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70. 피라네시아 장원(1)
“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반트를 따라 남문을 벗어나 한 시진쯤 달리자, 눈앞에 끝도 없이 펼쳐진 넓은 평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라네시아 평원, 달리 피라네시아 분지라고 합니다. 대략 5천 에이커가 넘는 땅입니다.”
“…5천 에이커!”
정말 엄청난 넓이의 땅이었다.
“하하! 놀랄 것 없습니다. 카일 님께서 계약만 하시면 이 땅의 주인이 되실 수 있습니다.”
반트가 카일의 옆으로 바짝 다가서며 환하게 웃었다.
“주인이라니요?”
영지의 주인은 영주다. 당연히 영지에 속한 모든 땅도 영주의 것이다. 단지 땅을 관리하고 사용하는 권한과 건물만을 개인이 거래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토지주인인 영주가 정당한 절차와 형식으로 사용권을 취득한 자에게서 강제로 땅을 빼앗거나 압박할 수는 없었다. 관습법상 토지 소유주보다 토지 사용권자에게 우선권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같은 관습법이 생긴 주된 이유는 영지를 갖지 못한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들 때문이다. 이들 대부분이 토지의 사용권을 이용해 농토를 조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장원을 만들었다.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로서는 피땀 흘려 조성한 농토를 영토의 주인이란 이유로 영주에게 무작정 빼앗길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사용권을 가진 귀족들과 상인들이 강하게 권리를 주장했고, 왕실 역시 각 지역 영주의 세력 약화를 위해 그들을 지지하면서 굳어진 법이었다.
“그건 이 땅엔 주인이 없기 때문이다.”
“주인이 없다니요? 여긴 크로먼 영지가 아닙니까?”
“글쎄? 여기가 크로먼 백작령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무슨 말씀인지?”
“이곳은 원래 네우트 남작가의 땅이거든.”
네우트 남작은 크로먼 백작 가문을 위해 헌신한 기사로서 백 년 전 발생한 제국과의 전쟁에서 당대 크로먼 백작의 목숨을 구하고 산화한 자였다. 당시 크로먼 백작은 네우트 남작에 대한 고마움으로 이곳 피라네시아 평원을 네우트 남작의 부인과 하나뿐인 아들에게 증여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당시 백작은 네우트가를 남작가로 만들어 백작령에서 독립시키려 했지만, 남작 부인이 거절했다고 하더군요.”
“영지를 가진 세습 영주가 되길 포기했단 말인가요?”
영지를 가진 세습 영주는 귀족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자리다. 그런 자리를 마다하나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당시 동부는 오랜 전쟁과 기근으로 귀족들까지 굶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크로먼 백작가 역시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백작가의 직영지인 피라네시아 평원에서 생산된 곡식이 있어 백작가는 안정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곳을 남작가로 독립시키려 하니 백작령의 영민을 걱정한 남작 부인이 거절한 것이지.”
“백작도 대단하군요, 백작가의 생명줄 같은 피라네시아 평원을 네우트 남작에게 주려 했다니.”
“그만큼 죽은 네우트 남작에 대한 고마움이 컸단 말이겠지.”
“반대가 심했을 텐데요?”
“아니, 반대는 의외로 적었다. 대부분의 기사들이 찬성했고 행정 출신의 가신들 몇 명이 반대한 정도다. 영주의 뜻이 확고하니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남작 부인이 반대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남작 부인이 사실을 알고 급히 달려와 백작에게 거절의 뜻을 밝혔지만, 이미 토지의 소유권을 네우트 가로 넘긴다는 공문을 왕실에 발송한 후였지. 그래서 남작 부인은 차선을 택했다.”
“차선책이라면…?”
“소유권 대신 토지에 대한 사용권을 크로먼 백작가에 넘긴 겁니다.”
지금껏 눈치를 살피며 끼어들 시점을 노리던 반크가 황급히 말했다.
“아!”
“당시 네우트 남작가의 사용인은 20명도 안 되는 농노에 남작가를 모시는 늙은 기사 하나, 병사 30명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네우트 남작을 따랐던 기사와 병사는 모두 전멸했죠. 당시 동부에는 패잔병이나 탈영병들이 주축을 이룬 마적 때가 극성을 부렸습니다. 네우트 남작가로선 평원관리는 고사하고 백작가에서 독립하는 순간 당장 목숨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죠.”
