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57. 아일론 상회 위기(3)
“마침 함께 있었군.”
“대장님.”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자네들에게 부탁할 것이 있네.”
“저희에게 말입니까?”
“그렇네. 상단의 척후는 우리 코퍼 용병대가 맡기로 했지만, 알다시피 다들 부상 중이라 당장 척후로 투입할 수 없어. 자네들이 도와줬으면 하네.”
“저희가요?”
“곧 날이 저물 거네! 그전에 상단이 머물만한 야영지를 찾아야 하네. 앞길이 막혔으니 아무래도 카세인 협곡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먼저 출발했으면 하네.”
코퍼의 말에 마크와 비터가 잠시 망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
“그게, 저희는 척후나 첨병을 나간 경험이 없습니다.”
척후나 첨병은 본대보다 앞서 수색, 정찰하며 매복이나 몬스터를 미리 발견해 본대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이다. 그래서 상단 자체적으로 첨병을 키우거나 믿을 수 있는 용병대에게 맡길 뿐, 떠돌이 개인 용병들에겐 첨병이나 척후를 맡기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다. 첨병을 나가는 용병의 배신은 곧 상단에게 큰 타격으로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오늘 하루 안전히 머물 곳만 찾으면 되네.”
“그 정도라면… 알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출발하게. 우리도 준비되는 대로 뒤를 따를 테니.”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하지.”
코퍼가 돌아가고 남은 마크와 비터가 난처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쩌지? 곧 날이 저물 텐데, 상단이 머물만한 야영지를 찾을 수 있을까?”
“카데인 협곡으로 돌아가려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인데, 큰일이군.”
마크와 비터의 대화를 듣고 있던 카일이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카일! 어딜 가는 거야?”
“그렇게 가만히 서서 걱정만 한다고 야영지가 저절로 찾아집니까? 일단 움직여야 찾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코퍼 대장이 마차를 돌려 쫓아오려면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길을 따라 되돌아가며 야영할만한 곳을 찾아보죠. 어쩌면 쉽게 지나쳤던 곳에 의외로 적당한 야영지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좋다, 어차피 이대로 있을 수는 없으니 길을 따라 되돌아가며 찾아보자.”
마크가 황급히 달려가 마차에 묶어 놓은 말을 풀어냈다. 오크들의 공격이 시작되자, 토일은 가장 먼저 말들을 분리해 안전한 후면에 몰아넣고 보호했다. 자칫 말들이 공포에 젖어 난동을 피우거나 다치기라도 한다면 상단은 꼼짝없이 발이 묶일 수 있었다. 덕분에 말들 중 다친 녀석들은 보이지 않았다.
“녀석도 데려갈 생각이냐?”
“리플 말입니까?”
리플은 카일이 마시장에서 매입한 말로, 다시 시작하란 뜻에서 지어준 이름이다.
“네! 계속 좁은 곳에만 묶여 있었잖아요. 잠시 달리게 해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
카일이 리플을 자신이 탄 말과 연결한 뒤 말에 올랐다.
“가자!”
비터를 선두로 마크와 카일이 그 뒤를 바짝 뒤따랐다.
“잘할 수 있을까요? 상단 전체가 들어갈 만한 야영지를 찾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커다란 천으로 팔을 동여맨 야튜가 코퍼에게 다가와 물었다. 야튜는 이번 오크와의 전투에서 팔이 반쯤 뜯겨 나갈 정도의 큰 상처를 입었다. 다행히 상단주가 보관 중인 포션 덕분에 팔을 잃지는 않았지만 당분간 한쪽 팔은 사용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버크 역시 다리를 심하게 다쳐 짐마차 한쪽에 누워있었다.
“녀석들을 믿어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지. 그보다 아덱은 어떤가?”
“운이 좋았습니다. 단검이 심장 바로 아래쪽을 뚫긴 했지만, 검날을 손으로 잡은 덕분에 깊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그런지 아직 깨어나진 못하고 있습니다.”
“단검에 당한 거라면….”
“상처의 형상이 아래에서 위로 기습적으로 찌른 겁니다.”
“근접한 상황에서 공격을 받았다는 말이군.”
“지금으로선 그렇게 보입니다.”
“브린이… 연관되었다고 봐야겠지.”
코퍼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확한… 사정은 들어 봐야겠지만, 가능성이 높습니다. 녀석이 사라진 것만 봐도….”
“녀석이 만약 배신했다면….”
“이번 오크 습격, 결코 우연이 아닐 겁니다.”
야튜의 말에 코퍼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번 오크 습격으로 하급용병 다수가 죽었다. 카일이 제때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이곳엔 오크들에게 뜯겨나간 시체만 즐비하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녀석이 우릴 배신했다면… 마땅한 대가를 받아내야겠지.”
코퍼가 굳은 얼굴로 오크 피에 절어 녹빛으로 변해버린 검집을 매만지며 말했다.
* * *
“젠장!”
꽝-
어두운 복도 끝, 중년의 사내가 초조하게 복도를 서성이다 결국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벽을 힘껏 내려쳤다.
쩌어적-
주먹에서 시작된 가느다란 실금이 벽면으로 펴져 나가며 뿌연 먼지가 복도 안을 가득 메웠다.
“그러다가 집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기껏 살려낸 아가씨까지 죽일 생각인가?.”
문을 열고 나온 노인이 벽면을 따라 이어진 실금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영감님! 아가씨께서 정말 무사합니까?”
“빌어먹을 녀석, 지금 날 못 믿겠다는 거냐!”
노인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중년인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지 않소.”
“네놈이 시끄럽게 굴지만 않았어도 아가씨께선 벌써 안정을 찾았을 거다. 이 망할 놈 같으니라고.”
