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72. 도예 공방(1)
철컥-
넓게 펼쳐진 가죽천 위로 각종 공구들이 하나씩 가지런히 놓였다.
“이… 걸 모두 직접 만든 겁니까?”
고투가 가죽천 위에 놓인 각종 공구를 신기한 듯 하나씩 들어보며 물었다.
“라이플은 공구가 없어도 쉽게 분해를 할 수 있지만, 특수분해, 그러니까 미세분해를 하려면 이렇게 공구가 필요합니다.”
“그… 아티펙트의 이름이 라이플이라고 하셨죠.”
“맞습니다.”
“허허, 제 평생 이렇게 기계를 이용해 만든 아티팩트를 보는 건 처음입니다. 이거 땅속 친구들이 봤다면 정말 기뻐했을 텐데….”
고투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번부터 땅속 친구들이라고 하셨는데, 혹시 드워프 종족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푸룬 망치 일족과 젊었을 적 종종 교류했지만, 수십 년 전부터 연락이 끊었습니다. 드워프란 종족 자체가 광물을 찾아 떠도는 친구들이니 그들도 여길 떠났을 겁니다.”
“여기라면… 크로먼 백작령에 드워프들이 있었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한동안 이곳에 머물렀지요. 인간의 눈을 피해 땅속 깊은 곳에 거처를 만드는 친구들이라 웬만해선 만나기 힘들지만, 간혹 인간과 인연을 맺고 거래를 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들도 필요한 물품을 구하려면 인간의 도움이 필요하거든요.”
“아! 그래서 토일 님께서 아쉬워하셨군요.”
“하하! 그렇죠. 일단 드워프와 거래만 가능하다면 상단에겐 큰 이익이 남으니 말입니다.”
고투가 웃으며 들고 있던 공구를 내려놓고 한쪽에 놓아둔 라이플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공구를 모두 꺼내 놓으신 걸 보니 이제 작업을 시작하실 모양이군요.”
“반트 님께서 오늘부터 피라네시아 평원에 대한 협상을 진행하신다고 했으니, 그 전엔 작업을 끝내야 할 것 같아서요. 이후부터는 공방을 만드느라 시간이 없을 것 같거든요.”
“덕분에 라이플이란 물건을 자세히 살필 수 있게 되었군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라이플에 대해선 제자분께도 비밀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왜 이런 획기적인 아티팩트를 감추려 하십니까? 이런 무구라면 일반 평민들도 손쉽게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럼 인간들의 희생이 보다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라이플로 꼭 몬스터만 사냥하게 될까요?”
“그건….”
“그런 겁니다. 대중에게 공개하기엔 아직 위험한 물건이죠.”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만, 그럼 왜 이렇게 위험한 라이플이란 마법무구를 만드신 겁니까?”
고투의 물음에 카일이 피식 웃으며 사실대로 답했다.
“그건… 제가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네?”
“남보다는 저와 제 가족, 그리고 저와 함께할 사람들이 먼저란 말입니다. 이제 곧 공방까지 생길 테니 그들 모두를 지키려면 힘이 있어야 하니까요.”
“…그렇군요. 힘이 있어야 한다. 아주 인상적인 말입니다.”
고투가 고개를 끄덕이며 묘한 눈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자… 그럼 시작해 보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하십시오.”
“네!”
카일이 신중하게 라이플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새롭게 장착할 부품들은 이미 마을에서 제작해 왔지만, 마나석이 장착된 볼트 부분에 황동을 덧씌우면서 생긴 이격을 조정해야만 했다. 카일이 작은 끌을 손에 쥐었다.
우웅-
청백색 오러가 끌을 감싸며 압축되기 시작했다.
“흐음…!”
작업을 지켜보던 고투가 놀란 눈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이 엑스퍼트란 사실은 토일에게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선명하고 진한 오러를 일으킬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대단한… 집중력이군.”
얼마나 작업에 몰두했는지, 한참 동안 카일은 라이플에서 시선을 한 번 돌리지 않았다.
끼이익-
선명한 오러가 깃든 끌을 이용해 이격된 부분을 정교하게 깎아낸 뒤 새롭게 만든 볼트를 끼워 넣었다. 카일이 새롭게 만든 라이플은 내부에 열두 발을 장전할 수 있는 반자동식 라이플이다. 반자동식 저격소총을 응용했지만, 결과물은 M1 개런드와 비슷한 구조의 라이플이 만들어졌다. 마법 덕분에 화약이 필요 없게 되면서 장전 탄환도 8발에서 12발로 늘었고, 라이플의 무게도 줄어든게 장점이었다.
“휴~”
참았던 숨을 탁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 끝나신 겁니까?”
고투가 탁자 위에 따뜻한 차와 함께 야생 꿀과 밀빵이 든 쟁반을 내려놓았다.
“간단하게 챙겨왔습니다. 작업에 너무 열중하셔서 식사 시간엔 따로 부르진 않았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이제 완성하신 겁니까?”
