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35화 (335/404)

외전 - 69. 크로먼 백작령(3)

늦은 밤, 로브를 깊게 눌러쓴 사내가 환하게 불이 밝혀진 아일론 상회의 본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확인은?”

“아일론 상회의 본단에서 헬레나 영애를 확인했습니다. 아무래도 당분간 그곳에서 머물 것 같습니다.”

“흠….”

사내가 침음을 삼켰다. 아일론 상단의 본단은 근처에서 가장 큰 석조건물이었다. 더구나 커다란 돌을 쌓아 만든 창고가 사방을 감싸는 중정형 폐쇄식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오직 입구만 열려 있었기에 내부의 정확한 사정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아이들은 모두 준비되어 있습니다. 명만 내려주시면 곧장 진입하겠습니다.”

“내부의 상황이 어떤지 모른다. 섣불리 공격했다간 오히려 당할 수 있다.”

“녀석들은 오늘 복귀했습니다. 분명 무사히 본단에 도착했단 생각에 경계심이 옅어졌을 겁니다. 지금이 오히려 공격의 적기일지 모릅니다.”

맞는 말이다. 하급 용병들 대부분이 의뢰를 종료하고 돌아갔고, 상단을 지키는 호위 용병들이라고 해야 고작 십여 명이 교대로 정문만을 지키고 있을 정도로 허술했다. 하지만 사내는 쉽게 공격을 명할 수 없었다.

“과연 녀석들의 경계심이 옅어졌을까?”

“네?”

“하급 용병들이 모두 돌아갔어도 아직 코퍼 용병대는 여전히 본단에 남아있다. 상단 일꾼들 역시 내부에 남아있다. 오히려 상단 일꾼의 숫자는 상행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많지. 과연 우리만으로 저길 뚫고 들어갈 수 있을까?”

“렇다면 화공을 쓰면….”

폐쇄적인 구조이니 불을 지른 뒤 정문을 통해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저격한다면 단시간에 몰살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크로먼 백작가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져 있다. 왜인지 아느냐?”

“그야 높고 단단한 성벽과 깊은 해자….”

“화공이 통하지 않는 성이기 때문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알겠지만, 내외성에 지어진 대부분의 가옥들이 튼튼한 석조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아무리 불화살을 날려도 소용없다.”

“죄, 죄송합니다.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그 녀석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 녀석이 만약 본단에 있다면 섣불리 공격했다간 오히려 지형에서 불리한 우리가 당한다. 일단 헬레나 영애가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려 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 * *

토일과 코퍼가 찾아온 건 이른 아침이었다. 고투가 만든 버섯스튜와 부드러운 하얀 밀빵, 베이컨, 삶은 계란과 야생 벌꿀로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한 후였다.

“이거 한발 늦었군.”

토일이 투덜거리며 가죽 의자에 털썩 주저앉더니 품 안에서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대수롭지 않게 주머니를 열어본 카일이 깜짝 놀란 얼굴로 토일을 바라보았다.

“하하! 너도 놀랄 때가 있구나!”

토일이 통쾌하게 웃었다.

“이건… 너무 많습니다.”

“헬레나 영애가 직접 내린 정당한 포상이다. 부담가질 필요 없다. 너뿐 아니라 하급 용병에서부터 상단 일꾼까지 적게는 1골드에서부터 많게는 수십 골드를 받았다. 넌 특별히 영애를 직접 구했으니 포상이 많은 것뿐이다.”

“하지만….”

카일이 부담스러운 얼굴로 금화가 가득 든 주머니를 내려보자 코퍼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리 말해두겠지만, 거절은 귀족에게 모욕이다.”

“네?”

“선의로 내린 포상을 거절한다는 건 귀족의 호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는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물론 너뿐 아니라 함께 포상을 받은 상단 일꾼과 용병들까지 말이다.”

“거절도 마음대로 못한단 말입니까?”

