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63. 카세인 협곡(6)
“역시! 우릴 찾고 있었군.”
카세린 협곡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절벽 위, 커다란 대궁을 비끄러맨 복면 사내가 협곡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의 생각은 모두 비슷한 듯 공교롭게도 카일이 협곡을 살피기 위해 오르던 절벽 위에서 사내를 발견한 것이다. 다행히 사내를 발견하고 급히 몸을 숨긴 덕분에 아직은 발각당하진 않았지만 더이상 다가가기도 쉽지 않았다. 만약 발각이라도 당하면 절벽 아래쪽인 카일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녀석은… 혼자가 아니다.”
카일이 고심에 찬 얼굴로 절벽 위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면 사내의 뒤쪽으로 대궁을 손에든 복면인 두 명이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3 대 1, 어쩌면 발각되는 순간 더 많은 적들이 나타날 수 있었다.
“손해 보는 싸움을 할 수는 없지.”
카일이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삐익-
절벽 위에서 긴 피리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젠장!”
카일이 본능적으로 몸을 뒤집었다.
쉬익-
날카로운 파공성이 귓가를 스치듯 지나갔다.
터엉-
커다란 아름드리나무에 화살이 깊숙이 파고들며 아직도 힘이 남았는지 꼬리 깃이 파르르 흔들렸다. 바로 어제 마주쳤던 궁사가 사용했던, 재질을 알 수 없는 검은 금속 화살이었다.
“저 녀석,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카일이 사내를 발견한 게 아니다. 사내가 먼저 카일을 발견했지만, 모른 척 카일이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사거리 안으로 다가오면 부상을 입혀 생포하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카일은 황급히 허리에서 활대를 풀어내 시위를 건 후 절벽 위를 바라보았다.
“미친!”
사내와 그를 따르던 부하들이 마치 자살이라도 하려는 듯 절벽에서 몸을 날렸다. 아무리 엑스퍼트라도 저 정도 높이에서 떨어졌다간 죽음을 면치 못 할 것이다. 하지만 빠르게 절벽 아래로 추락하던 사내의 몸이 한순간 출렁이듯 튕기더니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마법!”
공기가 순간적으로 뭉쳐 사내를 하늘로 밀어내며 충격 완화해준 것이다. 사내는 안전하게 착지하는 동시에 시위를 당겼다.
퉁!
시위를 떠난 화살이 빠른 속도로 카일에게 날아들었다. 황급히 바닥을 굴러 화살을 피한 카일이 잽싸게 화살 한 대를 하늘 높이 쏘아 보낸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쉬익-
이번엔 전방에서 빠르게 화살이 날아들었다. 아니,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들고 있었다. 전방에서 날아든 화살을 활대를 휘둘러 쳐낸 카일이 몸을 돌려 또다시 하늘 위로 화살 날렸다.
쉬익-
“쉴 틈을 안 주는군!”
바닥에 납작 엎드려 화살을 피한 카일이 급히 바닥을 굴렀다.
퍽퍽-
카일을 따라 화살 서너 대가 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상관하지 않고 다시 하늘 위로 화살 세 발을 더 날려 보냈다.
“빌어먹을! 일곱.”
마음속으로 세고 있던 숫자가 다급한 나머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쉬익-
퍽-
아슬하게 팔을 스치며 지나간 화살이 바닥 깊숙이 박혔다. 자세를 바짝 낮춰 몸을 숨긴 카일이 황급히 주변을 돌아봤다.
“포위… 됐군. 여섯!”
뒤쪽은 가파른 낭떠러지였고, 앞쪽과 양옆에선 검은 복면인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도 발악할 힘이 남았나?”
대궁을 손에 든 복면 사내. 모두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지만 절벽 위에서 뛰어내린 녀석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후…몰이 실력이 제법이군, 마치 늑대에게 사냥당하는 기분이었다.”
‘다섯’
“재밌는 녀석이군.”
복면 사내가 싸늘하게 말했지만 내심으론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카일의 말대로 복면인들이 사용한 전술은 늑대들의 사냥법을 응용한 것이다. 적을 사방에서 치고 빠지면서 함정으로 몰아 마지막에 숨통을 끊어 놓는 전술이다.
‘넷.’
카일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마음속으로 낮게 외치며 어깨에 감아 놓았던 밧줄을 풀었다.
“용병들에게 원한은 없다. 상단 위치만 알려주면 널 무사히 보내줄 수도 있다.”
“정말인가?”
“물론 약속하지!”
‘셋’
“그런데… 무사히 보내주겠다는 건 날 죽일 수 있다는 말인데? 정말 날 죽일 수 있나?”