“네, 시험 사격은 피라네시아 장원에서 할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사람의 시선을 피하기엔 그만한 데가 없어서요.”
“이런, 아쉽군요. 꼭 사격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고투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언제 한번 꼭 찾아 주십시오. 그땐 직접 사격도 가능할 겁니다.”
“하하! 그런 날이 올까요. 보시다시피 호빗인 저는 외부로 나가긴 어렵습니다.”
“그럼 고투 님께선 밖으로 나가시지 못하는 겁니까?”
“아일론 상회 덕분에 노예에서는 벗어났지만, 이종족이란 것이 언제 다시 노예로 잡혀갈지 모르는 신세입니다. 그러니 되도록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단절된 삶을 사는 거죠.”
“그럼… 이곳은 안전한 겁니까? 보기엔….”
“하하! 그렇게 보실 수도 있습니다. 방비가 상당히 허름해 보이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공장 주변엔 석궁을 소지한 용병들에 거주하고 있죠. 모두 아일론 상회의 도움으로 고용된 이들인데, 귀금속을 노리는 도둑이나 노예 사냥꾼들로부터 절 지켜줍니다.”
“그렇군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좁은 골목 양쪽에서 석궁을 발사하면 피할 곳 없는 좁은 골목에선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용병들이 고투를 보호하고만 있는 걸까? 좁은 3층 건물 안에 갇혀 살아가는 고투의 삶이 노예로 보석을 세공하던 삶과 얼마나 다를지는 카일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 * *
“아악! 잘못했어요.”
에토는 팔을 잡히는 순간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소매치기를 잡으면 용병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그 자리에서 팔목을 잘라 다시는 소매치기를 할 수 없게 만든다. 이후 경비대에 신고하면, 영주의 재판 없이 손목을 자른 벌로 작은 벌금 정도만 내고는 풀려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럴 경우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고아들은 치료도 받지 못하고 과다 출혈이나 감염으로 죽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에토 역시 그렇게 죽어간 아이들과 친구들을 수없이 보았기에 그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살려 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발….”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 측은해 보일 법도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 누구도 소년을 측은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또 걸렸군.”
“곧 저 녀석도 팔이 잘려 나가겠군.”
“며칠 전 그 녀석도 용병들 주머니를 털다가 잡혀서 팔이 잘렸지 아마!”
“당연하지! 어린놈이 벌써 소매치기나 배워서…저런 녀석들 따끔하게 혼이 나야 해! 다시는 소매치기 못 하게 말이야!”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년에 대한 연이은 비난에도 소년은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저 잘못했다고 용서만 빌 뿐이었다. 그 모습을 난감한 듯 바라보던 카일의 눈에 여기저기 찢어진 낡고 허름한 옷차림과 앙상한 팔과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너…!”
소년을 향해 막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카일!”
멀리서 들려온 귀에 익은 목소리에 카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비터! 마크! 드디어 도착했군요.”
말 두 마리가 끄는 커다란 짐마차를 타고 마크와 비터가 카일에게로 다가왔다.
“빌어먹을 녀석!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비터가 카일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지만 목소리엔 반가움이 가득했다.
“네? 고생이라니요? 아버지께 서신만 전해드리면 알아서 재료를 내어주실 텐데요? 그리고 그 짐마차는 뭡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이건 네가 가져와 달라고 한 거잖아!”
“그럴 리가요? 서신에 적힌 대로라면 두 사람이 등에 짊어지고 와도 충분한 양인데요?”
카일이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비, 빌어먹을. 당했다.”
“네?”
“수량이 부족하다며 보일 대장이 우리까지 끌고 오크 랜드에서 직접 광석을 캐왔다.”
“설마 화이트 우드 숲까지 직접 가셨단 말입니까?”
“그래! 빌어먹을, 하마터면 웨어 울프에게 붙잡혀 죽을 뻔했다.”
“블랙을 만났나 보군요.”
“블랙?”
“네, 화이트 우드 숲을 영역으로 돌아다니는 웨어 울프의 우두머리입니다. 그 녀석, 머리가 좋아서 영역에 들어온 먹이는 절대 놓치는 법이 없는데, 용케 빠져나왔군요.”
“말도 마라! 어찌나 집요하게 쫓아오던지…. 으으,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다 흐른다.”
비터의 말에 카일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자주 보면 꽤 귀여운 녀석입니다.”
“두 번 귀여웠다간 팔다리 다 뜯기겠다.”
“그래도 심부름 값은 제대로 받으신 것 같은데요.”
“단번에 알아보는구나…!”
“아마도 아버지께서 두 분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신 것 같네요.”
“뭐… 그렇긴 하지.”
“마크도 얻은 게 있겠죠?”
카일의 물음에 마크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일 님과 대련한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카일이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냐?”
비터의 시선이 바닥에 엎드려 있는 소년에게 향했다.
“아! 그게….”
