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59. 카세인 협곡(2)
“맞습니다. 새로운 적이 나타났습니다.”
카일이 검은 화살 하나를 토일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
“그리미엄 자작가를 만나기 전 마주친 자들이 절 공격하며 사용한 화살입니다. 보면 아시겠지만, 일반적인 화살이 아닐 겁니다.”
“공격을 받았단 말인가? 도대체 누가!”
토일이 깜짝 놀라 화살을 살폈다. 그리미엄 자작가를 만나기 전 공격을 받았다면 브린의 배신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설마 이번 일, 상단이 아니라 그리미엄 자작가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건가?”
코퍼가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상단과의 분쟁이 아니라 귀족간 분쟁이라면 이번 한 번의 공격으로 전투가 끝났다고 보긴 어려웠다.
“절 공격한 자들은 궁술이 대단한 자였습니다. 상단이 목표였다면 원거리 저격만 했어도 목적을 달성했을 겁니다.”
“그럼 그리미엄 자작가를 노렸다는 말인데, 왜 영애를 직접 공격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자네 말대로 원거리 저격만 했어도 그리미엄 자작의 병력은 쉽게 무너졌을 텐데?”
“화살이나 마법을 사용했다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을 테니까요.”
“흔적이 남아선 안 됐다는 말이군.”
카일의 말에 토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누군가 자작가를 돕는 건 철저히 차단했단 말인데….”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더불어 영애의 죽음을 확인하고 싶은 누군가가 직접 왔겠죠.”
“하지만 계획은 실패했지,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 때문에.”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코퍼와 토일이 모닥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사이, 비터와 마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이야길 한 거냐?”
마크가 카일의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두 분에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일단 앉으시죠.”
비터에게서 솥을 받아든 카일이 다시 물을 붓고 모닥불 위에 올렸다. 무거운 침묵 속에 물이 끓어오르며 뜨거운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카일은 작은 주머니에서 이름 모를 잎사귀를 꺼내 솥에 풀었다.
“오크랜드에서만 자생하는 야생차입니다.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혀 줄 겁니다.”
카일이 그릇에 차를 가득 담아 내밀었다.
“이거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해 보이는데?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일이 있는 거냐?”
“상황이 좀 달라졌습니다.”
카일은 그동안 토일과 코퍼에게 했던 이야기를 간략하게 다시 두 사람에게 말해 주었다.
“그러니까… 이번 일이 상단간 분쟁이 아니라 귀족들 사이의 권력 다툼 때문이란 말이냐?”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후계자 다툼이라 생각합니다.”
“후계자 다툼?”
“헬레나 영애는 그리미엄 자작의 유일한 혈육이자 후계자입니다. 그녀가 죽으면 누군가 얻을 수 있는 반대급부가 있겠죠.”
카일의 말에 토일이 고개를 저었다.
“대외적으론 그렇게 알고들 있지만, 아직 정해진 건 아니다. 만약 헬레나 영애가 소영주였다면 소영주 직속 기사단이 호위를 맡았을 거다.”
“그럼 아직은 명확하게 헬레나 영애가 후계자가 된 건 아니란 말이군요.”
“그래, 자작가의 원로들과 가신들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니 자작도 후계자 선정을 미루고 있다. 딴엔 아직 자작이나 자작부인이 젊은 데다가 새로 사내아이를 낳을 수 있다지만, 내심으론 전대 소영주의 딸인 베아트리 영애를 밀고 있지.”
“제가 알기론 영주라면 정략결혼을 통해 두 번째 부인을 얻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가신들도 베아트리 영애보다는 새로운 자작부인에게서 얻은 자식을 지지하겠지만, 자작이 거부했다. 현 자작부인과의 관계가 워낙 좋을 뿐 아니라 영애의 외할아버지인 바르칼 경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 강요할 수는 없었겠지.”
“그럼 더더욱 이해가 안 되는군요. 바이칼 경의 영향력이 그렇게 강하다면 자작도 가신들의 눈치를 살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바이칼 경이 나서면 쉽게 해결될 것 같은데요.”
“그건 그렇지가 않다. 후계자 선정에 외부인인 바이칼 경이 나서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당장 베아트리 영애의 외가인 파르셀 자작가도 후계자 선정에 압력을 행사할 텐데, 가신들과 자작 모두 그것만은 피하고 싶겠지.”
