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33화 (333/404)

외전 - 67. 크로먼 백작령(1)

“마침 영주성에 볼일이 있어 나오던 중 영주님의 전령을 만났습니다.”

정확히는 카일의 부탁을 받고 길목을 장악한 몬스터를 처리하기 위해 달려오던 중 영주의 전령을 만난 것이었다.

“운이… 좋았군.”

캘토가 쓰러진 트롤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많이 지친 것 같은데, 그만 쉬시지요.”

“그래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마침 제자 녀석 하나를 데려왔으니 충분합니다.”

“제자?”

캘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금 전 보일이 나왔던 곳으로 필론이 나타났다.

“마스터, 갑자기 그렇게 달려가시면… 헉!”

필론이 깜짝 놀라 주춤 물러났다. 바닥엔 커다란 트롤이 쓰러져 있고, 사방은 기사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무엇보다 멀찍이 떨어져 보일을 경계하듯 바라보는 거대한 트롤도 두 마리나 남아있었다.

“뭘 멍청이 서 있는 거냐! 어서 오지 않고.”

“아! 네, 마스터!”

필론이 고개를 잔뜩 숙인 채 보일에게 다가왔다.

“인사드리거라! 기사단장님이시다.”

“피, 필론입니다.”

“그래, 오랜만에 보는군. 그동안 잘 있었나?”

“아, 네.”

필론이 당황한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필론이 캘토를 만난 건 몇 년 전 보일의 제자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였다. 그때의 일로 형제 같던 동료들이 카일에게 손목까지 잘렸으니, 필론으로선 캘토와의 만남이 불편할 수밖에는 없었다.

“우선 트롤부터 먼저 잡아야겠군. 필론, 어떠냐? 상대할 수 있겠느냐?”

“지난번 카일이 트롤을 상대하는 걸 보긴 했지만, 아직은 혼자서 사냥할 자신은 없습니다. 그래도 놈을 붙잡고 시간 정도는 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보일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한번 상대해 보거라, 위험하면 막아주마!”

“감사합니다. 마스터!”

필론이 고개를 숙였다.

“자네…. 필론 혼자 트롤을 상대하게 할 생각인가?”

“아직 필론의 실력으론 사냥까진 무리입니다. 그래도 시간 정도는 끌 수 있겠죠.”

보일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트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 뒤를 검을 뽑아 든 필론이 말없이 뒤따랐다.

“일튼!”

“예!”

멍하니 황당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일튼이 깜짝 놀라 황급히 캘토에게 달려왔다.

“지금 즉시 기사단을 정렬시키게.”

“하지만 트롤이….”

“보일 대장이 나섰으니 걱정할 것 없다.”

“아, 알겠습니다.”

일튼이 빠르게 기사들을 정렬시켰다. 그 사이 보일과 필론이 본격적으로 트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모두 이번 전투를 똑똑히 머리에 새겨라! 다시 볼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 될 테니!”

“단장… 님!”

일튼의 얼굴에 어린 의문에 캘토가 고개를 저었다.

“저들의 전투를 본다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명확히 알게 될 거야.”

캘토의 말에 일튼과 기사들이 알 수 없는 얼굴로 보일과 필론의 전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 * *

퍽-

퍼벅-

마차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던 오크 한 마리가 여기저기서 날아든 석궁을 연달아 맞고 바닥에 처박혔다.

“정말 끝도 없이 달려드는군.”

토일이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닦았다.

“지쳐 보이시는데… 괜찮으십니까?”

마차 옆으로 다가온 카일의 물음에 토일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그보다 공격은 언제쯤 멈출 것 같나?”

“공격 빈도가 처음보다 많이 줄었고 규모도 작아졌습니다. 대규모 습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거 참, 듣던 중 반가운 말이군. 그나저나 자네도 이젠 좀 쉬어야 하지 않겠나?”

