 불편할 수밖에는 없었다.
“…저와의 대화가 아직도 마음에 들지 않나요?”
“전 나이 어린 일개 용병이자 작은 공방의 주인일 뿐입니다. 귀족가의 내밀하고 복잡한 비밀에 대해선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일개 용병이라고 하기엔 너무 과한 실력 아닌가요. 중급? 아니, 당신 주변에 흐르는 마나의 기운이면 상급에 근접했겠군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 없군요.”
카일이 놀란 표정을 감추려는 듯 굳은 얼굴로 물었다. 최근 도자기 생산으로 한 달 이상 검술 수련은 물론 태극권 수련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바쁘게 지냈다. 중급 끝자락을 목전에 둔 카일에겐 수련이 아쉬운 시간이었지만, 공방 역시 카일에겐 중요한 거점이자 사업이기에 잠시 수련을 미뤄뒀었다. 그런데 며칠 전 한 달만에 처음 모든 걸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태극권을 펼치자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오러가 부드럽게 가슴 쪽으로 치솟으며 마나플라워를 개화시켰다. 아직 봉오리에 불과할 정도로 아주 미약하긴 하지만 분명 상급에 올라선 건 분명했다. 헌데 베아트리 영애가 정확히 카일의 상태를 파악한 것이다.
“뭐, 상관없어요. 당신에게 도움을 바라는 건 아니니까요.”
“복수도, 도움도 아니라면 절 찾아온 진정한 용건이 뭡니까? 정말 드워프 대궁의 비밀을 알려주기 위해서란 말입니까?”
“맞아요. 전 이 드워프의 대궁, 카누스 때문에 당신을 찾아왔어요.”
베아트리 영애가 탁자 위에 놓인 카누스를 들었다.
“카누스, 어둠을 걷어내고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라! 리빌리오(Revelio).”
갑작스러운 베아트리 영애의 짧은 영창과 함께 영애의 손에서 시작된 은은한 연녹빛 기운이 카누스를 감싸기 시작했다.
“어… 이건!”
영애의 손에서 시작된 연녹빛 기운이 대궁과 만나는 순간, 카누스의 외관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된 묵은 때가 사라지듯, 검고 칙칙했던 표면이 사르륵 사라졌다. 그리고는 화려한 불꽃이 생동감 넘치게 조각된 붉은 몸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카누스!”
“맞아요. 엘프의 활을 넘어서기 위해 드워프 최고의 대장장이가 만든 활이자, 오직 드워프의 피를 이은 자만이 당길 수 있는 최고의 활이죠.”
“…드워프의 피를 이은 자만…?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미 이해한것 같은데, 아닌가요?”
베아트리 영애기 빙그레 웃으며 되물었다.
“설마… 제가 드워프의 피를 이었단 말입니까?”
“맞아요. 이 카누스가 바로 그 증거죠. 당신이 내뿜는 그 강대한 힘 역시 드워프의 피를 이었기 때문이죠.”
“말도 안 됩니다.”
“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죠?”
“제가 태어난 걸 지켜본 사람만 수십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전 드워프의 피를 이었다고만 했을 뿐, 카일의 부모님 중 드워프가 있다고 말한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요?”
“네?”
“당신 가문에서 언젠가 갑자기 대단한 신력을 가진 선조가 탄생했을 거예요. 당신에겐 아마도 조부, 아니면 증조부쯤 되겠군요.”
정확했다. 카일의 증조부가 대단한 신력을 타고 태어났다고 했다.
“하지만… 드워프는 난장이입니다. 보시다시피 전 일반인보다 큰 키와 체구를 가졌습니다.”
“그건 모계 쪽 영향이에요. 일례로 100년 전 불의 정령사 카이렌은 당신과 비슷한 체구로 거대한 대검을 한 손으로 휘두를 정도로 대단한 정령사였죠. 그는 공공연히 자신의 아버지가 드워프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알려져 있죠.”
“그런…. 그럼 그분의 후손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어느 귀족가 영애를 납치해 서남쪽으로 도망쳤다고 했는데, 이후의 기록은 알려진 게 없어요. 당시엔 서쪽 맴피스 왕국으로 탈출했다고 알려졌었죠.”
베아트리 영애의 말에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영애를 바라보던 카일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충격적이긴 하지만, 좋습니다. 그래서 제게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카누스는 드워프의 피를 잇지 않으면 당길 수도 없으니 대궁을 원하시는 것도 아닐 텐데요?”
“맞아요. 전 드워프의 대궁 카누스에겐 관심이 없어요. 관심은 오히려 카누스의 주인인 카일 당신에게 있죠.”
“네?”
“제가 오늘 카일 당신을 찾은 건, 100년 전 엘프와 드워프의 종족 간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예요.”
“종족 간… 언약?”
카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베아트리 영애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