파르셀 자작가는 서북부에 자리한 중급 규모의 기사 가문으로, 제법 탄탄한 기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만약 파르셀 자작가가 적극 개입하면 사실상 내전으로 치 닫을 수밖에는 없었다.
“파르셀 자작가의 전대 가주와는 달리 현 가주는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베아트리 영애를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는 인물이다. 당연히 가신들도 그를 견제할 수밖에.”
“그럼 더더욱 후계자 선정이 끝나기 전 헬레나 영애가 사라져 주는 게 가신들이나 베아트리영애가 원하는 가장 좋은 상황이겠군요.”
“만약, 네 예상대로 가신들이나 베아트리 영애가 관련되어 있다면, 당연히 그렇겠지.”
토일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럼 아직 공격이 끝나지 않았단 말이군.”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흠…. 만약 기사단이라도 나타나면 현 인원만으론 막아내기가 쉽지 않을 거다. 아무리 기계식 석궁이 있어도, 기사단을 상대로는 힘들다. 특히나 카세인 협곡은 좁은 협곡이 길게 이어진 곳이다. 매복이나 습격하기에 더없이 좋은 지형이라… 큰일이군.”
토일의 말대로 상단에 남은 용병은 고작해야 열 명을 겨우 넘겼다. 그중 셋은 하급 용병, 기사단이 공격이라도 해오면 가장 먼저 희생될 수밖에는 없었다. 더구나 카세인 협곡은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않아 인적이 드문 곳이다. 일단 협곡 안으로 들어만 간다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상단과 영애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아마도 기사단을 쉽게 파견하진 못할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기사단을 파견할 수 없다니?”
“절 공격했던 화살의 주인이 만약 살아 있다면, 기사단으론 상단에 접근하기 힘들단 사실을 알 테니까요.”
“살아… 있다면?”
“제가 쏜 화살을 맞았습니다. 살짝 빗나가긴 했지만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겁니다.”
“아!”
코퍼가 카일의 말에 낮은 탄성을 터트렸다. 화살 하나로 검은 오크를 쓰러트리던 카일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기사단만 오지 않는다면 걱정할 건 없겠군.”
토일의 얼굴이 다소 밝아졌다. 기사단만 없다면 강력한 기계식 석궁으로 몬스터를 처단하며 협곡을 통과할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걱정스러운 게 있습니다.”
“걱정?”
“일전에 그리미엄 자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지 않았습니까?”
카일의 시선이 비터에게로 향했다.
“내가?”
사람들이 시선이 일제히 자신에게 향하자, 비터가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리미엄 자작가에 궁술만 전문으로 하는 기사단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단순히 떠돌던 소문을 이야기한 것뿐이다.”
비터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나 역시 오래전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다만, 만약 널 공격했던 화살의 주인이 그 기사들 중 하나라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지겠죠. 아마도 카세인 협곡에서 전투가 일어난다면….”
“석궁과 활, 원거리 공방전이 되겠군.”
“지형상으론 상단이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는 없을 겁니다.”
“빌어먹을, 큰 산 하나를 넘으니 또 다른 산이군. 차라리 상행을 늦췄다가 몬스터들이 물러나면 다시 원래의 길로 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어쩌면 비터의 말이 안전을 확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지 몰랐다.
“아쉽지만 그럴 수가 없다. 앞으로 십여 일 뒤 남부를 돌며 수집한 가죽과 몬스터 부산물을 모두 납품해야 한다. 만약 계약을 어기면 상단이 받는 타격이 너무 크다.”
“모르긴 몰라도 몬스터가 물러가려면 보름은 족히 거릴 겁니다.”
“차라리 다핸 남작령에 도움을 청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기사단을 빌려 길을 빠르게 돌파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미엄 자작가를 돕는 일이라면 그들도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마크의 말에 토일이 고개를 저었다.
“다핸 남작이 굳이 기사단을 파견하면서까지 우릴 도와줄까? 그냥 그리미엄 자작 영애를 영지로 데려간 뒤 보름 뒤 자작령, 아니, 여기서 가까운 바르칼 경의 장원에 연락만 취하면 용병단이 찾아와 모셔 갈 텐데?”
“상단 입장에선 자작 영애를 빼앗기는 순간 모든 공을 다핸 남작에게 빼앗기는 형국이군요.”
“마티슨 님이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다.”
토일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군요.”
카일의 말에 코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하니 용병들과 상의해봐야겠군.”