“그럼 그 사실을 알고도 백작이 평원을 넘기려 했단 말입니까?”
겉보기엔 은혜를 갚기 위해 백작령의 생명줄인 평원까지 넘겨줄 정도로 배포가 큰 영주로 보였지만, 실상은 마적 때에게 네우트 남작가를 통째로 넘겨주는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남작 부인이 직접 백작을 찾아가 피라네시아 평원을 거절한 이유도 이제야 납득이 갔다.
“평원이 안정되고 마적 때가 소탕될 때까지 백작성에 머물 것을 백작이 제안했지만….”
“남작 부인이 거절했군요.”
반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문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도 했죠. 네우트 남작의 죽음에 어떤 음모가 있는 건 아닌지…. 당시 네우트 남작 부인은 동부, 아니, 왕국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했거든요. 그녀가 미망인이 되었단 소문에 장원을 찾는 귀족들이 줄을 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럼 네우트 남작가는 어떻게 된 겁니까? 이곳이 매물로 나왔다는 건….”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소문엔 백작의 위협을 피해 도주했다는 말도 있고, 마적들의 습격으로 납치되었단 소문도 있었지만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럼 평원의 주인은….”
“당시 남작의 인장까지 함께 사라졌습니다. 이 땅의 주인은 네우트 남작가입니다. 여전히 크로먼 백작가는 사용권만 가지고 있죠.”
“보통 영주가 사라진 영토는 왕실이 다시 환수하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론 그렇습니다만 피라네시아 평원은 다르죠. 처음부터 백작의 영지였던 곳입니다. 왕실이 함부로 환수하거나 영주를 파견할 땅이 아니죠. 더구나 피라네시아 평원은 영지가 아닌 백작가에 소속된 장원으로 남은 것도 왕실에서 평원을 환수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럼 피라네시아 장원이 매물로 나왔다는 건…?”
“크로먼 백작가가 가지고 있던 사용권이 나온 겁니다. 5천 에이커에 달하는 피라네시아 평원이 단돈 3백 골드입니다. 이후엔 세금 한 푼 낼 필요가 없는 땅이죠.”
피라네시아 평원의 주인은 네우트 남작가다. 사라진 네우트 남작가의 인장을 가진 후손이 찾아오지 않는 이상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평원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땅만 넓으면 뭐 하나! 쓸모없는 황무진데.”
“쓸모없는 황무지라니요?”
카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토일을 향했다.
“네우트 남작가가 사라지고 얼마 후 평원에서 물이 완전히 사라졌다.”
“물이 사라지다니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 물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우물은 말랐고 평원을 가로지르던 하천은 사라졌다. 동부 최대의 옥토가 순식간에 황무지로 변해 버렸다. 그래서 수십 년동안 버려진 땅으로 남아있지. 네우트 가의 저주라면 동부에선 어린아이들까지 알고 있을 거다.”
“아무리 그래도 이 넓은 평원을 그냥 놀리고 있다니 아깝군요.”
“크로먼 백작가라고 그냥 지켜만 봤겠느냐? 지난 수십 년 동안 안 해 본 노력이 없었다. 새로 판 우물만 수백 개였다. 오죽하면 백작 성에서 평원까지 물길을 새롭게 내려고까지 했지만 실패했다. 나중엔 목초지로라도 이용해 보려 했지만, 가축도 물이 있어야 살 수 있으니 결국 포기했다.”
“그럼, 평원에서 물을 구할 방법이 없단 말이군요.”
“꼭 그렇지만은 않다. 피라네시아 장원은 에바크 산맥 지류에서 흘러나온 작은 하천 덕분에 물 걱정은 없지. 그렇다고 농사를 짓기에 풍족하진 않다. 고작해야 작은 장원을 유지하는 정도?”
“그럼 300골드란 비용은 어떻게 책정된 겁니까?”
“처음엔 2천 골드가 넘었다. 수천 에이커에 달하는 평원, 잘만 가꾸면 남작령 정도로 독립된 장원을 만들 수 있으니 많은 귀족들이 찾아와 평원을 둘러봤다. 하지만 메마른 대지를 확인하곤 곧장 돌아가 버렸지. 300골드란 비용은 장원과 더불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토에 대한 가격인데, 몇 년 전 용병대가 백작가와 협상을 벌이던 중 백작가가 결정한 최소한의 금액이다. 물론 그들도 결국 포기하고 말았지만.”
