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62. 카세인 협곡(5)
투둑-
뿌연 안개를 헤치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가던 카일이 앞쪽에서 들려온 작은 소리에 급히 주먹을 들어 올리며 자세를 낮췄다. 카일의 뒤를 바짝 뒤쫓던 마크와 비터도 급히 자세를 낮췄다.
“무슨 일이냐?”
마크와 비터가 카일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앞쪽에 누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적인 거냐?”
“아직은, 동물이나 몬스터일 수도 있죠.”
“확인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
“안개 때문에 확인하려면 가까이 접근해야 하는데, 오히려 발각될 수 있습니다.”
“일단 가까이 접근했다가 적이면 바로 죽이는 건 어떠냐? 이 정도 안개라면 습격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다.”
비터가 당장이라도 앞서 나가려는 듯 허리에서 단검을 뽑았다. 안개를 틈타 접근해 암살하는 건 장검보다는 단검이 유리했다.
“아닙니다. 여긴 상단이 숨은 계곡과 가까운 곳입니다. 적이든 몬스터는 흔적이 발견되면 이 주변을 가장 먼저 뒤질 겁니다. 최대한 기척을 감추고 돌아가시죠.”
“확실히, 여기서 누군가 죽으면 의심하기 쉽겠지. 안개 때문에 흔적을 지우기도 쉽지 않겠고.”
마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비터를 돌아보자 비터가 못 이긴 척 단검을 검집에 밀어 넣었다.
“그럼 다시 가겠습니다.”
카일이 다시 안개를 헤치며 조심스럽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카일의 등 뒤를 쫓아 한참을 이동하던 마크가 갑자기 카일의 어깨를 툭 치며 카일을 멈춰 세웠다.
“여긴 카세인 협곡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협곡은 반대쪽이다.”
마크가 빠르게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날이 밝아오면서 낯익은 주변 지형이 드러나자 마크가 급히 카일을 멈춘 것이다.
“맞습니다. 저흰 지금 카세인 협곡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협곡으로 가는 게 아니라고?”
“도착하면 말씀을 드리려 했는데….”
카일이 고개를 저으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두 분은 이 길로 샤론 마을로 가주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냐? 갑자기 샤론 마을로 돌아가라니?”
“설마… 상단을 내버려 두고 도망치라는 거냐?”
갑작스런 카일의 말에 마크와 비터가 동시에 소리쳤다.
“잠시만, 그런 게 아닙니다.”
카일이 황급히 기감을 넓혀 주변을 살폈다. 카세인 협곡과는 반대 방향이라서 그런지 다행히 주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없었다. 카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고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일단 마크와 비터를 진정시킨 카일은 점점 흩어지는 안개를 피해 커다란 바위 뒤로 비터와 마크를 이끌었다.
“일단 두 분을 샤론 마을로 보내기로 한 건 제 생각이 아닙니다. 토일 님과 마티슨 상단주님께서 결정하신 일입니다. 코퍼 대장에게도 미리 말해 두셨다고 합니다.”
“마티슨 님께서… 말이냐?”
“네.”
카일은 대략적인 상황을 마크와 비터에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공녀에게 진상할 물건을 만들려면 샤론 마을에서 재료를 가져와야 한단 말이군.”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카일이 품 안에서 서신을 적은 작은 천 조각을 꺼내 마크에게 내밀었다. 토일과 이야기를 마친 후 보일에게 보내는 간략한 서신이었다.
“아버님께 서신을 전달해 주시면 재료를 내어 주실 겁니다. 그걸 십여 일 안에 백작령으로 가져오셔야 합니다.”
“차라리 네가 직접 가는 건 어떠냐?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면 직접 가서 재료를 가져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전 백작령에서 물건을 만들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아시겠지만 절 제외하면 지금 상단에서 샤론 마을로 갈 사람은 두 분 뿐입니다.”
“…상단은 지금 위기 상황이다. 이런 때 우리 두 사람이 모두 빠졌다가 전투라도 벌어지면 피해가 클 거다. 게다가 우리 두 사람이 빠진 걸 알면 상단 일꾼들이나 하급용병들이 특히나 동요할 텐데?”
마크와 비터는 각각 소드 엑스퍼트와 소드 유저다. 오크들의 습격으로 전력이 줄어든 상단의 입장에선 두 사람이 빠지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전력 감소를 피할 수 없었다. 더구나 상단 일꾼들이나 하급 용병들은 전력 감소로 상당한 심적 부담을 느낄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급 용병이나 상단 일꾼들에겐 비밀로 하기로 했습니다.”
“오늘이야 지나간다고 해도 내일이면 당장 드러날 텐데 감출 수 있을까?”
“그래서 두 분께 직접 정찰을 부탁하러 오신 겁니다. 하급 용병들이나 일꾼들도 이른 새벽에 먼저 정찰을 떠났다고 생각할 겁니다.”
