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64. 카세인 협곡(7)
“지독한 놈들!”
트롤 세 마리 모두가 중독되어 쓰러졌지만 죽은 녀석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단지 다리 한쪽 전체가 마비되며 쓰러진 것뿐이었다. 카일은 숲에서 황급히 뛰어나오며 두 대의 화살을 연달아 어린 트롤을 향해 날렸다.
쉬익-
퍽퍽-
“끼아악-”
팔과 다리에 각각 한발씩 화살을 얻어맞은 어린 트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카일은 미리 준비한 올가미를 던져 쓰러진 어린 트롤을 휘감은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내 달렸다.
쿵-
팔다리가 마비된 어린 트롤이 손도 써보지 못하고 카일에게 끌려가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크아악-
어린 트롤이 카일의 손에 끌려가자 쓰려져 있던 트롤들이 괴성을 지르며 두 팔을 마구 휘저어 카일의 뒤를 쫓아오려 했다. 하지만 괴력과 높은 재생력을 지녔을 뿐 거대한 몸집만큼이나 둔한 트롤이 마비된 다리를 이끌고 빠르게 달려가는 카일의 뒤를 쫓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와 트롤 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기만 했다.
“후욱후욱”
한참을 달려 트롤에게서 멀어진 카일이 거친 숨을 토하며 끌고 온 어린 트롤을 내려다봤다. 바닥에 질질 끌려오며 여기저기 난 상처가 어느 샌가 아물고 있었다. 역시 어리긴 해도 트롤이라 그런지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재생력이었다.
“화살을 두 대나 맞고도 죽지 않았군.”
어린 트롤의 상태를 살핀 카일의 얼굴이 찌푸렸다. 오크나 인간이었다면 화살을 맞는 즉시 죽었겠지만 트롤은 달랐다. 트롤은 재생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독에 대한 내성까지 강해 화살이나 독으로는 죽일 수 없었다.
그저 투구꽃에 함유된 강력한 마취성분으로 잠시 움직임을 둔화시킬 뿐이었다. 발목을 노린것 역시 마찬가지다. 심장과 가장 먼 곳인 발목을 노려 독이 해독되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는 것과 동시에 트롤의 추격을 늦추기 위해서였다.
“아프지는 않을 거다.”
푹-
카일이 어린트롤의 허벅지에 검을 박아 넣었다. 곧 진한 녹빛 핏물이 흘러나왔지만, 정신을 잃은 트롤은 미동도 없었다. 독에 취한 덕분에 아직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쫓아올 수 있겠지.”
카일은 다시 한번 밧줄을 단단히 동여맨 뒤 또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 * *
“카일은 돌아오지 않았나?”
코퍼의 옆으로 다가온 토일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조금 전 언덕 위까지 확인했지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흠…큰일이군.”
“어쩌면 마크와 비터를 따라 마을로 돌아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야 오히려 다행이지만, 만약 정찰 중 일이 생긴 거라면….”
“그랬다면 이곳 역시 발각당했을 겁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고문은 다른 문제니까요.”
“만약 부상을 당해 어딘가에 숨어 있다면….”
“녀석이 부상을 당할 정도면… 협곡을 돌파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코퍼의 말에 토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은 검술은 물론 오랫동안 오크랜드를 혼자서 드나들 정도로 뛰어난 정찰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카일도 혼자서도 돌파하지 못할 정도로 적들이 배치되어있다면 상단 전체가 협곡을 돌파하는 건 아마도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은 이상 계획대로 갈 수밖에는 없네.”
“알고 있습니다. 이미 만반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럼, 출…!”
“잠시만!”
계곡 안쪽으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카일이 달려 들어왔다.
“카일!”
“녀석! 살아있었구나!”
코퍼와 토일이 황급히 카일에게 달려왔다가 곧 뒤로 물러났다. 몸을 감싼 흙먼지와 더불어 여기저기 묻어있는 몬스터의 피에서 고약한 악취가 나 카일의 옆으로 도저히 다가갈 수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말하자면 이야기가 길지만,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죠.”
카일이 황급히 언덕 위로 올라가 숨겨 놓은 가방을 챙겨 내려왔다. 그사이 코퍼가 마차에 매어둔 말을 끌고 왔다.
“감사합니다.”
말 위로 훌쩍 올라선 카일이 상단의 선두에 섰다.
“출발!”
토일의 외침에 따라 상단 전체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스각-
마지막 남은 고블린을 단번에 베어낸 켈토 단장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관리가 엉망이군.”
영주가 사냥을 떠나기 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냥터 일대를 확인하고 주변에 자리 잡은 몬스터를 토벌하는 일이다. 사냥 중 영주와 귀족들이 몬스터로 인해 불상사를 겪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다.
