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27화 (327/404)

외전 - 61. 카세인 협곡(4)

뿌연 안개가 협곡을 가득 메운 이른 아침.

자리에서 일어난 카일이 가방에서 큼직한 육포 한 조각을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곤 재만 남은 모닥불을 뒤져 어제저녁 불길 속에 넣어둔 화살촉을 꺼냈다. 화살촉에 남은 부스러기들을 불 속에 넣어 태워 버린 것이다. 카일은 재 속에서 작은 불씨를 살려 모닥불을 다시 피운 뒤 새벽안개에 젖은 나무를 불길에 말렸다.

“일찍 일어났구나!”

마크가 흠뻑 젖은 피풍의를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할 일이 좀 있어서요.”

“할 일?”

마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카일의 손에 들린 화살촉으로 향했다.

“화살을 만들고 있었구나.”

“네, 활대에 화살촉만 연결하면 금방 끝날 겁니다.”

카일은 가방에서 놋쇠로 만든 작은 합을 꺼내 모닥불 옆에 내려놓았다.

“그건 뭐냐?”

딱딱한 검은 덩어리가 가득 담긴 놋쇠 합을 보며 마크가 물었다.

“블루우드 수액과 오크 가죽을 끓여 만든 아교풀입니다. 활대와 화살을 붙이기에 좋죠.”

“이런 것도 가지고 다니는 거냐?”

“단독정찰을 나가면 작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십여 일씩 오크랜드를 돌아다녀야 하는데, 그때마다 필요한 것들을 모두 가지고 다닐 수는 없거든요. 그때그때 만들어 써야지요.”

대수롭지 않게 답한 카일이 가방 옆에 꽂아둔 화살대를 꺼냈다. 오크 피를 잔뜩 먹은 화살대는 검녹빛 음울한 광택을 뿜어내고 있었다. 단검으로 화살촉이 들어갈 앞부분을 다듬어낸 카일이 뜨거운 불길에 적당히 녹은 아교를 바른 뒤 화살촉을 고정시켰다. 얼마나 능숙한지 순식간에 열 대가 넘는 화살이 만들어졌다. 카일은 대충 주변을 정리한 후 새로 만든 화살과 남아있던 화살을 한데 묶더니 허리 쪽에 매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려고?”

“주변을 한번 돌아볼 생각입니다. 놈들이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니 미리 주변을 확인해 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안개가 짙게 꼈다. 놈이 있다 해도 발견하긴 쉽지 않을 거다.”

“그건 녀석들도 마찬가지죠.”

“응?”

“우리가 놈들을 발견할 수 없는 것처럼 안개는 적으로부터 우릴 보호해 줄 거예요.”

적들이 얼마나 많은 병력을 동원해 아일론 상회를 찾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곳곳에 매복한 적들이 아일론 상회가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다. 그러니 계곡을 빠져나가는 것부터 신중할 수밖에는 없었다.

“확실히 그것도 그렇구나.”

마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려놓았던 검을 챙겼다.

“좋다. 그럼 나도 함께 가겠다.”

“마크 님도요?”

카인의 물음에 마크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제 그만 ‘님’자를 빼고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느냐?”

“네?”

“용병은 실력이 곧 서열이다. 아직 용병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도 생사를 함께한 동료라면 이제 편하게 부를 만도 하잖아?”

“그건….”

“아함~. 그건 마크 말이맞다. 계속 함께 있을 텐데 이젠 좀 편해져야지.”

비터가 크게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마크가 일어날 때쯤? 아직 쌀쌀해서 그냥 좀 누워있었다.”

비터가 잘 마른 장작 하나를 모닥불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나저나 먹을 건 없냐? 정찰을 나가더라도 배는 채워야지.”

“비터… 도 함께 가려고요.”

“큭, 그럼 날 놓고 둘만 갈 생각이었냐?”

카일의 어색한 말투에 비터는 물론 마크까지 웃음을 지었다.

“육포예요.”

카일이 가방에서 꺼낸 육포 주머니를 내밀었다.

“스프에 넣었던 그거냐?”

“네! 허기 정도는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비터가 가장 먼저 주머니에서 커다란 육포 조각을 꺼내 입안으로 밀어 넣고는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달큰한 육향에 부드러운 육질, 적당히 간까지. 비터와 마크 두 사람 모두 육포의 맛에 흠뻑 취한 듯 보였다.

“와! 이런 육포는 처음이다. 어제 먹었던 스프와는 차원이 다른데?”

“맞다. 정말 잘 만들었다. 정말 직접 만든 거냐?”