“결국 피해를 감수하겠다는 말이군.”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 역시 토일에게 같은 질문을 했었고 같은 대답을 들었다.
“이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상단주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따를 수밖에.”
비터가 투덜거리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일이 촉박하군.”
“맞습니다. 일단 도보로 다핸 남작령까지 가야 하니 서둘러야 할 겁니다.”
카일이 품 안에서 꺼낸 가죽 주머니를 마크에게 내밀었다.
“토일 님께서 주신 경비입니다. 말이 필요할 겁니다.”
“아주 철저하군.”
마크가 쓴웃음을 지으며 카일이 내민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그럼 카데인 협곡은 혼자 정찰할 생각이냐?”
“단독정찰이야 늘 하던 일인걸요.”
카일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위험 지역은 대부분 지나쳤으니 길만 따라가면 저녁쯤엔 남작령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날이 밝아오면서 안개가 걷히자 남작령으로 향하는 길이 서서히 드러났다.
“흠… 알겠다. 그럼 여기서 이만 헤어지자!”
“백작령에서 다시 뵙죠.”
“조심해라! 정 위험하다 싶으면 도망쳐, 괜히 죽기 살기로 싸우지 말고.”
비터가 제법 진중하게 말하자 마크도 고개를 끄덕였다.
“비터의 말이 맞다. 비록 용병이 검을 판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골드보다 목숨이 중하진 않다. 명심해라!”
“네! 걱정 마세요. 위험하다 싶으면 잽싸게 도망치죠.”
카일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비터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갑자기 카일이 비터의 팔을 잡았다.
“잠시만 누군가 옵니다.”
카일의 말에 비터와 마크가 황급히 몸을 숙인 채 사방을 경계했다.
“어디냐?”
“남작령 쪽입니다.”
마크와 비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카일이 가리킨 방향으로 향했다.
“저건… 다핸 남작의 깃발인데?”
마크의 말대로 다핸 남작가를 상징하는 커다란 인장기와 함께 다수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다핸 남작과 켈토 기사단장입니다.”
“켈토 기사단장이면… 남부 최강이라는…!”
마크와 비터가 눈을 빛내며 켈토 단장을 확인하기 고개를 내밀었다. 두 사람에게 중급 엑스퍼트 끝자락에 있다는 켈토 단장의 얼굴을 먼발치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얼굴엔 기쁨이 가득했다.
“네, 맞습니다.”
“이럴 수가… 내가 켈토 경을 직접 볼 수 있다니!”
“역시 보통 기사와는 확연히 다르군.”
연신 감탄을 터트리며 찬양을 쏟아내는 두 사람의 모습을 잠시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보던 카일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소드 엑스퍼트도 만나기 힘든 용병 세계에서 중급, 그것도 상급 엑스퍼트를 목전에 둔 켈토 단장을 봤으니 두 사람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곧 두 사람이 직접 만나게 될 보일이 상급 엑스퍼트란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물론 귀찮은 걸 싫어하는 보일이 두 사람에게 제 경지를 밝히진 않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딜 저렇게 가는 걸까요?”
“몬스터를 소탕하려는 것 아닐까? 저 정도 전력이면 기사단 전체를 끌고 나온 것 같은데? 군데군데 남작령에 머무는 귀족들까지 대거 이끌고 나온 걸 보면….”
“글쎄? 몬스터 토벌로 보기엔 너무 여유로워 보이는데? 더구나 영주까지 위험한 전투에 참가한다는 건….”
마크의 말대로 코트형 레더 아머 위로 화려한 방어구를 찬 다핸 남작과 켈토 기사단장의 모습에선 어떤 긴장감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일행 전체에서 활기까지 느껴졌다.
“몬스터 토벌이 아니라 사냥을 가는 겁니다.”
상황을 묵묵히 주시하던 카일이 말했다.
“사냥?”
“후위를 보십시오. 여인들이 탄 마차에 하녀와 하인까지, 분명 사냥을 가는 겁니다. 이곳 근처에 영주의 사냥터가 있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맞다. 그러고 보니 영주가 곧 사냥을 갈 거라 마 시장 상인이 말했다. 아마도 오늘인가 본데?”
“그럼 다핸 남작은 아직 길이 막힌 사실을 모르겠군.”
“그럴 겁니다. 알았다면 사냥을 뒤로 미루고 대책으로 세웠을 겁니다.”
“가서 알려야 하는 것 아닐까? 습격이라도 받으면 자칫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
“어제 상단이 습격받은 곳은 사냥터와는 상당히 떨어진 곳입니다. 저 정도 규모와 전력이면 다가오던 몬스터들도 알아서 피할 겁니다.”
“차라리 곧장 달려가서 영주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어떨까?”
“지난번 말씀드린 것처럼 오히려 다핸 남작은 아일론 상회의 발만 묶어 놓을 겁니다. 상단주가 바라는 일이 아닐 겁니다.”