켈토 기사단장 역시 일튼을 비롯한 기사 십여 명을 파견해 보름 동안 인근 몬스터를 토벌하도록 명했다. 일튼 역시 보름동안 사냥터 안쪽에 자리 잡은 몬스터를 외곽으로 밀어내고 주변에 자리 잡은 오크 마을 두 곳을 불태웠다.
일튼과 기사들로서는 보름이란 짧은 시간 동안 최선의 성과를 내고 이틀 전 영주와 귀족들의 호위를 위해 영지로 복귀한 것이다.
하지만 영주와 귀족들이 사냥터에 도착한 그 날, 늦은 저녁 무렵 황당하게도 수십 마리나 되는 고블린 무리들이 집단 수경지로 난입했다. 이런 대규모의 행렬을 고작 고블린 따위가 공격한다는 사실도 황당하지만, 영주인 다핸 남작을 비롯해 귀족들이 머무는 수경지에 몬스터들이 떼를 지어 공격해왔단 사실도 기사단에겐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늘, 주군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다. 고작 고블린 몇 마리도 처리하지 못한 기사단 때문에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 단장님!”
기사 일튼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보름이란 짧은 시간 안에 최선을 다했다지만, 결국 기사는 결과로서 말해야 했다. 영주와 귀족들 눈앞에 몬스터가 나타난 이상 모든 것은 책임자인 일튼에게 있었다.
“이번 일에 대한 문책은 영지로 돌아가서 하겠다.”
싸늘하게 바라보는 켈토의 말에 일튼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기사단은 지금 즉시 사냥터를 수색해 몬스터를 남김없이 토벌한다. 일튼!”
“네! 단장님.”
“부디 이번만은 실수가 없길 바란다.”
“단장… 님.”
고개를 돌려 멀어져가는 기사단장을 보며 일튼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일튼은 캘토 단장이 자신에게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준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번만은 절대 실수하지 않겠다.”
주먹을 꽉 말아쥐며 낮게 외친 일튼이 곧장 말 위로 올랐다.
“사냥터에 있는 몬스터는 모조리 죽여라!”
검을 뽑아 든 일튼이 곧장 말을 몰아 숲속을 내달렸다. 그 뒤를 기사단이 황급히 뒤쫓았다.
커다란 마법 등을 앞세우며 숲속을 질주하는 기사단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켈토가 다핸 남작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영주님!”
“흠… 일어나게, 자네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있다.”
다핸 남작이 관대한 척 말하긴 했지만, 그의 딱딱한 목소리엔 질책이 담겨있었다. 아무리 다핸 남작이 관대한 영주라고는 하지만 이번 몬스터의 습격은 남작으로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실수였다.
영주의 사냥은 단순한 오락이나 유희가 아닌 일종의 군사 훈련인 동시에 영지의 군사력과 기사단의 역량을 대외에 과시하는 행위다.
특히나 이번 사냥은 오랜 고심과 계획 끝에 영지의 귀족뿐 아니라 인근 영지의 귀족들까지도 초청한 중요한 자리였다. 그런데 고작 고블린 무리 하나 때문에 기사단의 명예가 바닥으로 추락했으니 다핸 남작으로선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이미 지나간 일, 이번 일은 없던 걸로 하겠네, 그러니 내일 있을 사냥 준비엔 실수 없이 더욱더 만전을 기해주게.”
“물론입니다. 절대 오늘 같은….”
끼아악-
그때였다. 조금 전 베어 넘긴 고블린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몬스터의 비명이 들려왔다.
이건 마치….
“어미를 잃은 새끼의 처절한 비명 같군.”
다핸 남작의 낮은 목소리에 켈토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트롤…!”
쿠아악-
크아앙-
켈토 기사단장의 낮은 독백과 함께 사냥터 경계구역에서 시작된 트롤의 포효에 숲속에 고요한 침묵이 찾아왔다.
“이건…!”
“아무래도 제가 직접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그렇게 하게!”
막 몸을 돌리려던 켈토가 남작을 돌아봤다.
“혹, 사람을 보내 보일 그 친구에게 도움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보일 대장은 아무리 빨라도 여기까지 오려면 하루는 족히 걸릴 텐데… 그 정도로 어려운가?”
“새끼를 잃은 트롤은 아주 흉포해서 죽기 전엔 싸움을 멈추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겠지만 세 마리 이상이면 녀석을 붙잡고 버티는 것도 힘듭니다.”
“흐음… 아, 알겠네. 즉시 연통을 넣겠네.”
“감사합니다. 영주님.”