“당연히 다르죠. 이건 외부에선 구하기 힘든 야생들소 고기로 만들었으니까요.”

“들소? 샤론 마을에 들소가 산다고?”

“정확힌 샤론 마을이 아니라 오크랜드에 들소가 살죠. 그것도 숫자로 셀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수가 말이죠.”

“그게 정말이냐!”

“오크랜드엔 수만 마리의 오크들이 살고 있지만, 그보다 수백 배는 많은 들소들이 평원에서 살아가죠.”

“녀석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유가 있었군. 이렇게 맛있는 들소가 있으니 나올 필요도 없겠지.”

비터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육포를 씹었다.

‘트롤이 먹던 걸 빼앗아 만든 거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들소는 주로 평원 중앙에서 풀을 따라 동서로 이동한다. 때문에, 수많은 오크 부족과 몬스터를 뚫고 들소를 사냥하러 평원 중앙으로 향하는 것은 미친 짓에 가깝다. 설령 평원 중앙에서 들소를 사냥한다고 해도 수십 톤에 달하는 들소를 가지고 마을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트롤이란 녀석은 먹고 남은 먹이를 자신의 둥지로 가져오는 습성이 있는데, 이때를 노려 녀석에게서 반쯤 뜯긴 들소를 빼앗아 만든 것이 바로 이 육포다. 물론 녀석이 먹지 않은 온전한 부위만 이용해 만들지만, 처음 보일이 트롤에게서 고깃덩이를 빼앗아 왔을 때까지만 해도 카일 역시 전혀 먹지 못했다. 물론 지금은 없어서 못 먹을 정도지만 말이다.

카일은 얼굴 가득 미소가 번진 마크가 비터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짓더니 가방을 적당한 곳에 숨겼다.

“그럼 가볼까요.”

카일이 먼저 언덕을 아래로 내려가자 마크가 그 뒤를 따랐다.

“이런 젠장! 그냥 가면 어떻게 해!”

비터가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급히 모닥불을 끄곤 검과 피풍의를 챙겨 허겁지겁 마크의 뒤를 쫓았다. 안개를 헤치며 아래로 내려오자 의외로 마차 주변으로 불을 밝힌 일꾼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일꾼들도 일찍 일어났군요. 설마 일정이 당겨진 걸까요?“

“그런 일이 있었다면 분명 우리에게도 알려줬을 거다. 말이 없는 걸 보니 일정이 당겨진 건 아닌 것 같은데?”

“알단 코퍼 대장부터 찾아보죠.”

“아무래도 그래야겠군. 어디 보자…. 4번 마차에 아덱과 버크가 실려있으니 아마 대장도 그곳에 있던가, 적어도 대장이 어디로 갔는진 알 거다.”

비터가 마차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황급히 한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비터?”

“여어! 상처가 벌써 나은 거냐? 벌써 걸어 다니네?”

“말도 마라! 어제 대장이 마법사의 포션을 억지로 내게 먹였다.”

“뭐! 그… 미치광이 포션 말이냐!”

아덱이 씁쓸하게 말하자 비터가 깜짝 놀라 외쳤다.

“마법사의 포션이 뭔데 저렇게 놀라는 겁니까?”

카일이 마크를 향해 물었다.

“마법사, 정확히는 흑마법을 이용한 포션을 말하는 거다.”

“흑마법!”

“그래, 암흑 마법처럼 마왕을 섬기지는 않지만, 잔혹하고 악독한 실험을 통해 마법을 수련하는 자들이다. 그들에게서 오래전 신전의 전유물이라고만 생각했던 포션 레시피가 세상에 전해졌다.”

마법사의 포션은 상급 포션에 버금가는 치료력을 가졌기에, 과거 고위 귀족가문은 물론 중소 귀족들까지 마법사의 포션 레시피를 차지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레시피는 결국 대중에게 알려졌고, 곧 이 포션의 치명적인 단점 역시 알려졌다.

바로, 포션을 사용한 후 엄청난 고통이 뒤따른다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치료를 위해 마신 포션의 고통을 참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들이 나올 정도였다. 결국 귀족가문들은 포션을 포기했지만, 의외로 널리 이용된 곳이 있으니 바로 용병 세계다. 낮은 가격임에도 치료력이 뛰어나니 용병들이 고통을 참으며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마법사의 포션도 여러 번 계량을 거치게 되었지만, 여전히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다. 덕분에 용병들은 이 포션을 미치광이 포션이라 불렀다.

“차리리 마취를 시키면 될 텐데….”

