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26화 (326/404)

외전 - 60. 카세인 협곡(3)

“아!”

마티슨이 그때서야 헬레나 영애의 반응을 이해했는지 미소를 지었다.

귀족들은 평민과는 달리 식사 예절을 대단히 중시했다. 특히나 고위 귀족으로 갈수록 더 다양하고 풍성한 음식을 접하기에 사용하는 식기와 그 재질이 달랐다. 특히 티 타임과 함께 사교를 즐기는 귀족들 사이에서는 찻잔이 권위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는데, 귀금속은 물론 보석까지 장식으로 사용되어 찻잔은 더더욱 화려해졌다. 하지만 금이나 은과 같은 귀금속은 열을 쉽게 전달하기 때문에 뜨거운 찻잔을 들려면 손잡이는 필수였다. 헬레나로선 손잡이가 없는 매끈한 찻잔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들어 올리는 마티슨의 모습이 오히려 신기했다.

“이거… 영애께 미리 말씀을 드리지 않았군요. 앞서 보셨던 식기와 마찬가지로 이 찻잔은 이번에 상단에서 아주 어렵게 구한 도자기란 물건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금속제 찻잔과는 달리 손잡이 없이도 이렇게 차를 마실 수가 있답니다.”

헬레나는 물론 유모인 메아린과 기사 도테트도 마티슨을 따라 작은 접시와 함께 찻잔을 들어 올렸다. 살짝 뜨거운 감은 있었지만, 싸늘해진 기온 탓에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타고 따뜻한 기운이 전해지며 그녀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렸다.

“신기하군요. 마치 단단하고 부드러운 조개껍데기 같아요.”

“단단한 조개껍데기라면 포세리나 말씀이군요.”

“어머, 마티슨 님께선 고대어도 알고 계신가요?”

“하하, 오래전 잠시 배운 적이 있긴 합니다만, 많이 알진 못한답니다. 오히려 헬레나 영애께서 고대어에 능통하시군요. 단번에 포세리나를 알아보시고.”

“오래전 고대어가 적힌 책을 본 적이 있어….”

“그렇군요.”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헬레나의 표정에 마티슨의 눈에 잠시 이채가 어렸다. 고대어는 단지 책을 본 것만으로 쉽게 단어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었다. 그런데 헬레나는 마티슨이 내뱉은 고대어를 단번에 알아들었다. 장시간 고대어를 집중적으로 익혔다는 뜻이다. 그것도 처음 본 자신에게도 숨길만큼 비밀리에 말이다.

수많은 추측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상념들을 날려버렸다. 귀족, 그중에서도 권력을 쥔 고위 귀족에 대한 괜한 호기심은 생명을 단축시키기 마련이었다.

“아!”

때마침 들려온 짧은 감탄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유모인 메아린에게로 향했다.

“…정말, 좋군요.”

눈을 감고 차향을 깊이 음미하는 메아린의 모습에 헬레나와 도테트도 천천히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어떻게 이렇게 다르죠?”

헬레나가 놀란 얼굴로 찻잔을 바라보았다.

차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스며들 듯 퍼져나갔다. 항상 마시던 차였고, 차를 끓인 사람도 유모였다. 바뀐 거라곤 고작해야 새하얀 도자기 찻잔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항상 마시던 차 맛이 오늘은 달랐다. 더 깊고 진한 차향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기분 탓일까?’

어쩌면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차가운 겨울밤, 야외에서 마신 따뜻한 차 한잔으로 어느새 마음에 여유가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온도 때문이에요.”

메아린이 부드럽게 찻잔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차는 온도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져요. 뜨거우면 깊고 진한 맛이, 차가우면 단맛과 향이 살아나기 때문에 차 맛을 유지하려면 적정한 온도 유지는 필수죠.”

“그건 저도 알고 있지만, 그것과 도자기 찻잔이 무슨 상관이죠?”

