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32화 (332/404)

외전 - 66. 영주의 사냥터

끼아악-

멀리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성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들려온 언덕 너머로 향했다.

“뭐, 뭐지?”

“으으, 소름 끼쳐!”

“고, 고블린 같은 건 아닐까요?”

“고블린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정신 바짝 차려! 잘못하면 여기서 다 죽는 거다. 신호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무조건 앞으로 달려!”

“걱정마십쇼. 죽어라 달릴 테니.”

갑작스러운 비명성에 하급 용병과 일꾼들이 어수선한 대화를 나눴지만, 카일만은 달랐다. 그는 비명의 주인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어째서…!”

카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녀석은 어린 트롤이다. 녀석을 납치해 영주의 사냥터에 데려다 놓은 것도 트롤 무리를 유인하기 위한 카일의 계획 중 하나다. 그렇다고 어린 트롤이 죽을 거란 생각은 하지는 않았다. 허벅지에 일부러 상처를 낸 것도 어미가 새끼를 쉽고 빠르게 찾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일단 어미가 새끼만 찾으면 영주 무리와 직접 마주친다고 해도 큰 충돌로 번지진 않을 거라 판단했다. 카일이 노린 것 역시 바로 이 작은 충돌로 트롤 무리가 다시 돌아오는 걸 늦추고자 했다. 그러나, 계획 중 어디에도 어린 트롤이 먼저 죽을 거란 예상은 없었다.

“녀석들이 미쳐 날뛸 텐데….”

어린 트롤이 죽는 순간, 어미는 원한을 잊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 싸우려 들것이다. 캘토 단장 혼자서는 트롤 세 마리는 감당하긴 어려울 테니, 아마도 다핸 남작이 감당해야 할 피해는 엄청날 것이다.

“가야… 하나?”

고심하던 카일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영주의 압박을 피해 마을을 떠나는 중이다. 이대로 돌아가 영주와 귀족들을 구한다고 영주가 자신을 놓아줄까? 아니다. 오히려 영주의 손에 붙들려 이번엔 정말 빠져나올 수 없게 될지 몰랐다.

아일론 상단 역시 몬스터의 공격으로부터 무사히 빠져나가려면 자신의 도움이 절실했다.

“뭐… 어쩔 수 없지.”

카일이 마을을 떠나는 것은 영주의 지속적인 압박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영주에게도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괜찮나?”

잔뜩 굳어진 카일의 얼굴을 보며 도테트가 다가와 물었다.

“예?”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니 긴장되나 보군.”

“아닙니다. 그런 게….”

“마상 전투가 처음이라 떨리고 긴장되겠지만, 너무 걱정말게. 코퍼와 내가 자넬 도와줄 테니 말이야.”

“감사합니다.”

“아닐세, 괜한 오지랖을 부린 것일지도 모르겠군. 갑자기 자네를 보니 첫 마상 전투가 떠올라서 말이야.”

“도테트 경이라면 분명 대단했겠지요?”

카일의 물음에 도테트가 고개를 저었다.

“부끄럽게도 선임 기사에게 욕만 실컷 먹을 정도로 아주 엉망이었지.”

“네에…?”

“첫 마상 전투라 너무 긴장한 나머지 전투 중에 검을 놓치지 않았겠나?”

“도테트 님께서 말입니까?”

카일의 물음에 도테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다행히 예비검이 있어 위기는 면했지만, 선임 기사분께 검을 놓쳤다며 크게 혼이 났지.”

“그런 일이 있었다니 믿어 지지가 않는군요.”

“누구나 처음이라는 게 있지 않겠나. 때로는 서툴고 실수도 하지만, 그런 경험들이 지금의 날 만들었으니, 그 모든 것들이 소중하다 할 수 있지.”

“그럴까요?”

“난 그렇게 생각한다네, 그러니 혹 지금 실수했다고 자책하거나 두려워하지는 말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하하! 내 말이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

도테트가 환하게 웃었다.

“오크다!”

그때였다. 선두에서 말을 몰던 코퍼가 크게 소리쳤다.

“이제 시작이군. 그럼 먼저 가겠네.”

도테트가 코퍼와 함께 가장 선두로 달려 나가자 그 뒤를 카일이 바짝 따라붙었다.