“설마,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둘’
“큭, 궁금하군, 이곳으로 내가 몰이를 당한 걸까 아니면 유인한 걸까?”
“뭐!”
“하나!”
카일이 큰소리로 외치며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사방에서 처절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크아악-”
“커억-”
“악!”
“습격이다!”
사내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을 노려 카일이 재빨리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사내가 깜짝 놀라 카일이 뛰어내린 절벽을 노려봤지만, 뒤를 쫓을 수는 없었다. 언제 어디서 화살이 날아올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낮은 욕설을 내뱉으며 카일이 사라진 절벽을 노려보던 사내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세심히 살폈지만, 어디에도 단원들을 공격한 궁수들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설마!”
복면 사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여전히 공격은 없었다.
“단장님!”
“피해는?”
“세 녀석이 화살을 맞았습니다. 그중 둘은 어깨에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었고 한 녀석은 정수리에 맞아 즉사했습니다.”
“어깨와… 정수리!”
“네!”
“젠장! 놈이다.”
복면 사내가 카일이 사라진 절벽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놈이 화살을 날리는 모습을 몇 번 보긴 했지만 모두 엉뚱한 방향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게 화근이었다.
“찾아라! 아직 멀리 가진 못했다. 반드시 놈을 잡아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삐이익-
사내의 외침과 함께 숲 여기저기서 낮은 피리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쉽지…않겠군.”
협곡 주변으로 넓게 퍼져가는 피리 소리에 카일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피리 소리만 확인해도 적잖은 인원이 협곡 일대에 매복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일단… 어두워질 때까지 숨어 있어야겠군.”
점점 붉게 물들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던 카일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카일이 있는 곳은 절벽 중턱에 난 작은 바위틈. 산을 오르기 전 습격에 대비해 처음부터 탈주로와 은신처까지 모두 계획하고 움직였다. 복면 사내에게 당해 절벽 쪽으로 밀려간 것 같지만, 아니다. 카일이 역으로 복면인들을 원하는 장소로 끌어들인 것이다. 하늘로 날린 다섯 대의 화살 중 첫발과 두 번째 화살은 궁수라면 반드시 선택할 가장 이상적인 위치로 미리 보낸 것이었고, 남은 세 발은 정확히 복면인들을 노린 화살이었다. 각각 다른 위치와 각도에서 화살을 날렸지만 다섯 발이 한 번에 떨어지게 정확히 계산해 화살을 날렸다. 마치 다수가 습격한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 * *
“그게…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당시 그자들이 사용했던 화살입니다.”
“음….”
도테트가 카일이 남기고 간 화살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분명 쉽사리 만들 수 없는 화살이긴 합니다만, 처음 보는 화살입니다.”
도테트경의 말에 마티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살을 손에 들었다.
“재질이니 합금 모두 독특합니다. 나무에 비해 강하다고 할 수 있지만 검을 만들기엔 측면에서의 충격엔 약합니다. 무엇보다 너무 가볍고 탄성이 강합니다. 화살을 만들기엔 최고의 금속이지만 검이나 다른 무구를 만들기엔 절대적으로 불리한 금속이죠.”
“그럼….”
“궁술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가문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화살이란 말이죠. 아시겠지만 그리미엄 가문은 한때 궁술로 유명했던 가문이 아닙니까?”
마티슨의 말에 도테트의 얼굴이 잠시 굳었지만 곧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 그대로 한때일 뿐, 가문에서 궁술을 익힌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도테트 경이 모르는 누군가 궁술을 익힐 수 있다는 말이군요.”
“흠… 글쎄요. 그리미엄 자작가엔 수백의 기사들과 병사, 그리고 귀족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모두를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건 다른 가문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것도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마티슨의 얼굴엔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이번 습격이 그리미엄 가문과 관련되어 있음을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휴… 솔직히 이런 말장난은 기사인 저에겐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런 대화는 주군과 나누는 것이 마티슨 님께 조금 더 이득일 텐데… 굳이 제게 말씀하신 걸 보니 원하시는 게 있는 것 같군요?”
“먼저… 솔직하게 말씀해 주셨으니, 저 역시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린 건, 일단은 영애의 안전 때문입니다. 지금이 아니라도 언제든 공격을 받을 수 있음을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흠… 백작령에서도 저격을 당할 수 있다는 말이군요.”
“지금이야 몬스터를 이용했지만, 습격이 들통난 이상 이젠 거리낄 것이 없을 테니까요.”
“그것도… 그렇군요.”