카일이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그때서야 상황을 이해한 비터가 짐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꼬마야! 너도 용병의 주머니를 노리면 어찌 되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사, 살려 주세요.”
“이건 용병의 법칙이다. 용병의 주머니를 노렸으면 그만한 대가를 내어놓아야 한다.”
스릉-
비터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카일! 어린아이라 망설인 것 같은데, 이런 일은 나이를 상관하지 않고 무관용으로 처벌하는 게 용병의 철칙이다.”
“그건….”
“이번 일은 내가 처리할 테니, 카일 넌 먼저 가라!”
비터가 나서며 검을 뽑아 에토에게 다가서자, 소년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뒀다간 정말 팔목이 잘릴 것 같아 카일이 황급히 비터의 팔을 잡았다.
“잠시만요! 이건 제가 해결하죠.”
“설마, 이대로 보내주겠다는 거냐?”
“아닙니다. 용병의 철칙이 있으니 손목 대신 대가를 받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만, 이 녀석 꼴을 봐선 동전 한 푼 가진 게 없을 거다. 뭘 받겠다는 거냐?”
“이 녀석요.”
카일이 에토를 가리켰다.
“무슨 뜻이냐?”
“손목 대신 이 녀석을 받겠다는 겁니다.”
“뭐?”
카일의 말에 비터는 물론 마크까지 황당한 얼굴로 카일을 바라봤다.
“너 취향이… 그쪽이구나!”
“역시! 아름다운 헬레나 영애를 돌처럼 바라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걱정 마라! 비밀은 지켜주겠다.”
비터가 카일의 어깨를 두드리며 속삭였지만 황당하게도 이미 주변 사람들이 카일을 요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아니! 아닙니다. 당분간 심부름 시킬 아이가 필요한 것뿐이라고요.”
“그래, 다들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
“걱정 마라! 난 네 말을 전적으로 믿으니!”
그러면서 짓는 저 요상한 눈빛, 오히려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카일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체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따라오너라!”
“아… 아니, 전… 그냥.”
소년이 주춤 뒤로 물러나며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젠장! 따라오지 않으면 당장 팔목을 잘라주마!”
카일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앞서 걸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빙글거리며 바라보던 비터가 소년의 어깨를 잡았다.
“앞으로 지켜볼 테니, 허튼짓하면 가만있지 않겠다. 난 아이라고 봐주는 용병이 아니거든.”
비터의 경고에 화들짝 놀란 에토가 황급히 카일의 뒤를 쫓았다.
“잠깐, 그럼 우린 어디로 가지?”
“어디긴, 이건 아무도 알아선 안되는 비밀 재료라고 했으니 당연히 카일을 따라가야지!”
“그럼 진작 말했어야지!”
비터가 마크의 뒤를 쫓아 황급히 짐마차로 뛰어오르자, 주변에 모였던 사람들도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 * *
“너, 이름이 뭐냐?”
앞서가던 카일이 갑자기 멈춰서더니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잠시 카일의 눈치를 살피던 소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에토!”
에토라 자신을 밝힌 소년이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좋아! 에토, 너도 용병의 골드를 훔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손을 쓴 걸 보니 이유가 있을 것 같구나. 말해 줄 수 있겠느냐?”
카일의 말에 에토는 살짝 고개를 들어 카일의 기색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 동생이 며칠째 굶고 있어서… 잘못했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동생?”
카일의 물음에 에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흠…. 가족은 동생뿐이냐?”
에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카일이 주머니에서 실버 3개를 꺼냈다.
“이건….”
“3실버다. 이 돈으로 일단 동생과 몸을 추스르고 난 다음, 짐을 챙겨 모레 아침 아일론 상회 본점 앞으로 오너라! 적어도 날 따라온다면 굶을 일은 없을 거다.”
카일은 에토의 손에 3실버를 쥐여주더니 비터와 마크가 탄 짐마차를 기다렸다.
“그러다….”
“응?”
“그러다 제가 나타나지 않으면… 3실버만 잃잖아요.”
“상관없다. 내 판단이 틀렸음을 알려 줬으니 3실버는 충분한 값이 되었다.”
카일은 달려오는 마차에 훌쩍 올라타더니 비터의 잔소리를 들으며 남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저 녀석, 올 것 같으냐?”
멀어져 가는 소년을 보며 마크가 카일을 향해 물었다.
“글쎄? 기다려 봐야 알겠지.”
“아마 저 녀석 안 올 거다. 3실버이면 30쿠퍼다. 동생이 있다고 해도 딱딱한 흑빵이면 보름 정도는 충분히 먹을 텐데, 올 것 같으냐?”
“안 와도 상관없습니다. 제 판단이 틀렸으니 앞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그뿐이죠.”
“그렇긴 하다만….”
순간적으로 변했다 사라지는 카일의 차가운 눈빛에 부르르 몸을 떤 비터가 카일의 시선을 피해 열심히 말을 몰았다.
“에토! 에토!”
상념에 빠져있던 에토의 귓가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