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75. 베아트리 영애(1)
쿠웅-
묵직한 굉음과 함께 바위를 받치던 기중기가 부러지며 커다란 바위가 성벽 위로 위태롭게 매달렸다.
“비, 빌어먹을 당겨!”
“미, 밀린다…!”
밧줄을 당기던 사내들이 악을 쓰며 버텼지만, 바위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르륵 끌려갔다.
“버텨! 지지대가 부러지면 모두 죽는 거다!”
바위 아래쪽엔 붕괴한 성벽이 무너지지 않게 지지해 놓은 통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놈들아! 뭘 멍청히 서 있는 거냐! 어서 내려가 밧줄에 달라붙지 않고!”
성벽 위에 올라선 채 현장을 지휘하고 있던 노인이 다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다른 때와는 달리 성벽 위에 올라선 일꾼들은 불안한 듯 서로를 바라만 볼 뿐 쉽게 노인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
“…지금 내려갔다가 성벽이 무너지면…어, 어쩝니까!”
인부 하나가 불안한 고개를 저었다.
“멍청한 놈! 지지대가 무너지면 회랑 전체가 연쇄적으로 붕괴할 거다. 여기라고 안전할 것 같으냐!”
노인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분통을 터트렸지만, 곧 아래로 떨어질 듯 위태롭게 매달린 커다란 바위를 보며 성벽 아래로 내려갈 사람은 없었다.
“으아악-”
그때였다. 밧줄을 잡고 안간힘을 쓰던 인부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풀썩 고꾸라지면서 겨우 유지되던 힘의 균형이 무너졌다. 이내 밧줄을 잡고 버티던 인부들이 연달아 넘어지며 커다란 바위가 아래로 추락했다.
“끄, 끝이다.”
노인은 곧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릴 성벽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한참이 지났지만 굉음은커녕 일꾼들의 놀란 목소리만 들려왔다.
“와아~!”
“사, 살았다.”
“어떻게…!”
성벽 위에서 들려온 탄성에 노인이 살며시 눈을 뜨곤 성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저… 저런…!”
성벽 아래엔 밧줄을 덩기던 사내들을 대신해 커다란 체구의 사내 혼자 밧줄을 잡곤 버티고 서 있었다.
“노인장! 이걸 언제까지 붙잡고 있어야 하는 거요?”
카일이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치자 노인도 그제야 정신을 수습하곤 쓰러진 사내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들, 언제까지 쓰러져 있을 거냐, 빨리 일어나지 못해!”
“가, 갑니다요.”
노인의 고함에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사내들이 밧줄을 잡기 위해 다가갔지만, 카일이 손을 들어 다가오는 사람들을 막았다.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그냥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만 말해 주십시오.”
“그게…!”
당황한 일꾼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자 카일의 얼굴에 약간의 짜증이 어렸지만, 깊은 한숨과 함께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차분히 말했다.
“그렇게 망설일 시간에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부터 알려주시는 게 먼저일 것 같은데요?”
카일의 말에 화들짝 놀란 사내가 다급히 말했다. 너무 차분하고 여유 있는 카일의 태도에 지금이 얼마나 급박한 상황인지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그러니까…기중기가 부러져서 방향 전환이 불가능합니다.”
“그럼 아래로 내릴 수는 없고 위로 올려야 한단 말이군요.”
“네… 저 바윗돌은 Keystone(이맛돌) 이라는 건데, 성문 위쪽 아치 중심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내가 커다란 아치 구조물 가장 상단의 비워져 있는 홈을 가리켰다.
“저기까지 올리면 된다는 말이군요.”
“그, 그렇습니다. 저희를 도와 저곳까지만 올려주시면 됩니다.”
“간단하군요. 일단 잠시 물러나 계십시오.”
“네?”
카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사내가 반문했지만, 카일은 신경 쓰지 않고 천천히 밧줄을 당기기 시작했다.
“우, 움직인다.”
“바위가… 들리고 있어!”
“…대단하다.”
성벽 위는 물론 성벽 아래쪽에 있던 일꾼들까지 달려와 카일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 멍청히 서 있지 말고 일들 안 해! 이놈들, 모두 잘리고 싶어?”
노인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고함을 치자 일꾼들이 화들짝 놀라더니 분분히 흩어졌다. 그사이 아치 상단부까지 바위가 끌어올려졌고, 일꾼들이 달라붙어 돌을 맞춰 넣으며 성문 아치를 완성했다.
“수, 수고하셨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랄 것까지야… 아무튼 앞으론 안전에 좀 더 신경을 쓰십시오. 제가 항상 도울 수는 없는 일이니 말입니다.”
카일이 밧줄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손을 털었다.