“뭐라 했나?”

“아닙니다. 그냥 혼잣말입니다. 그럼 이제 아덱은 괜찮은 겁니까?”

“고통 때문에 후유증이 따르겠지만 상처는 치료됐을 거다.”

비터와 이야기를 마친 아덱이 비틀거리며 마차로 오르는 모습을 마크와 카일이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아덱이 마차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비터가 돌아와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아덱 말로는 오늘 하루 여기서 더 머문다고 하더군. 코퍼 대장이 조금 전에 상단주님을 급히 찾아갔다는데, 아무래도 갑자기 결정됐나 봐.”

“이야기를 전해 들으셨나 보네. 아무튼 그래도 결정 하나는 빨라서 좋군.”

“이대로 카세인 협곡으로 들어가는 건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최소한의 안전조치가 필요했을 겁니다.”

카일의 말에 마크와 비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찰은 어쩔 생각이냐? 출발이 늦어졌으니 굳이 지금 나갈 필요는 없을 듯 보이는데?”

“아닙니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바깥 상황을 더 확실하게 알아야겠죠.”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때 안개를 헤치며 코퍼와 함께 토일이 걸어 나왔다.

“자네들을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때마침 와주었군.”

“저희를요?”

“아일론 상회는 오늘 하루 동안 마차를 보강할 생각이네, 그동안 자네들은 카세인 협곡 일대를 정찰하며 적들의 위치와 협곡 일대의 지형을 파악해주게.”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죠.”

“그전에 카일, 자넨 나와 잠시 이야기를 했으면 하는데?”

“저와요?”

토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카일을 이끌고 사람들과 멀어져 안갯속으로 향했다.

“자네에게 부탁이 있어 따로 불렀네.”

“무슨 부탁인가요?”

“어제 저녁 헬레나 영애로부터 요청이 있었네, 곧 다가올 공녀의 탄신일에 맞춰 선물할 찻잔 세트를 만들어 달라고 말이야.”

“도자기를 만들어 달라는 말씀입니까?”

“그렇네, 기간은 앞으로 한 달 하고 열흘 정도 남았네.”

“흠…. 제가 마을로 돌아가길 바라시는 겁니까?”

토일의 제안을 받아 도자기를 만들려면 다시 샤론 마을로 돌아가야 했다. 도자기의 제작에 필수적인 고령토와 가마까지 모두 마을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일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반대일세, 우리 아일론 상회는 자네가 백작령에 도자기를 생산할 시설을 만들어주길 바라네.”

“그건… 솔직히 생산시설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자기를 만들려면 특별한 재료가 필요합니다. 그건 아직까지 샤론 마을, 정확히는 오크 랜드에서 밖에는 찾지 못했습니다.”

“재료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찻잔 세트와 시설만 만들어주게, 자금은 우리 아일론 상회에서 모두 부담하지.”

“그건….”

“어떤가? 할 수 있겠나?”

“한 달이라면… 빠듯하긴 하지만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찻잔 세트 정도면 마을로 사람을 보내 재료를 가져올 수도 있고요.”

“하하!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카일의 긍정적인 대답에 토일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런데… 이렇게 촉박하게 일을 진행할 이유가 있습니까? 선물이야 다음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몰라서 하는 소리, 공녀의 탄신일이면 고위 귀족은 몰론 왕실 사람들까지 참여하는 대규모 파티라네, 그곳에서 도자기가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생각해보게!”

“그런 게 중요합니까?”

“쯧, 아직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군.”

“그건….”

카일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카일은 토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물건에도 신분이 있다면 믿겠나?”

“네?”

“물건은 말이야, 누가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네. 처음 누가 사용했는지에 따라 그 가치와 신분이 결정된다네!”

“….”

“한 번 생각해보게, 왕이 사용할 물건이 평범한 물건일까?”

“모르긴 해도 최상의 물건을 쓰겠죠.”

“맞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럼 그 물건을 과연 평민들이 쓸 수 있을까?”

“아마도… 어렵겠죠.”

“맞아! 귀족이 아니라면 어렵지, 특히 사치품의 경우엔 더더욱 그렇지! 도자기도 마찬가지야! 처음 세상에 공개된 도자기의 주인이 바로 트라발트 공녀야! 최상위 귀족이 받은 선물이지.”

“도자기는 귀족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으로 인식이 되겠군요.”

“아니! 인식이 아니라 그렇게 할 생각이네, 도자기는 앞으로 귀족들에게만 비싼 값에 팔 생각이니 말이야.”

토일이 카일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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