고개를 숙인 켈토가 황급히 말에 올라 소리가 난 곳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잔뜩 굳은 얼굴로 멀어져 가는 켈토를 바라보던 다핸 남작이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을 압박할 빌미를 이제야 잡았건만… 휴.”
사냥을 떠나기 전날, 남작은 샤론 마을로 사람을 보내 이번 사냥에 보일과 카일의 참석을 요청했다.
이번 기회에 두 사람을 귀족들 앞에 선보여 두 사람이 확실한 자신의 사람임을 각인시키려는 남작의 계책이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카일이 영지를 떠났다는 사실과 함께 보일의 정중한 거절이 담긴 서찰이 도착하자 남작으로선 대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일과의 혼담을 계속 미루던 보일이 카일을 빼돌린 건 남작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키는 일이었다. 남작으로선 당연히 문제를 제기하고 처벌을 논할 수 있겠지만 일단 참았다.
괜히 처벌을 논했다간 그가 모든 걸 버리고 떠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신 적당한 압박과 회유를 통해 남작도 원하는 걸 얻을 생각이었다. 헌데 갑작스런 트롤의 난입으로 계획 자체가 어그러지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단장인 켈토를 잃을 수는 없으니 남작으로선 보일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는 없었다.
“넌 지금 즉시 샤론 마을로가 지금 이곳 상황을 알리고 보일 대장에게 도움을 청해라!”
다핸 남작의 명에 나이 어린 종자가 황급히 말에 올라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 * *
“카세인 협곡은 반대쪽이다.”
“알고 있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은 거냐?”
코퍼의 말에 카일이 화살 하나를 꺼냈다. 협곡 위에서 벌인 짧은 전투 당시 챙겨온 화살이다.
“이미… 한번 부딪혔구나.”
“네, 개개인은 몰라도… 두셋만 모여도 감당하기 힘들 겁니다. 녀석들 중 제법 화살이 강한 녀석도 있고, 마법도 쓰더군요.”
“마법까지?”
“네, 절벽에서 마법을 이용해 뛰어 내렸습니다. 아마도 지난번 봤던 녀석처럼 마법과 궁술을 함께 쓰는 것 같았습니다.”
“흠….”
“그래도 너무 걱정 마십시오. 다행히 몬스터의 공격을 최소화하며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으니까요.”
“설마… 그것 때문에 늦은 것이냐?”
코퍼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터와 마크 두 분이 늦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카일이 웃으며 샤론 마을이 있는 남쪽을 바라보았다.
“으윽!”
“뭔냐?”
“갑자기 누가 내 이야기를 하나 봐! 귀가 엄청 간지러운데?”
“멍청한 녀석, 깜짝 놀랐잖아!”
“아냐! 정말 미친 듯이 가렵단 말이야!”
비터가 새끼손가락을 귓구멍에 밀어 넣으며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이럴 시간 없다. 어서 가야 해!”
“젠장, 알았다고!”
버럭 고함을 지른 비터가 말 위에 올랐다. 카일과 헤어진 비터와 마크는 곧장 영주성으로 달려가 말을 샀다. 한사코 말이 없다던 말 상인은 웃돈까지 들이밀자 어디선가 건장한 말 두 마리를 끌고 왔다.
두 사람은 곧장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잠깐씩 멈춘 것도 말이 도저히 지쳐 갈 수 없을 때만 잠깐 휴식을 취했을 뿐이었다. 정신없이 달린 덕분에 둘은 이른 아침이 되어서야 샤론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멈추시오!”
목책 위에 올라선 메튜가 마크와 비터를 멈춰 세웠다.
“어디서 오신 분들입니까?”
“우린 카일의 부탁을 받고 달려왔습니다. 보일 대장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카일!”
메튜가 황급히 목책에서 뛰어내렸다.
“카일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메튜의 다급한 물음에 마크가 카일이 전해준 서신을 내밀었다.”
“카일이 적어준 서신입니다. 일단 보일 대장님께 전해 주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급히 달려오시느라 힘드셨을 겁니다. 들어가서 쉬십시오. 전 마스터께 다녀오겠습니다.”
메튜가 두 사람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곧장 목책 여기저기를 밟더니 훌쩍 목책을 뛰어넘어 버렸다.
“저 사람도 카일 못지않겠는데?”
마크가 놀란 얼굴로 메튜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아~ 몰라! 힘들어 죽겠다. 다른 건 모르겠고 일단 들어가서 배나 채우자!”
끼익-
커다란 목책이 천천히 열렸다. 가장 먼저 비터가 말을 끌고 안으로 들어가자 마크가 그 뒤를 따라 천천히 안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