“역시 카누스의 주인답군.”
그때, 왠지 낯익은 젊은 사내가 담담한 표정으로 카일에게 말을 걸었다.
“누구지?”
“날 알아보지 못하다니…. 이거 서운하군. 복면 때문인가?”
사내의 말에 카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사내의 등 뒤로 삐죽이 솟아난 대궁으로 향했다.
“카세인 협곡…!”
“하하, 역시 알아보는군.”
사내의 웃음소리에 카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카일은 조심스럽게 한걸음 내디뎌 조금 전 완성된 아치성문 아래를 차지했다. 좁은 통로를 먼저 차지해 다수를 효율적으로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복수… 때문인가?”
검을 단단히 고쳐잡은 카일이 사내를 향해 물었다. 여차하면 곧장 공격해 선수를 칠 생각이었다. 이곳은 좁은 회랑인 데다 근접전이면 오히려 카일이 유리할 수 있었다.
“걱정 마라! 우린 적으로서 싸우러 온 게 아니다.”
“그럼 왜 이곳을 찾은 거지?”
“그전에… 손님을 이렇게 밖에다 세워 둘 건가?”
“손님?”
“아무리 적이라도 찾아온 손님은 내쫓지 않는다. 하물며 우린 적으로 온 것도 아니다.”
“너희 암살자의 말을 어떻게 믿지?”
사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필요에 의해 헬레나 영애를 암살하려 했지만, 그들은 암살자가 아니라 기사들이다. 카일의 말은 그들을 모욕주기에 충분했다.
“너…!”
사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곧이어 마차에서 들려온 맑은 목소리에 사내의 분노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윌리스…. 우린 싸우러 이곳에 온 게 아니랍니다.”
“송구합니다.”
약간의 질책이 담긴 목소리에 윌리스가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설마 그리미엄 자작가의…?”
“무엄하다. 그리미엄 자작가의 정당한 계승자, 베라트리 영애시다.”
윌리스가 카일을 향해 당당하게 말했지만, 카일의 얼굴은 냉담했다.
“계승자? 내가 알기론 아직 그리미엄 자작가의 소영주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들었다.”
“흥! 그들은 약속을 저버린 배신자일 뿐이다.”
윌리스의 말에 카일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난 모르는 일이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런 귀족 간 다툼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돌아가라! 당시엔 어쩔 수 없이 관여했을 뿐, 날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다.”
카일의 말에 윌리스는 물론 마차를 호위하던 십여 명의 사내들이 싸늘하게 카일을 노려봤다. 그러나 적대적인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휴…. 도발은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어떤가? 이만하면 우리가 싸우러 온 게 아니란 것쯤을 알았을 텐데?”
윌리스의 말에 얼굴을 찌푸린 카일이 검 손잡이에서 손을 풀었다.
“좋아! 당장 싸우러 온 게 아닌 것쯤은 알겠다. 그럼 왜 날 찾아온 거지?”
“영애께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신다.”
윌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날? 왜?”
“여기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윌리스는 하나둘 몰려든 일꾼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아가씨는 온전하지 못한 몸임에도 직접 자넬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오셨다. 이 정도면 아무리 적이었어도 정중히 맞아주는 게 도리가 아닌가?”
윌리스의 말에 카일이 얼굴을 찌푸렸지만, 온전치 못한 몸으로 자신을 만나기 위해 달려온 사람, 그것도 귀족가의 영애를 그냥 내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당장 눈을 부라리고 있는 윌리스와 부하들이 죽자고 달려들 것만 같았다.
“…흠, 좋아!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카일이 통로에서 물러나자, 윌리스를 선두로 베라트리 영애가 탄 마차가 성문 아치를 통과해 토토성으로 들어섰다.
“방어 성벽?”
윌리스가 주변을 살피며 얼굴을 굳혔다.
“겉으론 단순한 토성으로만 보았는데, 전혀 아닙니다.”
“입구도 좁고, 꺾이는 구간마다 삼면공격이 가능해서 돌파하려면 피해가 클 거라 생각했는데… 여긴 석궁병 수십만 배치하면 기사단도 뚫지 못할 것 같습니다.”
윌리스의 옆으로 다가온 부하들이 토성을 돌아보며 굳은 얼굴로 한마디씩 내뱉었다.
“돌파 방법은?”
“충차 진입이 어렵습니다. 회랑 사이에 성문이 세 곳이나 있으니, 성문보다는 성벽을 직접 공략하는 게 좋겠습니다.”
“어림없는 소리, 지금은 토성이지만 높이가 어림잡아 5m가 넘습니다. 남측이나 북측을 공격해야 하는데, 남측은 가파른 절벽이 있고, 북측으로는 대규모 병력을 집중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 방법은 한 가지뿐이군.”