토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미 상당수 용병이 죽었고 비터와 마크까지 빠진 이상 남은 용병만으로 상단 전체를 보호할 수는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멈추지 않고 돌파해 빠져나가는 것뿐이었다. 마차가 멈추는 순간 사방에서 달려드는 몬스터로 상단은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카일도 그 사실을 알기에 선두에서 적극적으로 몬스터를 베어 넘기며 길을 열었다. 덕분에 전신은 물론 타고 있는 말, 리플까지 몬스터의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카일이 담담하게 답했다. 실제로도 코퍼는 물론 기사 도테트까지 자존심을 버리고 후방으로 물러날 정도로 지쳤지만, 가장 위험하고 힘든 선두에 버티고 선 카일의 얼굴엔 어디에도 피곤한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허허, 정말 대단한 체력이군.”

토일이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아킨스 영지엔 가지 않아도 될까요? 지금이라도 용병을 조금 더 보충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아니, 오히려 시간만 지체할 뿐이야! 그리고 녀석들도 자네처럼 우리가 아킨스 영지에서 쉴 거라 생각하겠지. 그 틈을 파고든다면 녀석들과 조금 더 거리를 벌릴 수 있을 거야!”

“그렇다고 해도 놈들을 완전히 따돌리기는 어려울 겁니다.”

“상관없네, 일단 자작령만 지나면 백작령까지는 넓은 평원이 계속 이어진다네.”

“그 말씀은….”

“평원이라면 우리가 가진 석궁도 녀석들에겐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 될 거야.”

토일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아일론 상단은 말이 쉴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만을 제외하곤 계속해서 달렸다. 아킨스 자작성에서도 석궁에 사용할 볼트, 식수와 말을 챙기곤 동문으로 빠져나와 쉬지 않고 달렸다. 다행히 토일의 생각이 적중했는지, 아니면 추적이 멈췄는지, 별다른 일 없이 10일 거리를 단 7일 만에 주파하는 기염을 토하며 백작성에 입성했다.

“드디어 도착했다.”

거대한 성문을 통과해 백작성 안으로 들어선 용병들과 상단 일꾼들이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기쁨을 만끽했다.

“카일! 크로먼 백작령에 온 걸 환영한다.”

토일이 환하게 웃으며 카일을 향해 말했다.

크로먼 백작가는 아틸런 자작가와 폰드리 자작가와 더불어 동부를 삼분하는 가장 힘 있고 명망 있는 가문 중 하나다. 이들 세 가문은 오래전부터 혼인 동맹을 통한 단단한 혈맹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들은 전략적으로 중부의 트란발트 공작가와 우호적인 세력을 형성하며 귀족 연합의 중요한 구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이 동부의 맹주라 할 수 있는 크로먼 백작가군요.”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말 거라! 다른 두 영지에서 그런 말을 꺼냈다간 큰 곤욕을 치를 수 있으니 말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동부의 세 가문이 비록 혈맹으로 단단하게 묶여 있는 듯 보여도 그게 전부는 아니거든.”

토일이 작은 목소리로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그렇군요.”

“일단 본단으로 가자, 머물만한 곳을 마련해 주마!”

“아일론 상회의 본단은 아틸런 자작가에 있는 게 아닙니까?”

“너 설마 마티슨 님의 본가를 알고 있는 거냐?”

“아틸런 자작가 아닙니까? 지난번 방문 때 아버님과 하시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혹 비밀입니까?”

“뭐, 딱히 비밀은 아니다 만… 그다지 좋은 것도 아니지.”

“가문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겁니까?”

“좋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본가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어 매해 막대한 골드를 본가로 보내고 있다 작위를 유지하는 데도 본가의 힘이 필요하니 어쩔 수 없지.”

“그렇군요.”

“사실 가죽 납품에서도 손해를 보고 있다. 이번만 해도 자작가에 납품할 물량과 일정을 맞추기 위해 무리한 것도 있고, 아무튼 가문이 아니라 웬수지.”

토일이 목소리를 잔뜩 낮춰 말했다.

“전 그런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도 본 가라면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요.”

“아일론 상회가 본점을 괜히 크로먼 백작가에 세운 게 아니다. 아틸런 상단의 횡포가 워낙 심해 옮겨 온 거지, 그래도 여기 크로먼 백작가에선 아틸런 상단도 함부로 할 수 없거든.”

“그렇군요.”

