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37화 (337/404)

외전 - 71. 피라네시아 장원(2)

토성 안은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넓었다. 중앙에는 마차가 지날 수 있게 돌을 깔았고 도로 양옆으론 격자 형태로 구획을 나눠 집터를 조성했으며 집터 사이엔 작은 수로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철저한 계획하에 만든 작은 영주성 같군.”

토일의 말에 동의하듯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농토 주변에 마을을 조성하는 일반적인 장원 형태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여기저기 부서진 곳은 있지만, 기초가 튼튼하게 남아 있으니 마을을 복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거다.”

“집터의 흔적만 봐도 마을의 규모가 상당했을 것 같군요.”

“토성의 규모와 집터의 흔적을 보면 백여 가구, 대략 4~5백 명 정도 거주했을 거다. 병력도 대략 백여 명은 충분히 넘었을 거야. 장원의 규모가 적다고 할 수는 없지.”

“네우트 남작가의 규모가 알려진 것과는 상당히 달랐단 말이군요.”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반크에게로 향했다. 그는 분명 농노 20여 명에 병사 30명, 그리고 늙은 기사 한 명이 네우트 남작가의 전부라고 했다.

“하하! 저도 시중에 떠돌던 이야기를 전해 들은 거라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반트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긴 백여 년 전 일을 반트가 정확히 알 수도 없었고 지금 카일에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다만 네우트 남작가의 존재가 한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약간의 의구심이 들 뿐이었다. 코퍼의 예상대로라면 이곳엔 수백의 사람이 살았고 한순간 사라졌다. 한 번에 수백의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면 이유는….

“몰살?”

코퍼의 입에서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군가 네우트 남작가를 몰살시키고 흔적을 지웠다면? 권력을 가진 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구석진 장원의 존재를 말살하는 것쯤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건 아닐 겁니다.”

“응?”

코퍼가 카일을 돌아봤다.

“토성 안에 수백의 사람이 살았습니다. 이들을 몰살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글쎄… 휘하 기사들과 병사들까지 모두 전사했다. 남은 사람들이라고 해야 고작 농노 아니면 평민이다. 엑스퍼트급 실력자 십여 명이면 몰살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맞습니다. 죽이는 건 어렵지 않죠. 하지만 흔적은 남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거야 지우면….”

“수백의 사체를 치우고 흔적을 지우려면 최소 수십 명의 사람들이 추가로 필요합니다. 대장님은 그들의 입을 모두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더구나 당시 미망인이 된 남작 부인을 만나기 위해 귀족들이 수시로 백작가를 찾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눈까지 속이면서 비밀리에? 전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다. 아무리 비밀을 엄수한다고 해도 세월이 지나면 사람의 마음속 경계심은 옅어지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수십 명의 사람이 관여한 일이라면 지금쯤 여기저기 소문이 퍼졌을 것이다.

“그럼 넌 이들이 어디로 갔다고 생각하느냐?”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뭐?”

“솔직히 여길 비밀리에 떠났을 거란 생각은 합니다만… 어떻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찾지 못했거든요.”

“하긴, 이유를 쉽게 찾았다면 네우트 남작가에 대해서도 지금쯤 알려졌겠지.”

코퍼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사라진 네우트 남작가를 이야기하며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그들 앞에 오래된 낡은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가 남작가의 저택입니다.”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다르군요.”

남작가의 저택은 커다란 돌을 반듯하게 다듬어 쌓아 만든 3층 높이의 건물이었다. 저택의 양쪽으론 아직도 성벽이 튼튼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저택이라기보다는 성벽에 가깝군.”

“몬스터를 방비하기 위해 만든 실용적인 저택, 아니 성이라고 해야겠지요.”

토성 위에 돌을 쌓아 성벽을 만든 것도 특이했지만, 가장 안전한 곳에 있어야 할 저택 자체를 성벽으로 활용했다는 사실도 특이해 보였다.

“저만한 성벽을 쌓을 정도면 몬스터의 침공이 많았나 보군요.”

카일이 반트를 돌아보며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저도 얼마나 자주 몬스터들의 침공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워낙 오랫동안 방치된 것이라….”

반트가 당황한 얼굴로 답했다. 반트 역시 몇 년 전 사수였던 선배 중계인을 따라 잠시 왔던 기억만 있을 뿐 피라네시아 장원에 대해 아는 건 많지 않았다.