“예! 고사 작전이 최선입니다. 피라네시 평원은 오래전부터 물이 마른 황무지입니다. 분명 이곳 장원도 대규모 병력이 주둔하기엔 물이 부족… 하진 않겠군요.”
낮은 물소리와 함께 눈앞에 깨끗하게 정비된 수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폭이 좁긴 해도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른다는 건 장원 안으로 지속적으로 물이 유입된다는 뜻이었다.
“고사 작전은 어렵겠군.”
“송구합니다.”
“아니다. 나 역시 이 정도일 거란 생각은 못 했다.”
카일이 장원을 매입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망가지고 막혀있던 수로를 새롭게 고쳐 물을 충분히 확보하는 일이었다. 처음엔 단순히 물을 확보하겠단 생각에 시작했지만, 수로를 복구하면서 다시 한번 장원을 만든 사람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로는 저택은 물론 마을 전체를 거미줄처럼 연결한 후 다시 장원 전체를 한 바퀴 돌아 퇴출구를 통해 토성 밖으로 빠져나갔다. 덕분에 장원 안은 어느 영주성이나 장원보다도 물이 풍부한 곳이었다.
“오히려 잘됐습니다. 어차피 카누스의 주인이라면 적으로 만날 일은 없을 테니, 차라리 잘된 일 아닙니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우린 항상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그러니 긴장을 놓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윌리스의 말에 부관들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흩어졌다. 그 사이 마차는 흔적만 남은 마을을 지나 저택 앞에 멈춰 섰다.
* * *
커다란 덩치를 가진 검은 말 4마리가 끄는 거대한 마차와, 마차를 호위하는 세 기사가 빠른 속도로 크로먼 백작령의 경계를 넘었다.
그들은 간단한 검문을 받고는 곧장 영주성에서도 가장 고급여관 별채로 향했다.
쾅-
“이번엔 피해가 너무 컸다. 기사들을 다섯이나 잃다니!”
별채 안으로 들어온 다부진 체구의 중년 사내는 연신 탁자를 내려치며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에는 그 녀석을 확보했어야 하는데…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영주님! 더 이상은… 이미 약속한 시일이 너무 지체되었습니다.”
중년 기사의 말에 영주라 불린 사내는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연신 탁자를 내리쳤다.
쾅쾅-
“알아! 아니까 지금 돌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벌써 이번이 세 번째야! 죽은 중급기사만도 열이 넘는다. 거기에 죽은 와이번도 세 마리나 된다. 이걸 어떻게 국왕 전하게 보고한단 말인가!”
영주의 말에 중년 기사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서둘러 가셔야 합니다! 지난번 수정동 침입 사건도 크로노스라는 첩보가 있습니다. 이미 크로노스 왕국에서 의심한 이상 더 지체했다가 붙잡히기라도 하면….”
“으윽! 이 망할 놈들! 감히 바런트 왕국의 기밀을…!”
영주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연신 분노를 토해냈다.
아서 드 베지토 백작은 크로노스 왕국 동남쪽에 위치한 바런트 왕국의 백작인 동시에 상급 기사이자 레드 와이번의 주인이다. 국왕의 은밀한 밀명을 받고 이곳 크로노스 왕국 북쪽 아이스 랜드에 서식하는 화이트 와이번의 알을 얻기 위해 크로노스 왕국에 잠입한 인물이었다.
“백작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크로노스에 잠입한 조직이 대대적으로 소탕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급히 들어온 기사 지그토가 베지토 백작에게 다급히 말했다.
“그게 무슨…!”
“이미 조직 대부분이 발각당해 잡혀갔고, 접선지도 드러났다고 합니다.”
“설마 우리의 위장 신분까지 들통났단 말인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미 접선지가 들통난 이상 오래지 않아 발각당할 수 있습니다.”
기사 지그토의 말에 베지토 백작이 심란한 얼굴로 고심에 빠졌다.
“크로노스 왕국의 움직임이 저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아무래도 우리에 대한 정보가 드러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서둘러 빠져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기사 머트로까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서둘렀다간 오히려 발각될 수 있다. 우릴 직접 치지 않고 본국의 정보조직을 먼저 건드렸다는 건….”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하겠다…. 우리가 놀라 서둘러 움직이길 바라는군요.”
“이대로 와이번을 타고 움직였다간 사방에서 포위당하고 말 거다.”
“그럼….”
“지금은 오히려 신중히 움직일 때다.”
베지토 백작은 목에 걸고 있는 커다란 루비를 손으로 꽉 움켜쥐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기사 머트로와 지그토가 굳은 얼굴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