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24화 (324/404)

외전 - 58. 카세인 협곡(1)

“토일 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왜, 내가 오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느냐?”

날카롭게 쏘아보는 토일의 시선을 비터가 재빨리 피했다.

“아니, 그게…. 상단주님과 함께 계시면 제대로 된 따뜻한 음식도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굳이 여기까지 오셔서….”

“넌 귀족들의 식사 예절이 얼마나 복잡하고 까다로운지 아느냐? 저기서 함께 먹었다간 소화도 제대로 안 될 거다.”

토일이 투덜거리며 딱딱한 보리빵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토일 님은 귀족인 마티슨 님과 항상 함께 식사하지 않으셨습니까?”

“마티슨님은 평소 식사 예절을 크게 따지시는 분이 아니니 큰 상관이 없지만, 귀족 영애, 특히 그리미엄 자작의 영애를 만났으니 평소처럼 행동할 수는 없지.”

“토일 님께서 안 계시면 마티슨 님의 시중은 누가 드는 겁니까?”

“헬레나 영애의 유모가 예절에 밝고, 음식도 직접 만들면서 시중까지 책임지시기로 했다. 덕분에 나야 몇 시간 동안 고생하지 않아도 좋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라 할 수 있지.”

“몇 시간 동안이나 식사를 한단 말입니까?”

“예기하지 않았느냐? 귀족가의 식사 예절은 복잡하고 까다롭다고….”

토일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상단주와 그리미엄 자작가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계곡 안쪽으로 향했다.

“그래도 귀족들이 먹는 음식이면, 맛은 있겠지?”

비터가 토일의 옆으로 다가와 작게 중얼거렸다.

“얼핏 봤다만 나 역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맛이야 나도 모르지.”

“젠장! 고생은 우리가 했는데, 이런 딱딱한 빵 쪼가리나 뜯고 있다니….”

“휴…. 용병 주제에 먹는 거로 불평하긴 싫지만, 오늘같이 지치고 기온까지 떨어진 날엔 따끈한 스프를 먹어야 하는데….”

마크 역시 모래를 잔뜩 씹은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억지로 딱딱한 빵을 씹었다. 그렇다고 상단 일꾼들을 닦달해 스프를 끓이게 할 수도 없었다. 일꾼들 역시 손이 부르트도록 석궁을 당기고 쏘느라 상당히 지쳐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배만 채우면 그만이지. 용병이 언제부터 스프까지 챙겨 먹었나? 다들, 억지로라도 든든히 먹어둬, 체력 떨어지면 힘든 건 본인이니까!”

코퍼가 입안으로 빵을 잔뜩 밀어 넣으며 말했다. 어차피 상행 중 용병들이 먹는 음식이야 보리빵 아니면 소금에 절인 말린 육포다. 아이론 상회처럼 묽은 스프라도 제공해주는 곳도 있지만, 의무는 아니니 이런 불평도 어쩌면 작은 사치일 수 있었다.

짝-

카일이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짧은 박수와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도 이런 딱딱한 빵 쪼가리는 먹기 싫었는데… 스프 정도야 직접 끓여 먹으면 되죠.”

“지금 직접 음식을 만들겠단 말이냐?”

마크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 정도야 간단하죠.”

카일이 모닥불 중앙을 헤집어 공간을 만든 뒤, 커다란 가방 안에서 작은 솥을 꺼내 모닥불 중앙에 내려 놓았다.

“너, 솥까지 가지고 다닌 거냐?”

“마을에 있을 땐 숲에서 머물 때가 많았죠. 그럴 땐 이렇게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했습니다.”

카일이 솥 위로 손을 뻗어 적당히 열기가 올라온 것을 확인한 뒤, 가방 안에서 육포를 꺼냈다. 마을을 떠나기 전 여행에 대비해 직접 만든 육포였다. 카일은 육포를 잘게 자른 뒤 솥 안에 넣었다.

치이익-

뜨거운 열기에 지글거리며 육포가 익어가자 밤공기를 따라 고소한 육향이 사방으로 번져갔다. 비터가 솥에서 흘러나온 고소한 향에 취한 듯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야! 단순히 육포만 익혔을 뿐인데… 향이 죽여주는군!”

“멍청한 녀석, 아무 육포나 익힌다고 저런 향이 나올 것 같으냐! 저런 육포를 만들려면 독특한 비법이 있어야 하는 거다.”