“가자! 달려라! 말이 지치기 전까진 무조건 달리는 거다.”

“이랴!”

“멈추면 끝이다. 뒤쳐져도 끝이다! 무조건 달린다. 알겠나!”

“예!”

점점 속도를 올리는 마차 위에서 토일의 고함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그사이 코퍼와 도테트가 가장 먼저 십여 마리의 오크와 부딪혔다.

스각-

도테트가 오크 무리 사이로 파고들며 연달아 검을 휘둘렀다. 그저 단순해 보이는 일격이지만 도테트의 검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정확히 오크의 목이 떨어지고 가슴이 갈라졌다. 단순하지만 정교하고 날카롭다. 반면 코퍼의 검은 달랐다.

꽝-

코퍼의 검이 오크의 클럽을 박살 내더니 그대로 머리를 강타했다. 오크의 머리 위로 피가 분수처럼 터지며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처박혔다. 마치 몽둥이로 힘껏 내려친 듯 단순하면서도 거칠고 파괴적이었다.

“확실히 기사와 용병의 검술은 다르군.”

마상 전투라 두 사람 모두 베고 찌르는 단순한 검식을 보였지만, 그 속에서도 정교하면서도 절제된 도테트의 검과 투박한 강인함과 자유로운 코퍼의 검술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취익-”

“캭-”

코퍼와 도테트가 빠르게 오크를 베어 넘겼지만, 수십 마리의 오크를 두 사람이 모두 죽일 수는 없었다. 두 사람에게서 살아남은 오크들이 카일에게 달려들었다.

카일이 빠르게 환도를 뽑아 달려드는 오크를 향해 휘둘렀다.

스각-

아래에서 위로 아름다운 은빛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 검격이 오크의 목을 단번에 날려버렸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하늘 위로 높이 들려진 검이 녹슨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오크의 머리로 떨어졌다.

퍼걱-

칼등에 얻어맞은 오크의 머리가 터지며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처박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겨우 숨통만 남아있던 오크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퍼억-

맹렬하게 달리는 마차 바퀴가 그대로 오크의 머리를 강타했다.

덜컹-

한쪽 바퀴가 들리며 마차가 크게 요동치듯 흔들렸다. 마부가 노련하게 마차를 조정해 넘어지려는 걸 막으며 안정을 되찾았다.

“토일 님, 괜찮으십니까?”

마부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 정도는 끄덕 없으니 신경 쓰지 말고 달려!”

마부를 향해 외친 토일이 측면에서 달려오는 오크를 향해 석궁을 쐈다.

쉬익-

퍼억-

마차를 향해 맹렬히 달려오던 오크가 볼트를 가슴에 맞더니 가속력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처박혔다. 거칠게 흔들리는 마차에서도 달리는 오크를 정확히 맞출 정도로 토일의 석궁 실력은 대단했다.

“좌측! 좌측에서 놀입니다.”

뒤쪽에서 들려온 다급한 외침에 토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좌측으로 향했다. 놀 이십여 마리가 두 무리로 나뉘어 마차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고 있었다.

마차를 노리고 뛰어 오른 놀을 향해 토일이 석궁을 쐈다.

깽-

볼트에 정확히 적중 당한 놀이 바닥에 처박혔다.

“녀석들 목표는 말이다! 말을 지켜!”

토일의 외침에 상당일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말을 향해 달려드는 놀을 향해 일제히 석궁을 발사했다.

* * *

“헉헉, 빌어먹을!”

거친 숨을 몰아쉰 일튼이 주변을 돌아봤다. 벌써 반나절이 지났지만, 여전히 트롤과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기사단의 피해만 가중되며 뒤로 밀릴 뿐 좀처럼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지금까지 버틴 것도 캘토 단장이 앞장서 트롤을 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캘토 단장의 역할은 세 마리의 트롤로부터 기사단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딱 그 정도뿐이었다.

“정신 차려! 여기서 밀리면 다음은 숙영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 버틴다.”