“그렇군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토일이 낮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자기와 옹기를 독점적으로 공급받기 위해서는 카일의 도자기 공방은 반드시 아일론 상회의 영향력 아래에 있어야 한다. 토일과 마티슨이 어제저녁 늦은 시간까지 토론해 내린 결론이다. 그리고 그 방안 중 하나가 바로 아일론 상회 주도로 공방을 건설하는 것과 더불어 백작가의 행정력을 이용한 통제다. 상단과 연결된 백작가의 수뇌부를 이용해 공방에 적당한 압력을 가하고 동시에 해결해 주면서 자연스럽게 아일론 상회에 의지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너도 이야기를 들었으니 알겠지만, 피라네시아 장원은 이미 폐허가 됐고, 평원은 농토로서 가치가 없는 황무지다. 300골드나 투자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토일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카일의 생각은 달랐다. 카일이 찾는 곳은 넓은 농토가 아니라 도자기와 옹기를 안정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재료 수급이 원활하고 외부의 공격에도 안정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 면에서 에바크 산백의 지류와 연결된 피라네시아 장원이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다 왔습니다.”
그때, 앞서가던 반트가 멈춰서더니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저기가 바로 피라네시아 장원입니다.”
반트가 가리킨 곳에는 아름드리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구릉이 자리하고 있었다.
“토성?”
“맞습니다. 기존 언덕을 다져 만든 토성입니다. 크로먼 백작령, 아니, 왕국에서도 보기 드문 가장 독특한 성중 하나죠.”
“왕국에는 이런 토성이 없나요?”
“대부분이 석성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오래전에는 토성이 몇 곳 있었다고 하는데,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적어도 동부 영지엔 없다는 거죠. 그건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반트가 웃으며 토성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전체적인 형상은 사각형으로, 성벽 높이는 5m 남짓 되는 적지 않은 규모의 토성이었다. 특이하게도 성문 앞쪽에 반쯤 무너진 석축이 있었다.
“방어에 상당히 신경 썼군.”
지금껏 말없이 일행의 뒤를 따르던 코퍼가 흥미로운 듯 말에서 내려 직접 무너진 성벽을 살폈다.
“성벽에 관심이 많으신가 보군요.”
카일이 코퍼에게 다가와 물었다.
“내 아비는 성벽을 보수하는 석공이었다. 나도 어린 시절엔 아비를 따라 성벽을 돌아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가끔 특이한 성이나 오래된 고성을 볼 때면 이렇게 직접 말에서 내려 확인하기도 하지.”
“그럼 여기 토성에 대해 말해 주실 수 있으세요?”
“내가 말이냐?”
코퍼자 잠시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부탁드려요.”
“흠…. 내가 아는 건 많지 않다.”
“아시는 것만 말씀해 주시면 돼요.”
“그렇다면… 좋다. 어려운 일도 아니니.”
코퍼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코퍼가 이곳 피라네시아 장원에 대해 먼저 언급한 것도 이번 기회에 토성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나름의 욕심 때문이었다.
“그럼 먼저 여기 무너진 성벽부터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건 성문이 정면에서 직접 공격당하지 않게 쌓은 일종의 옹성인데, 특이하게도 토성을 쌓고 한참 뒤에 따로 쌓은 거다. 위쪽 일부가 무너지긴 했지만, 성벽의 경사진 기울기나 바위를 깎은 각도, 돌을 쌓은 기법이 아주 정교하고 독특하다. 아마도 마법이나 투석기 공격까지 염두하고 쌓은 것 같은데… 모르긴 해도 대단한 석공이 쌓았을 거다.”
“그 정도인가요?”
“성벽뿐 아니다. 진입로 또한 좁고, 경사진 회랑을 연속해서 꺾어 항시 삼면에서 공격을 할 수 있게 만든 구조다. 석궁이나 활을 든 궁수가 성벽 위에서 공격한다고 생각해 보거라, 휴~ 엄청난 희생이 뒤따를 거다. 이건 마치 장원을….”
“요새화시켰단 말이군요.”
“그래, 맞다. 완전 요새화를 시켰다. 몬스터를 대비한 거라면 에바크 산맥의 지류 쪽인 장원의 뒤쪽에 방어를 집중해야 하는데….”
“이건 몬스터가 아닌 외부의 공격에 대비했단 말이군요.”
“뭐,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코퍼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네우트 남작가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더 큰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