몬스터 습격의 목표가 그리미엄 자작가로 밝혀진 이상 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영애를 죽이려 할 것이다.
“그리고… 도테트 경께 부탁이 있습니다.”
“흠, 말씀하시지요.”
“코퍼 대장과 함께 도테트 경께서 선봉을 서 주십시오.”
“아!”
결국 어렵게 둘러 말했지만 마티슨이 원한 건 바로 이것이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 비 아래 선봉에서 길을 뚫는 것.
“아시겠지만 지금 마차는 물론 말에게도 가죽을 덧대 방어력을 높이고 있습니다. 화살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죠. 하지만 그것만으론 한계가 있습니다.”
“앞을 막아서는 적을 돌파할 사람이 필요하단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코퍼 대장이 스스로 나서긴 했지만 혼자만으론 힘듭니다. 경께서 도와주시면 조금 더 안전하게 협곡을 돌파할 수 있을 겁니다.”
도테트가 고심하듯 눈을 감았지만, 사실 그는 마티슨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어차피 그리미엄 자작 영애 역시 상단의 도움 없이 안전하게 이곳을 빠져나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감사합니다. 도테트 경.”
마티슨이 환하게 웃으며 도테트의 손을 맞잡았다.
* * *
“분명 이쯤에 있을 텐데?”
해가 서서히 저물자 카일은 재빨리 절벽을 내려와 황급히 카세인 협곡을 빠져나왔다. 그리곤 달빛을 등불 삼아 낮게 깔린 풀잎 사이를 한참 동안 헤매고 다녔다.
“찾았다!”
카일의 눈에 반쯤 말라버린 잎사귀가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필요한 풀잎을 찾은 것이다. 카일이 급히 단검을 꺼내 조심스럽게 땅을 파자 굵직한 뿌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명 투구꽃, 투구 모양의 보라색 꽃이 핀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곳 사람들에겐 이름 없는 야생 독초일 뿐이지만 전생에 자주 보았던 투구꽃과 비슷해 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물론 이름만 같은 건 아니다. 투구꽃과 마찬가지로 이 꽃 역시 강력한 독성과 비슷한 약성을 지니고 있었다.
카일이 필요한 건 투구꽃 뿌리의 즙이다.
평평한 돌을 찾아 대충 흙을 털어낸 뒤 투구꽃 뿌리를 짓이겨 화살촉에 발랐다.
“아쉽군.”
어렵게 구한 투구꽃으로 만든 독화살은 총 6대.
도구만 충분히 있었어도 열 대 분량의 독화살은 충분히 만들 수 있지만 급작스러운 상황에서 만든 것이라 어쩔 수 없었다.
독화살만 따로 묶어 허리에 찬 카일이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해가 뜨기 전 일을 끝내려면 서둘러야 했다.
“크아앙-”
멀리서 들려오는 트롤의 기괴한 울음소리.
카일이 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수풀을 헤치며 고개를 내밀었다.
“역시 예상대로군.”
사방에 널려있던 몬스터의 사체가 어느새 한곳에 차곡차곡 쌓여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었다. 트롤 세 마리가 부지런히 주변에 널려있던 몬스터를 한곳에 옮겨 놓은 것이다. 예상대로 이곳에서 한동안 머물 생각이 분명해 보였다.
“그럼, 시작해 볼까?”
허리에서 활대를 풀어낸 카일이 조금 전 만든 독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끼이익-
시위를 당기자 활대가 부러질 듯 만곡을 그리며 휘어졌다.
“일단 한 마리…!”
퉁-
쉬익-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독화살이 트롤의 발목을 정확히 꿰뚫고 지나갔다.
쿵
“크아악”
화살에 맞은 트롤이 털썩 주저앉아 한참 동안 고통스런 괴성을 질렀지만, 곧 멀쩡히 일어났다. 상처도 금세 아물었다.
“역시! 재생력 하난 끝내주는군.”
카일이 투덜거리며 다시 독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화살에 맞았던 트롤은 아직도 관통당한 고통이 남았는지 사방으로 거대한 클럽을 휘두르며 괴성을 질러댔다. 다른 녀석들도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화살이 날아온 곳을 찾기 시작했다.
끼이익-
퉁-
쉬익-
또다시 날아간 독화살이 다른 트롤의 발목을 각각 관통했다.
“크악-”
다른 녀석들도 흥분한 듯 괴성을 지르며 인근 나무와 숲을 박살 내며 날뛰기 시작했다.
쿵-
한참 동안 발악하듯 클럽을 휘두르던 트롤 한 마리가 쿵 소리와 함께 쓰러지더니 다른 트롤들도 연이어 바닥에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