“아닙니다. 잊힌 곳이니 남은 자료가 없는 것도 당연하죠. 그보다 저택 내부를 확인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물론입니다. 원래가 남작가 소유의 저택이다 보니 백작가에서도 저택 내부엔 전혀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사용하시려면 수리를 따로 하셔야 할 겁니다.”

반트가 조심스럽게 말하며 저택의 정문으로 향했다. 수수한 저택의 외관과는 달리 입구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대문과 그 위에 장식된 화려한 조각이 푸른 빛으로 산화되어 묘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끼이익-

오래된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청동 대문이 서서히 열렸다. 내부는 대부분 하얀 천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두덮게 쌓인 먼지나 여기저기 널부러진 가구의 흔적, 낡고 삭은 마룻바닥, 부서진 계단 등 제법 오랜 시간 방치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수리하려면 꽤 시간이 필요하겠군.”

“백 년 가까이 비어있던 저택입니다. 이 정도면 아주 양호하다고 할 수 있죠. 일부 부서진 곳이나 낡은 곳이 보이긴 하지만 건물의 골격은 아직 튼튼합니다.”

토일의 말을 반박하려는 듯 반트가 열변을 토했다. 카일의 시선을 받은 코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백 년이 넘었다고는 하지만 어디 하나 균열 난 곳 없이 튼튼하게 지은 건물이다. 기초나 기단도 내려앉은 부분 하나 없으니 안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외장재나 바닥재를 제외한 구조 목들은 놀랍게도 아직 튼튼하게 버티고 있어. 수리하면서 일부 보강은 필요하겠지만 그리 큰 비용은 들지 않을 거다.”

코퍼의 말에 반트의 얼굴이 환해진 반면 토일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졌다. 카일은 내부를 대략적으로 둘러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나쁘진 않군요.”

“그럼… 계약하시겠습니까?”

“좋습니다. 이곳으로 하죠.”

“정말… 입니까!”

반트가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솔직히 반트도 카일이 피라네시아 장원을 매입할 거란 기대는 없었다. 피라네시아 장원은 겉으론 매력적인 장원이지만 사실 단점이 더 큰 곳이다. 황폐화된 평원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백작가의 영향력이 닿지 않기에 무거운 세금에서는 벗어날 수 있지만, 반대로 백작가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즉 몬스터의 공격뿐 아니라 외부의 공격도 스스로 방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카일, 다시 생각해 보거라! 앞서 말했듯 이곳은 농사는커녕 목초지로도 사용할 수 없는 황무지다. 오죽하면 백작가에서도 평원 전체를 3백 골드에 내어놓았겠느냐! 그들도 이 땅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알고 있습니다. 피라네시아 평원의 토질은 무거운 점토질에 규사토가 섞인 땅이었습니다. 거기다 수분까지 메말라 땅이 단단하게 굳어 있더군요. 풍부한 수원을 찾지 않으면 다시 농사를 짓긴 어려워 보였습니다.”

평원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흙의 색상과 질감뿐 아니라 맛까지 세심하게 살폈으니, 카일은 누구보다 평원의 토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걸 알면서도 이곳을 선택하겠다는 거냐?”

토일이 답답힌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카일은 그런 토일을 보며 오히려 빙그레 웃었다.

“전 농사를 지을 게 아닌데요?”

“그건….”

카일의 말에 토일의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카일은 넓은 농토를 찾는 게 아니라 공방을 지을 땅을 찾고 있었다. 설사 농사를 지을 수 없다 해도 카일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전 공방을 만들려는 거지 농사를 지으려는 게 아닙니다. 제가 필요한 건 풍부한 물과 충분한 땔감, 그리고 바로 이 흙입니다.”

카일이 바닥에서 흙 한 움큼을 쥐어 올렸다.

“농사를 짓기엔 무거운 점토질 흙이지만 도자기를 만드는 데는 반드시 필요한 재료죠.”

카일의 말에 토일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도자기를 굽는데 필요한 특별한 재료란 게 이 점토질 흙이란 말이냐?”

“하하! 그럴 리가요. 고작 점토질 흙을 공수하기 위해 마크와 비터를 샤론 마을에 보내진 않았겠죠. 점토질 흙은 그저 부수적인 일부일 뿐입니다. 여기에 다양한 공정과 작업이 더해져야 하죠.”