“육포가 다 같은 거 아닙니까?”

“무슨 말씀! 고기의 부위, 제조 공정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다. 넌 귀족이나 기사들이 먹는 육포가 같을 것 같으냐?”

토일의 말에 비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이 짠맛만 나는 육포를 좋아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비터 님 부탁이 있습니다.”

육포를 넣고 한참을 볶아내던 카일이 갑자기 비터를 돌아보며 말했다.

“부탁…?”

“네! 꼭 들어주셔야 맛있는 스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카일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비터에게로 향했다. 코퍼 역시 이미 먹고 있던 빵을 내려놓고서 비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하! 당연하지, 얼마든지 말해라!”

“그럼… 가지고 계신 술 좀 주시겠습니까?”

“술!”

“설마 상행 중 술을 마셨단 말인가!”

마크와 코퍼의 시선이 날카롭게 비터의 전신을 훝었다. 비터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아니, 아닙니다. 상행 중 술이라니…. 그냥 자기 전, 딱 한 모금 한 게 전부입니다.”

“결국 술을 마셨단 말이군. 나와 한 약속도 어기고 말이야?”

싸늘해지는 마크의 목소리에 비터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운이 역력했다. 비터는 워낙 술을 좋아해 상행 중 문제가 생긴 적이 많았고, 덩달아 마크도 피해를 입으면서 의뢰 중엔 술을 먹지 않겠다고 마크와 약속했었다.

“정말… 딱 한 모금, 워낙 귀한 위스키라 아껴먹고 있단 말이야! 정말 문제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라고.”

“그래도!”

마크가 눈을 부라리자 비터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카일이 나선 건 바로 이때였다.

“저도 상행 중에 술 마시는 모습을 보진 못했어요. 자기 전 딱 한 번 본 것뿐인걸요.”

“정말 한 번뿐이라고….”

“네, 한 번….”

카일이 비터를 힐끔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코퍼 대장, 어쩌죠?”

“자기 전 한 모금 정도라면 내가 문제 삼을 일은 아닌 것 같군.”

“그렇다면….”

마크가 고개를 저으며 비터를 잠시 노려봤다.

“뭐해, 카일이 술 달라잖아!”

마크가 소리치자 비터가 화들짝 놀라며 카일에게 위스키가 담긴 작은 유리병을 내밀었다. 카일이 살짝 웃으며 유리병을 건네받고는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

“확실히 좋은 술이군요.”

“…칫, 술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안다고.”

비터가 카일을 보며 중얼거렸다. 카일 때문에 갑자기 아끼던 술을 잃었으니 그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만은 없었다. 카일은 비터를 보며 미소를 짓더니 잘 볶아진 육포에 위스키를 부었다.

촤아악-

뜨거운 열기와 함께 솥에서 불길이 치솟자 사람들이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났다.

“불길이 일면 주정과 함께 육포에 남은 잡냄새를 날려주고, 단맛과 함께 위스키의 독특하고 은은한 향이 배어들죠.”

카일이 피식 웃으며 위스키병을 비터에게 돌려줬다. 반밖에 남지 않았던 위스키는 이제 한 모금이 겨우 남을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비터는 마크의 시선을 피해 황급히 품 안에 위스키병을 밀어 넣었다. 그 사이 카일은 솥에 물을 붓고 곡물가루를 쏟아 넣었다.

“이제 잘 저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음식을 만드는 게 아주 익숙하군.”

“집안에서 음식을 만드는 건 제 몫이었거든요.”

코퍼의 말에 웃으며 대꾸한 카일이 모닥불에서 솥을 번쩍 들어 밖으로 꺼냈다.

“어떻게 맨손으로…?”

코퍼가 놀란 눈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보통 오러는 매개체, 즉 검과 같은 무기를 통해서만 발현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피스트 워리어 같은 맨손 격투가들도 오러를 발현하기 위해선 권갑이 필요했다. 그런데 카일은 뜨거운 솥을 옮기며 아무런 매개체도 없이 손안에 오러를 발현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상식이 파괴된 것이다.

카일은 코퍼의 놀란 물음에 그저 웃으며 가방 안에 싸인 작은 주머니에서 옹기그릇을 꺼내 고소한 향이 풍기는 걸쭉한 스프를 가득 담아 건넸다.