“마티슨 님이 도자기에 공을 들이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지, 트라발트 공작가의 눈에만 든다면 더 이상 본가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자유롭고 정당하게 상회를 운용할 수 있거든, 그러니 카일! 부탁한다. 최고의 도자기를 만들어다오.”

“이거… 벌써부터 부담이 되는걸요.”

“하하, 그런가?”

토일이 크게 웃었다. 아일론 상회는 복잡한 거리를 지나 외성 중심부에서도 제법 떨어진 삼층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이 우리 상단의 본점이다. 본점의 크기는 작지만 뒤쪽으로 커다란 창고가 세 개나 있을 정도다. 중형 상단에서도 이 정도 창고를 운영하는 곳은 없다.”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토일이 말했다. 상단이 본점에 도착하자 용병들이 너도나도 햇빛이 따스하게 잘 드는 건물 벽에 기대앉았다.

“드디어 끝났다!”

“휴, 이번처럼 살 떨리는 의뢰는 처음이야.”

“그나저나 칼이 죽은 걸 어떻게 말하지? 녀석, 딸아이가 이제 일곱인데….”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해야지. 다른 상단 같았으면 의뢰비까지 떼먹으려 들 텐데, 적어도 아일론 상단은 그럴 일은 없잖아.”

“하긴, 위험한 일이 항상 있는 것도 아니고 아일론 상단이면 괜찮은 의뢰주지.”

용병들이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마차 문이 천천히 열리며 마티슨이 밖으로 나와 헬레나 영애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마티슨 님.”

“별말씀을.”

마티슨이 미소를 지었다. 뒤이어 마차에서 내린 메아린이 헬레나의 귀속에 뭐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티슨 님,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영애.”

“이번에 참여했던 용병들과 일꾼들에게 직접 사례를 하고 싶어요.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영애께서 직접 말입니까?”

“네! 부탁드려요.”

헬레나의 말에 주변에서 웃고 떠들던 용병의 목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귀족 영애가 직접 용병들을 만나 사례를 한다니. 큰 은혜를 입지 않은 이상 하급 용병이 귀족 영애를 만나기도 쉽지 않지만, 용병들에겐 그따위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귀족이 직접 사례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대부호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그리미엄 자작 영애의 사례가 고작 푼돈일 리는 없었다.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며 마티슨의 입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영애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당연히 도와 드려야겠죠.”

“감사해요. 마티슨 님.”

“하하, 오히려 제가 감사드려야죠.”

“아니에요. 도움을 받았다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며 아버님께서 항상 말씀하신걸요. 상단 일꾼들과 용병들이 아니었다면 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을 거예요. 그러니 작은 성의라도 보이는 것이 귀족으로서 도리가 아니겠어요?”

“이런, 영애께서 귀족의 도리를 말하시니, 저 역시 가만히 있을 수는 없군요. 하하하!”

마티슨의 말에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하급 용병들이 일제히 일어나 환호했다.

“와아!”

“아일론 상회, 만세!”

“마티슨 님, 최고다.”

“헬레나 영애, 최고다!”

용병들과 상단 일꾼들이 마티슨과 헬레나 영애를 향해 너도나도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이런 환호 속에서도 시종일관 무심하게 상황을 주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카일, 넌 기쁘지 않은 거냐?”

“뭐, 골드를 더 준다면 나쁠 건 없지요.”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런 거냐?”

“제 표정이 이상합니까?”

카일이 오히려 되물었다.

“전혀 기쁜 표정이 아닌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런가요?”

“말을 말아야지, 일단 가자! 숙소를 배정해주마!”

“잠시만, 그전에 가볼 곳에 있습니다.”

“가볼 곳?”

“지난번에 말씀하신, 세공사를 만나고 싶습니다.”

카일의 말에 토일이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말이냐?”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요.”

눈을 반짝이며 답하는 카일의 모습에 토일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에효, 빌어먹을 녀석, 쉴 시간을 안 주는 군, 따라와라! 안내해 주마!”

“감사합니다. 토일 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담담하게 주변을 살피던 카일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아무튼 특이한 녀석이야!”

토일이 투덜거리며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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