캘토의 외침에 기사들이 다시 힘을 내 앞을 막아섰지만, 기사들의 얼굴엔 희망이 없었다. 남부 최강이라 생각했던 캘토와 기사단만으로는 트롤 세 마리를 감당할 수 없었다. 멍청할 거라 생각했던 트롤은 마치 오랫동안 합격술을 익힌 듯 공격과 후퇴를 반복하며 기사들에게 피해를 누적시키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고 체력과 오러가 바닥나면 남은 것은 앞서 죽어간 동료들처럼 처참한 죽음뿐이란 생각이 기사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음….”

캘토가 낮은 신음을 내뱉으며 기사들을 돌아봤다.

“온실 속… 화초란 말인가?”

다핸 남작가는 그동안 기사단을 확충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실력과 재능만 있다면 평민이라도 종자로 받았고 검술을 가르쳤다. 남작은 언제나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힘없고 낙후된 변방의 남작가라는 위치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일 부자를 더욱 압박해 혼인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하지만 급하게 서두르다 보니 여기저기서 부작용이 속출했다. 당장 카일이 영지를 떠나 버렸고, 보일과의 사이도 점점 멀어졌다. 기사의 확충에만 시선이 팔려, 정작 실전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나약한 기사들만 잔뜩 키웠을 뿐이다.

“휴… 보일 대장이 부럽군.”

보일에겐 실전을 겪은 뛰어난 제자들이 많다. 당장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메튜와 필론만 해도 남작가의 어느 기사들보다 월등한 실력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들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이들 역시 재능 하나만으로 신분을 초월해 기사가 될 정도였으니까.

“다들 정신 차리고 똑바로 들어라! 곧 샤론 마을 자경대에서 지원이 올 거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알겠나!”

캘토의 말에 어두웠던 기사들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졌다. 원군이라는 작은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 하지만 그들이 온다고 트롤을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저 녀석들은… 목을 날리지 않는 이상 싸움을 끝내지 않을 겁니다.”

중급 엑스퍼트인 캘토도 죽이지 못한 트롤이다. 샤론 마을 자경단 출신 엑스퍼트들이 합류한다고 해서 트롤 무리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지 않았다.

“걱정마라! 보일 대장은….”

부왕-

그때, 갑자기 멈춰있던 트롤들이 일제히 기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피해!”

깜짝 놀란 캘토가 황급히 트롤의 앞을 막아섰다.

쾅-

검과 클럽이 충돌했다. 아쉽게도 클럽은 잘리지 않았다. 캘토 역시 기사들 만큼이나 체력과 오러가 줄어든 것이다.

“크르륵-”

붉게 충혈된 눈으로 트롤이 캘토를 노려봤다.

“위험-”

그때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양쪽 측면을 공격하던 트롤들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돌아서더니 캘토에게 달려든 것이다.

“함정!”

중앙에서 달려드는 트롤을 캘토가 막아섰지만, 양쪽 측면 기사들은 트롤을 피해 뒤로 물러나기에 급급하면서 캘토가 중앙에서 순간적으로 고립되어 버린 것이다.

부왕-

캘토의 머리 위로 클럽이 떨어져 내렸다. 이대로 맞았다간 캘토라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캘토는 당장 물러날 수 없다. 뒤로 물러나는 순간 앞쪽에 있는 트롤의 공격이 그대로 캘토에게 쏠릴 것이 분명했다. 캘토로서는 피하지도, 공격하지도 못할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위잉-

퍼억-

그때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은빛 검이 클럽을 높이게 치켜든 트롤의 등을 뚫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정확히 심장을 관통한 것이다.

쿵-

들고 있던 클럽이 바닥에 떨어졌다. 트롤은 가슴에 박힌 은빛 검이 믿기지 않는지, 검을 뽑으려 허공을 향해 몇 번 손을 휘적이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늦진 않아 다행이군요.”

수풀을 헤치며 장대한 체구의 사내가 빠져나오더니 아무렇지 않게 트롤의 등에서 검을 뽑았다.

푸확-

보일이 검을 뽑자 심장에서 핏물이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크르륵-”

새롭게 등장한 적의 모습에 남은 트롤들이 노려보며 경계했지만,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 자네가?”

여기서 샤론 마을까지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반나절이 넘는 거리다. 영주가 부탁하기 전에 마을을 떠났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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