“금제나 은제 찻잔과 달리, 이 찻잔은 쉽게 차가 식지 않아 처음 찻물을 내릴 때의 맛과 향이 끝까지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 같아요. 덕분에 깊고 진한 차 맛을 끝까지 느낄 수 있게 되는 거랍니다.”

“아! 그래서 맛과 향이 평소와 달랐군요.”

헬레나의 말에 메아린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유모분께서 차에 대한 조예가 상당히 깊으셨군요.”

“과찬입니다. 그저 차를 좋아해 조금 알고 있을 뿐이랍니다.”

“조금이라뇨! 유모께서 내린 차는 트라발트 공작께서 직접 칭찬하실 정도로 대단히 뛰어난걸요.”

“트라발트 공작가…!”

마티슨의 놀란 얼굴에 유모인 메아린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트라발트 공작 영애와 친분이 두터우셔서 종종 찾아뵙고 티타임을 즐기기도 한답니다.”

“그러시군요.”

“사실 이번 여행도 곧 있을 트라발트 공작 영애의 탄신일에 맞춰 출발한 길이랍니다.”

“그러고 보니 곧 공녀의 탄신일이군요.”

트라발트 공작은 중부의 맹주이자 왕국에 단 하나뿐인 공작으로, 사실상 귀족파의 수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마침 잘됐군요. 아가씨, 이 도자기로 만든 찻잔, 영애께 탄신 선물로 드리는 건 어떨까요.”

유모의 말에 헬레나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맞아! 그러면 되겠군요. 공녀의 취미 중 하나가 찻잔 수집이니…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자, 잠시만, 지금 트라발트 공녀께… 도자기를 선물하시겠다는 겁니까?”

마티슨이 깜짝 놀라 물었다. 트라발트가는 명실상부한 귀족 최고의 가문이다. 당연히 공녀의 일상 하나하나가 영애나 귀부인에겐 관심의 대상일 수밖에는 없었다. 심지어는 그녀가 사용한 작은 물건까지도 다음 날 품절이 될 정도이니 그녀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상단주인 마티슨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트라발트 공녀의 탄신일에 맞춰 대형 상단들은 최대한 심혈을 기울여 최상의 선물을 보내곤 했다.

“맞아요. 영애의 취미는 다기를 포함한 각종 식기를 수집하는 거죠. 따로 갤러리까지 만들 정도라서, 아마도 이 도자기란 물건을 만나면 분명 아주 좋아할 거예요.”

“공녀께 그런 취미가 있다니… 처음 알았습니다.”

“당연하죠. 선물만으로 갤러리를 채울 수는 없잖아요.”

“아!”

공녀의 취미가 식기와 찻잔 수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하루가 멀다고 각종 식기들이 공작가로 향할 것이다.

“그럼 공녀께 드릴 찻잔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혹 공녀의 탄신일이 언제쯤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도자기란 물건을 만들려면 특수한 재료가 필요해서, 새롭게 만들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흠…. 공녀의 탄신일은 한 달하고 십여 일 정도 남았어요. 저흰 왕성에 머물며 선물을 준비한 뒤 공작령으로 향할 생각이라 여유 있게 왔지만, 도자기를 선물하기로 한 이상 왕성엔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그럼 백작성에 도착하고도 대략 한 달 정도 시간이 있단 말이군요.”

“맞아요. 가능하겠습니까?”

“며칠 내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중요한 일이니 신중하게 결정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꼭 부탁드리겠어요. 사례는 충분히 하겠어요.”

“사례라니요. 아닙니다. 공녀께 진상할 수 있는 것만으로 저희 아일론 상회로선 큰 영광입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이건 제가 영애께 드리는 선물인걸요. 아일론 상회가 사례를 받지 않으면 그건 제 선물이 아니잖아요.”

“그건….”

헬레나의 단호한 말에 마티슨이 난처한 표정을 짓자,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도테트가 입을 열었다.