“나 역시 따로 마티슨 님에게 말씀을 드려보겠다.”
토일과 코퍼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크와 비터가 비장한 얼굴로 카일을 돌아봤다.
“그럼 우린 뭘 하면 되겠냐!”
“우리도 열심히 돕겠다!”
결연한 두 사람의 표정에 카일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럼 두 분은… 그만 취침에 드시죠.”
“…엥? 잠이나 자라고?”
“대책이야 마티슨 단주님이나 코퍼 대장이 잘 세우겠죠. 우리가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걱정은 두 분에게 맡기고 잠이나 자죠.”
카일이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더니 정말 잠을 자려는지 피풍의를 덮고 누워 버렸다. 그 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보던 마크와 비터도 결국 한쪽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카일의 말대로 어차피 고민을 해봤자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사라졌습니다.”
“뭐…? 사라지다니? 설마 놈들이 남작령으로 돌아갔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남작령으로 향하는 길목엔 이미 아이들을 배치해 놓았습니다. 돌아갔다면 연락이 왔을 겁니다.”
“그럼 놈들이 어디로 갔단 말이냐!”
중년 사내가 분통을 터트렸지만, 보고를 올리는 복면 사내의 음성은 담담하기만 했다.
“카세인 협곡엔 저희도 파악하지 못한 크고 작은 협곡과 계곡들이 즐비합니다. 그곳 중 한 곳에 숨어있다면… 하루 이틀 만에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럼 이대로 손 놓고 지켜만 보잔 말이냐!”
중년인이 씩씩 거친 숨을 토하며 사내를 노려보았다.
“일단 최대한 단원들이 흩어져 놈들을 찾고 있습니다. 마차가 다섯 대가 넘는다고 하셨으니 곧 놈들이 숨은 곳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아마도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너희들의 주군이 쓰러졌다. 절대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을 거다.”
“물론입니다. 주군의 피 한 방울까지 백배, 천배로 돌려받을 겁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복면인의 말에 분통을 터트렸던 중년 사내의 음성이 가라앉았다.
“당연히 그래야지! 놈들이 절대 카세인 협곡을 벗어나선 안 될 것이다.”
“카세인 협곡은 그들의 무덤이 될 겁니다.”
“믿겠다.”
중년 사내가 커다란 대궁을 비끄러매고 뒤돌아 걸음을 옮기는 복면인의 모습이 자못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였다.
* * *
“차를 준비했습니다.”
식사가 끝나자 유모인 메아린이 새하얀 도자기 찻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헬레나 영애와 마티슨에게는 순백의 찻잔을, 도테트 경과 메아린 자신 앞에는 각각 갈색의 찻잔을 내어놓았다.
“일단 차부터 드시지요.”
마티슨이 미소를 지으며 헬레나 영애에게 손짓을 했다. 마티슨은 야외에서의 식사라 그리미엄 영애를 대접하는 데 다소 소홀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유모라 밝힌 메아린의 음식과 카일의 도자기가 만나자 더없이 훌륭한 만찬이 완성되었다.
“음식 솜씨가 여느 주방장 못지않게 훌륭하더군요,.”
“과찬이십니다. 책이라도 잡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입맛에 맞으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하하! 아닙니다. 정말 훌륭한 만찬이었습니다.”
마티슨의 칭찬이 계속 이어지자 메아린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헬레나가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이 찻잔 너무 예뻐요.”
헬레나가 찻잔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최근 들어 귀족사회에서 차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귀족 영애들 사이에선 독특하고 아름다운 찻잔에 대한 관심이 점점 증대되고 있는 만큼, 도자기에 대한 헬레나 영애의 관심은 마티슨을 더욱 고무시킬 수밖에는 없었다.
“영애께서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군요.”
마티슨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헬레나 영애는 찻잔을 신기한 듯 바라는 보기만 하뿐 정작 차는 마시지 않고 바라만 볼 뿐이었다. 비단 헬레나 영애뿐 아니라 도테트 경과 유모인 메아린도 마찬가지였다.
“영애! 혹 차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마티슨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헬레나 영애가 오히려 마티슨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마티슨 경, 찻잔이 뜨겁지 않나요?”
헬레나가 한 손으로 작은 접시를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 찻잔을 감싼 마티슨의 손을 보며 물었다.
“아…!”
마티슨이 그때서야 헬레나 영애의 반응을 이해했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