“그리미엄 자작가는 명문 중에서도 명문이다. 그런 곳의 영애가 일개 용병에게 내린 은전이 거부되어 돌아왔다. 이걸 귀족들은 어떻게 볼 것 같으냐?”

“그야….”

“사교계는 소문이 빠르다. 아마도 그리미엄 자작가의 포상이 야박해 일개 용병에게까지 무시를 당했다며 소문이 퍼질 거다. 아니, 더 흉측한 악담이 퍼질 거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말이냐? 영애가 포상을 내렸다는 것? 아니면 네가 포상을 돌려줘 영애의 명예, 나아가 그리미엄 자작가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

“그야 당연히….”

카일이 적극 반박하려 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일단 그런 소문이 돌게 된 자체로 이미 자작가와 영애의 명예는 바닥에 떨어지게 된다. 진실이든 아니든 자작가로선 대응할 수밖에는 없었다.

“귀족은 명예를 먹고 산다고들 하지, 아무리 사소한 것도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라면 가만있지 않는다. 그러니 그냥 받아들여라! 그리고 분명히 말하지만, 귀족 영애의 생명을 구했으니 그 정도 대가는 당연한 거다.”

코퍼의 말에 카일이 낮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골드를 받은 이상 더 이상 거부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토일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그만 가볼까? 어제 사람을 시켜 인근에 나온 땅을 알아봤다. 몇 군데 확인해 보자.”

“알겠습니다.”

토일과 코퍼를 따라 골목을 빠져나와 향한 곳은 영지 중심에 설치된 제법 넓은 광장 앞 분수대였다.

“토일 님!”

왜소한 체구에 수정을 정교하게 깎아 만든 안경을 쓴 사내가 토일을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오! 반트, 오랜만이군. 잘 있었나?”

“저야 토일 님 덕분에 아주 잘지냈습니다요.”

“그래.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어찌 되었나?”

“누구 말씀이라고 소홀히 했겠습니까? 적당한 곳을 찾아놓았습니다.”

“역시 행동 하나는 빠르군, 참! 여긴 카일이라네, 이 녀석이 쓸 땅이지.”

토일의 말에 반트라 불린 사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일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그 넓은 땅을… 이분이 혼자 쓰시는 겁니까?”

“하하! 그렇네. 카일, 인사하게. 반트라고, 중계업을 하는 친구지, 땅이 결정되면 나머지 행정적인 작업을 대행해 줄 거야.”

“카일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이쿠,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반트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시간이 촉박하니 먼저 땅부터 볼까?”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앞장선 반크가 향한 곳은 내성과 외성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넓은 호수 외곽에 자리를 잡은 토지였다.

“물이 풍부해야 한다고 하셨더군요, 보시다시피 호수와 인접한 곳이라 물이 풍부하고 토질도 비옥합니다. 원래 낡은 건물이 하나 있었지만, 오래전 무너져 버리고 이렇게 터만 남았지요.”

“흠, 전망도 좋고 내성과도 가깝고. 큰길도 얼마 떨어지지 않았으니 입지로선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카일, 어떠냐?”

토일의 물음에 카일이 세심하게 주변을 살폈다. 직접 흙을 만지고 맛까지 확인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물은 풍부하지만 제가 찾는 흙은 아닙니다. 더구나 사방이 뚫려있습니다. 보안에 문제가 생길 겁니다.”

“흠…. 담을 높게 쌓거나 창고를 지어놓으면… 아니지, 우리에겐 시간이 없군.”

“그리고 또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카일이 손을 들어 호수를 가리켰다. 크고 작은 배들이 여유롭게 떠다니고 있었다.

“귀족들이 자주 찾는 곳입니다.”

“분란이 생길 수 있겠군.”

“네.”

토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반트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걱정 마십시오. 다른 곳도 있습니다.”