“그리 부담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영주님께서도 따로 고마움을 표현하시겠지만, 아가씨 역시 마티슨 님께 작은 성의를 표하고 싶은 것뿐이니까요.”

“맞아요. 직접 도움을 받은 제가 먼저 성의를 표하는 건 당연하죠.”

“그렇게 말씀하시니…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죠.”

“고마워요. 마티슨 님.”

“무슨 말씀을, 오히려 감사를 표해야 할 사람은 저입니다. 영애, 제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티슨이 환하게 웃었다. 이후 대화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어졌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이야기를 마칠 수 있었다. 헬레나 영애와 유모인 메아인에게 마차를 양보한 마티슨은 일꾼들이 미리 세워 놓은 작은 천막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때, 토일이 찾아와 마티슨을 불렀다.

“마티슨 님!”

“무슨 일인가? 피곤하니 급한 일이 아니라면 내일 알려주지 않겠나?”

“시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급한 일?”

마티슨이 천막을 걷었다.

“일단 들어오게.”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인 토일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간이 침대에 앉은 마티슨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이제 말해 보겠나?”

토일은 잠시 카일에게 들었던 내용들을 다시 한번 정리한 뒤 마티슨에게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게 사실인가?”

토일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마티슨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긴 했지만, 전혀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토일의 이야기가 끝났을 땐 깊은 한숨까지 쉬며 이마에 손을 올렸다.

“짐작… 하셨습니까?”

마티슨의 표정에 되려 토일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짐작보다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네.”

“어떻게….”

“상인은 어떤 순간에도 이익을 포기하지 않아. 당장 마차에 실린 가죽과 부산물만 확보해도 적지 않게 이득을 얻을 수 있네. 나라면 차라리 용병을 고용해 물건을 강탈했을 거야! 그것만으로 아일론 상회에겐 치명타를 입히면서 동시에 강탈한 물건으로 이익까지 챙길 수 있는데, 마법으로 오크를 불러들여 상단 전체를 몰살시킨다? 상인이 계획하기엔 비효율적이지, 골드도 적지 않게 들고.”

“거기까진 생각해 보진 못했습니다.”

“나 역시 하나의 가능성만 생각해 본 거야! 어쨌든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겠군.”

“공격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추측이긴 하지만 당시 카일에게 공격받은 자의 신분이 높은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가 만약 죽기라도 했다면….”

“오히려 상황이 복잡해지지 않을지 걱정이군.”

“네?”

“생각해 보게. 상대가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면, 어쩌면 복수를 위해서라도 우릴 전력을 다해 죽이려 하지 않겠나?”

“그건….”

토일이 당황한 얼굴로 마티슨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카일, 그 녀석의 판단이 정확할 거다. 귀족, 특히나 후계자간 권력 싸움이라면 일단 칼을 빼든 이상 절대 이대로 물러나진 않을 거다. 어찌 되었든 끝장을 보려 하겠지.”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토일의 물음에 마티슨이 잠시 고심하더니 이내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조금 전 헬레나 영애로부터 한 가지 의뢰를 받았네.”

“의뢰요?”

“트라발트 공녀의 탄신일에 선물할 도자기 찻잔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였네.”

“트라발트 공녀!”

마티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미엄 자작을 만나는 것보다 어쩌면 트라발트 공녀에게 도자기 찻잔을 진상하는 게 우리 아일론 상회가 도약할 더 큰 기회가 될 수도 있네. 이 기회를 난 놓치고 싶지 않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토일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우리도 이대로 당할 수는 없으니 대비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음,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네.”

“지금 필요한 건 시간입니다. 하루만 시간을 주십시오.”

“좋네, 내일 하루 이곳에서 더 머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마티슨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런데 자작 영애에겐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흠…. 영애에게 직접 말할 수는…. 아무래도 도테트 경에게 말해놓는 게 좋겠군.”

“아! 도테트 경이 계셨군요.”

“경에게는 내가 이야기를 하지.”

“알겠습니다.”

토일이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천막에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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