“오러를 아껴주지 말고 끊임없이 괴롭히면… 언젠가 방법을 알게 될 겁니다.”

“오러를… 괴롭혀라? 그럼….”

“육포를 만들 때 간을 강하게 해서 따로 소금을 넣지 않았습니다. 필요하면 말씀해 주세요.”

코퍼가 다시 한번 물으려 했지만,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더는 알려줄 수 없음을 명확히 한 것이다. 코퍼가 잠시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맛있게 드십시오.”

카일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스프를 가득 담아 건넸다.

“흐흐, 그럼 어디 한번 먹어볼까?”

비터가 가죽 갑옷 안쪽에서 꺼낸 나무 스푼으로 스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비터 뿐 아니라 코퍼와 마크 역시 품 안에서 개인 스푼을 꺼내 스프를 떠먹었다. 용병 대부분이 이렇게 식기나 스푼을 직접 가지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와! 이거 맛있는데, 부드러운 육질에 향기까지….”

비터가 호들갑을 떨며 스프를 입에 쏟아부었다. 마크와 토일 역시 스프에 보리빵을 찍어 먹으며 맛있게 먹고 있었다.

“카일, 진짜 맛있다. 이렇게 맛있는 스프는 정말 처음이다. 특히나 고기에서 나는 이 향기까지…. 도대체 비법이 뭐냐?”

보리빵으로 그릇을 닦아내듯 마지막 한 방울까지 깨끗하게 비운 토일이 궁금한 듯 물었다.

“비법이라면 위스키 때문일 겁니다. 고기를 익힐 때 술을 넣으면 고기가 부드러워지고 특유의 잡내를 잡거든요. 여기에 육포 자체에 양념이 잘 배어 든 덕분이죠.”

“검술 하나만 익히기도 힘든데, 도대체 카일 넌 못 하는 게 뭐냐?”

비터의 말에 동의한 듯 마크와 토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은 그저 웃으며 솥과 옹기를 정리하려 하자, 마크가 일어나 카일에게서 그릇과 솥을 빼앗듯 들어 올렸다.

“이건 내가 씻어 오마!”

“아니… 그건!”

“가만히 앉아 얻어먹기만 할 수는 없으니 이런 거라도 해야지!”

마크가 돌아서며 비터를 발로 툭 쳤다.

“뭐하냐! 같이 가야지.”

“나도…?”

“좋은 말 할 때 따라오시지!”

마크가 눈을 크게 뜨고 노려보자 못 이긴 척 비칠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비터가 힘없이 마크의 뒤를 쫓았다.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코퍼의 표정이 점점 가라앉았다.

“이제… 말해 주겠나? 녀석들, 일부러 자리를 피한 것 같은데.”

코퍼의 말에 토일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내가 눈치 없이 앉아 있었나 보군.”

“아닙니다. 이번 일은 토일 님도 함께 들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도… 말인가?”

“그렇습니다. 상단의 안위와도 직결된 문제니까요.”

“상단의 안위라면… 설마 볼트를 최대한 회수하라고 했던 이유와 같은 건가?”

“그렇습니다.”

“흠….”

토일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팔짱을 끼고선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던 토일이 이내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야기를 들어 보겠네.”

“그럼, 시작은 그리미엄 자작 영애의 마차를 지원하기 위해 출발했을 때부터입니다.”

카일은 비교적 자세히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역시 브린의 배신이 있었군.”

“코퍼 용병단의 단원인 브린의 배신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책임을 물으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코퍼가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브린의 배신은 이미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카일의 입을 통해 직접 전해 듣자 코퍼의 얼굴은 삽시간에 창백하게 변했다. 그만큼 브린의 배신은 코퍼에겐 충격이었다.

“이미 브린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네, 그 일로 상단주님과도 이야기는 나눴었네.”

“…벌써 짐작하고 계셨군요.”

“일단 브린의 배신에 대해선 코퍼 용병단에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네, 브린의 행동이 괘씸하기는 하지만, 코퍼 용병단의 헌신 덕분에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사실이니. 어쩌겠나, 잊고 지나가야지.”

“…아일론 상단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코퍼가 토일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서로간 잘 해결되어 기쁘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진짜 심각한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브린의 배신 말고 다른 일이 또 있었단 말인가?”

토일의 물음에 코퍼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카일에게로 향했다.

“맞습니다. 새로운 적이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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