카일의 말에 토일이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도자기 제조에 필요한 재료 중 하나를 알았으니 아예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정이 급하니 반트 님께서는 최대한 빠르게 백작가와 협상을 끝내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마도 아일론 상회에서 도움을 주실 테니, 협상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반트가 빙글거리며 토일을 바라보자 자연스럽게 카일의 시선도 토일에게 향했다.

“끙… 걱정 마라! 아일론 상회도 적극적으로 도울 테니.”

당장 급한 쪽은 아일론 상회다. 이미 피라네시아 장원이 결정된 이상 카일을 설득하기보단 장원 매입에 도움을 주는 게 더 효율적일 수밖에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토일 님.”

“상단을 위한 일이다. 감사할 것까진 없다.”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의 토일이지만 그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사실 카일이 피라네시아 장원 매입을 결정한 결정적인 이유가 꼭 평원에서 발견한 점토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장원 안에서 발견된 백토의 흔적 때문이다. 아마도 기존 언덕을 깎아 토성을 축조하면서 땅속에 묻혀있던 백토가 겉으로 드러난 것 같았지만, 확실한 건 직접 땅을 파서 확인을 해야만 했다.

“그럼 이만 돌아가자! 더 늦었다간 백작 성에 도착도 하기 전 해가 저물고 말 거다.”

토일이 성큼성큼 앞서 나가자 일행들이 재빨리 뒤를 쫓았다.

“토일 님께서 화가 많이 나신 것 같군요.”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지금은 저렇게 보여도 뒤끝은 없다. 내일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반겨 주실 거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카일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앞서가는 토일을 바라보았다.

* * *

똑똑-

“재정관님! 행정관 버니입니다.”

“들어오너라!”

마법 등불 아래 두터운 서류를 확인하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제정관 캐프 남작이 고개도 들지 않고 물었다.

“무슨 일이냐?”

“조금 전 중계인 반트가 다녀갔습니다.”

“흠… 반트라면 토지 사용권 거래 허가 요청일 텐데, 문제가 있는 것이냐? 적당히 수수료만 받고 허락해주면 될 텐데?”

“아닙니다. 그것이… 이번엔 토지 사용권 거래 허가 요청이 아니라 사용권 매입에 대한 협상 요청입니다.”

“토지 사용권 매입? 최근 직영지 사용권에 대한 판매 결정은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맞습니다. 직영지에 한 해선 없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설마… 피라네시아 장원을 말하는 것이냐?”

“네! 맞습니다.”

버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서류를 캐프 남작에게 내밀었다.

“또 어느 멍청한 놈이 장난을 치는 것 아니냐?”

“그건 아닙니다. 서류를 제출하며 선금으로 금화 50골드를 지불했습니다.”

“뭐?”

서류를 대충 훑어보던 캐프 남작이 눈을 크게 뜨곤 다시 서류를 천천히 읽었다. 50골드를 선금으로 지불할 정도면 확실한 매입 의사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빠듯한 재정으로 백작가를 운영하고 있는 캐프 남작으로선 크나큰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뜻하지 않은 공돈이 생긴 듯 남작의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어렸다.

“금액은 알고 있겠지?”

“예! 예전에 말씀하신 데로 350골드를 불렀습니다만 협상이 이어지면 290골드까지 낮춰줄 생각입니다. 어차피 각종 서류 작업 명목으로 10골드를 더 청구할 테니 300골드에 맞출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적당히 구슬려. 이번엔 확실하게 팔아치워야지, 괜히 지난번처럼 자존심 세우다가 기회를 날려 버리면 안돼. 알겠지!”

“그래서 말씀인데, 재정관님께서 레하트 기사단장님을 한번 만나보시는 것이… 지난번처럼 피라네시아 평원에서 기동훈련이라도 가지면….”

“빌어먹을 녀석… 일생에 도움을 주지 않는군. 어쩔 수 없지. 이번만은 내가 져줄 수밖에. 최근 기사단이 요청한 물품 표 가져와! 녀석과 적당히 협상하는 수밖에!”

“잘 생각하셨습니다. 바로 찾아오겠습니다.”

행정관 버니가 환하게 웃으며 황급히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캐프 남작이 단호한 눈빛으로 들고 있던 서류를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번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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