“흠… 결국 계획대로 할 수밖에는 없겠군.”
마크가 아쉬운 듯 멀어져 가는 다핸 남작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남작의 행렬은 카일의 예상대로 방향을 틀어 사냥터로 향했다. 마크와 비터는 남작의 행렬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카일과 함께 숲에서 걸어 나왔다.
“이만 가보겠다.”
“다녀오십시오.”
“조심해라!”
마크와 비터가 카일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을 고한 뒤 곧장 다핸 남작령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카일도 곧장 방향을 틀어 숲속으로 사라졌다.
* * *
“무슨 일이냐?”
높은 절벽 위 위태롭게 올라선 채 안개에 뒤덮인 카데인 협곡을 내려다보던 복면 사내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변수가 생겼습니다.”
“변수?”
갑작스러운 변수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사내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다핸 남작령에서 대규모 병력이 성을 빠져나왔습니다. 다핸 남작과 켈토 기사단장을 필두로 기사단 전체가 움직였습니다.”
“설마, 놈들이 도움을 청한 것인가?”
“아닙니다. 행렬에 소 영주와 영애는 물론 남작령의 귀부인들도 참여한 것으로 보아 사냥을 나선 것 같습니다.”
“사냥…?”
“그렇습니다. 해서 남작령 길목에 배치된 아이들에 대한 철수 요청입니다.”
“켈토 단장 때문인가?”
“상급에 근접한 기사입니다. 자칫 충돌이라도 벌어지면 저희 쪽도 피해가 생길 겁니다. 그럼….”
“우리의 존재가 드러날 수도 있겠군.
“그렇습니다.”
아무리 오지의 남작가라고 해도 타 영지에 허락도 없이 은밀히 병력을 보낸 게 드러난다면 영지 간의 충돌과 같은 큰 문제로 번질 수 있었다. 더구나 신분을 철저하게 은폐해야 하는 그들로서는 더더욱 외부의 시선을 피해야 했다.
“어쩔 수 없군. 은밀히 빠져나와 본대와 합류하라 전하게.”
“네!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다른 소식은 없나?”
“송구합니다만, 안개가 짙어 수색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날이 밝기 전엔 제대로 된 수색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흠… 작업은 어찌 되어가나?”
보고가 이어질수록 계획했던 일들이 조금씩 엇나가자 복면 사내의 음성은 점점 싸늘해졌다. 보고를 전하는 사내도 자신의 잘못인 양 목소리가 점점 딱딱하게 굳었다.
“작업 대부분이 끝났습니다. 마무리 작업만이 남았습니다.”
“이번 작전, 실수는… 용납할 수 없다.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절대 실수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확신에선 사내의 말투에 대 궁을 비끄러맨 복면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태양 빛을 받아 점점 옅어져 가는 안개를 바라보았다.
* * *
어그적, 어그적-
트롤 세 마리가 죽은 오크의 사체를 씹으며 마치 이곳 주인은 자신임을 강조하려는 듯 거대한 클럽을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어슬렁거렸다. 거대한 클럽 여기저기 묻어있는 몬스터의 선혈과 살점들이 늦은 밤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능히 짐작하게 했다.
“트롤까지 나타났군.”
카일은 마크와 비터 두 사람과 헤어진 이후 곧장 카세인 협곡 대신 상단이 습격당했던 장소로 달려왔다. 예상했던 대로 진득한 피 냄새를 맡은 각종 몬스터들이 몰려들면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특히 최상의 포식자 중 하나인 트롤이 세 마리나 몰려온 건 카일로서도 의외의 상황이었다.
“보아하니 당분간은 여기 죽치고 있을 것 같은데….”
자세히 주변을 돌아보던 카일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제 보니 트롤 한 마리가 더 있었다. 크기는 고작해야 평범한 사람 정도. 어린 트롤이 분명했다. 녀석은 죽은 오크의 뱃속에 고개를 처박고 열심히 내장을 파먹는 중이었다.
어린 새끼까지 끌고 왔다는 건 먹이가 떨어질 때까지 당분간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죽치고 있겠다는 뜻이었다.
“하긴 겨울이니 먹을 걸 찾으러 돌아다니는 것보다 여길 지키는 게 낫겠지.”
오크 사체가 사방에 널려있었다. 더불어 사체를 노리고 몰려드는 몬스터도 적지 않으니 트롤에게 이곳은 식량창고나 마찬가지다. 다른 포식자가 접근하지 않는 이상 트롤이 떠날 이유가 없었다.
“흠….”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고심하던 카일이 선혈이 지저분하게 묻은 어린 트롤을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낮게 중얼거린 카일이 트롤의 시선을 피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카일이 향한 곳은 그리미엄 자작가의 마차가 버려진 곳. 아마도 그곳 역시 적지 않은 몬스터들이 몰려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