반트가 씩씩하게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향한 곳은 외성 북쪽 산 아래에 위치한 부채꼴 형상의 토지였다. 토지 옆으로 작은 하천까지 있어 충분한 물을 공급받을 수 있었고, 높은 산 덕분에 나무와 부엽토를 구할 수 있었다. 입구 쪽만 막으면 방어에도 용이한 곳이었다.

“이곳은… 아무래도 안 되겠군.”

“네?”

“진입로가 좁고 험해 방어엔 유리하지만, 물건을 운송하기엔 너무 힘들어.”

토일의 지적에 카일도 고개를 끄덕였다. 도자기와 옹기가 운송과정에서 파손될 우려도 있었고. 좁고 험한 진입로는 건물을 짓기 위한 자재 운송에도 장애물이 될 것이었다.

“여기도 아니라면….”

반트가 난처한 얼굴로 가져온 서류를 들춰보기 시작했다.

“왜 그런 건가? 마땅한 땅이 없는 건가?”

“그것이… 외성에 있는 땅들은 모두 비슷하거나 호숫가 땅보다 못한 곳이라….”

“꼭 성안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적당한 곳이 없겠습니까?”

카일의 물음에 토일이 얼굴을 찌푸렸다.

“외성이 아니면 공격을 받아도 쉽게 도와줄 수가 없다. 괜찮겠느냐?”

“문제없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촉박하니, 주변에서 쉽게 재료를 구할 수 있는 곳이 먼저입니다.”

“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토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금 전까지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쓰다듬던 코퍼가 입을 열었다.

“외곽이라면 마침 생각나는 곳이 하나 있다.”

“흠? 자네가 아는 곳이 있었나?”

“토일 님도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피라네시아 장원 말입니다.”

“피라네시아 장원? 남쪽 평원에 있는 장원 말인가?”

“정확히는 남쪽 평원이 아니라 동쪽 에바크 산맥에 치우쳐 있습니다. 그러니 평원과는 달리 수량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고, 오래되긴 했지만 방벽도 남아있으니 방어도 용이할 겁니다. 아시겠지만 몇 년 전 용병대 하나가 그곳에 자리를 잡으려 했다가 무산된 적이 있습니다.”

코퍼의 말에 반크가 기억이 났는지 손벽을 짝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기억났습니다. 피라네시아 장원, 석조로 만든 튼튼한 건물이 남아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래되긴 했지만, 내부만 손보면 쓰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다만… 가격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주변에 딸린 농토까지 함께 매입해야 해서… 가격이 떨어지긴 했지만 못해도 삼사백 골드는 들어야 할 겁니다.”

반크가 토일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원래라면 2천 골드는 넘게 받아야 하는 장원이지만 워낙 오래 방치되어 있었고 농토들도 대부분이 황무지로 변해버린 상황이라 가격이 그 만큼 떨어진 것이다. 그래도 아일론 상단에서 매입하기엔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상단이 계획한 금액은 대략 2백 골드, 최대 3백 골드 미만이다. 아무리 아일론 상회라고 해도 그 이상을 투자하긴 힘들었다.

“흠…. 괜찮은 것 같군요. 한 번 볼 수 있겠습니까?”

카일이 웃으며 반트에게 말했다.

“카일, 솔직히 말하겠다.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은 최대 3백 골드, 그 이상은 상단이 지원하기 힘들다.”

“아닙니다. 제가 사용할 공방이니 제가 사는 게 맞겠죠. 마침 공돈도 생겼고요.”

카일의 말에 반크가 놀란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무려 삼백 골드에서 최대 사백 골드, 일반 평민이면 평생을 만져 보지 못할 거금이다. 중소 상단인 아일론 상회마저 고개를 저을 정도의 금액을 이제 앳된 소년이 아무렇지 않게 내어놓겠다는 말을 내뱉었는데도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단지 당황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이 덩치 큰 소년에게 그만한 골드가 실제로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진정한 물주다.’

토일의 옆에 바짝 붙어있던 반트의 몸이 자연스럽게 카일의 옆으로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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