“알겠소, 다 내 잘못이요. 그러니 말해보시오. 아가씨는 어떤 거요?”
중년인의 재촉에 노인이 벽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끼며 얼굴을 찌푸렸다.
“화살이 어깨뼈를 부수고 안쪽 깊이 박혔다. 그나마 마법 갑옷 덕분에 다른 장기는 다치지 않았지만, 어깨뼈가 문제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화살을 날릴 수 있는지….”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어떻다는 거요? 설마… 궁술을 더 이상….”
“녀석, 너무 앞서가진 마라! 아직 아무것도 단정 지을 단계는 아니다. 일단 경과를 지켜….”
꽝-
“빌어먹을! 그 말이 그 말 아니오. 이 개 같은 녀석! 가만두지 않겠다.”
중년인이 당장이라도 박차고 나가려 하자 노인이 황급히 붙잡았다.
“어쩌려는 거냐! 아가씨의 명도 듣지 않고 움직일 생각인 거냐!”
“어차피 지금이 아니면 목적을 이룰 수 없는 것 아니오! 만약 이 사실이 그자의 귀에라도 들어가면… 그 전에 끝내야 할 겁니다. 특히 그 용병 놈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중년 사내가 노인의 손을 뿌리치며 돌아섰다.
“하지만 녀석의 궁술을 보았지 않느냐! 자칫 잘못하면 역으로 당할 수 있다.”
“접근전이라면 그렇겠지요.”
“너!”
노인이 깜짝 놀라 중년 사내를 부르려 했지만 이미 그는 노인의 손을 벗어나 복도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허허! 이거 큰일이군.”
노인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곳을 떠날 수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대장님!”
“아니, 왜 벌써 돌아오는 건가?”
마차를 돌려 길을 되돌아가던 코퍼가 생각보다 일찍 되돌아온 비터를 보며 물었다.
“앞쪽에 야영할 만한 적당한 곳을 찾았습니다.”
“벌써… 말인가?”
“네, 계곡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야영을 하기엔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비터가 코퍼에게 장소와 위치를 자세히 설명했다. 잠시 고민하던 코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흠… 괜찮을 것 같군. 일단 그쪽으로 안내해주겠나!”
“알겠습니다.”
코퍼가 결정을 내리자 비터가 환하게 웃으며 선두에서 상단을 안내했다. 일단 목적지가 정해지자 비터의 뒤를 따르는 마차도 점점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비터가 안내한 곳은 의외로 가까운 곳이었다.
“계곡 입구가 상당히 좁은데… 상단 전체가 야영할 만한 곳이 있을지 걱정이군.”
“입구 쪽이 좁아 보이긴 하지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제법 넓은 공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입구가 좁으니 오히려 방어에도 좋지요.”
“확실히 입구만 좁으면 방어엔 유리하겠군.”
코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미 날이 저문 상태에서 다른 곳을 찾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코퍼는 어쩔 수 없이 용병들과 상단 일꾼들을 향해 명을 내렸다.
“진입한다.”
코퍼의 명이 떨어지자 상단 일꾼들과 그나마 멀쩡한 하급 용병들이 마차가 진입할 수 있게 잡목을 제거하고 크고 작은 바위를 치워 길을 만들었다. 협곡은 비터의 말대로 안쪽으로 진입할수록 점점 넓어지더니, 커다란 바위들이 협곡 주변을 듬성듬성 둘러싼 제법 아늑한 공간이 나타났다.
“제법 괜찮은 곳을 찾았군.”
“조금 좁긴 하지만 이 정도면 방어에도 유리하고, 외곽으로 작은 하천도 있으니 아주 좋습니다. 마차를 바위 사이에 배치하면 방벽으로 더없이 훌륭할 것 같습니다.”
야튜가 지형을 이리저리 살피며 코퍼에게 자신의 생각을 설명했다.
“확실히 괜찮군. 야튜, 자네가 상단 일꾼들과 함께 짐마차로 방벽을 만들어보게.”
“알겠습니다.”
야튜가 황급히 짐마차를 멈춰 세우고 상단 일꾼들을 동원해 방벽을 만드는 사이, 코퍼는 상단주와 그리미엄 자작가 일행이 탄 마차를 가장 안전한 협곡 안쪽으로 안내했다.
“휴… 끝났군요.”
계곡 중턱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 분주히 움직이는 용병들과 상단 일꾼들을 바라보던 카일이 바위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다행히 야영지를 빨리 찾아 다행이다.”
“이게 다 리플 덕분이죠.”
카일이 한쪽에서 신나게 풀을 뜯고 있는 리플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은 물소리를 듣고 계곡 안쪽으로 갑자기 들어온 리플 덕분에 발견한 장소였다.
“그래, 덕분에 좋은 야영지를 찾았다. 백작 성에 도착하면 녀석에게 삶은 콩을 푸짐하게 대접해 주마!”
마크가 피식 웃더니 마른 나뭇가지를 한 아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젠 완연한 겨울로 접어들어서인지 해가 지자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카일과 마크가 자리 잡은 곳은 커다란 바위와 바위 사에 형성된 작은 공간으로 양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나저나, 브린의 일 말이다. 코퍼 대장에게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물론 그래야겠죠. 더불어 다른 이야기도 전해줘야 할 것 같고요.”
“다른 이야기? 설마 우리가 돌아가고 다른 일이 또 있었던 거냐?”
마크가 깜짝 놀라 물었다.
“흠… 그건 나도 궁금하군,.”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비터와 코퍼가 커다란 보리빵을 들고 천천히 다가왔다.
“오셨군요.”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나?”
“생각보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브린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한 번은 찾아올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덱 님의 상처만 봐도 근접한 상황에서 갑자기 당한 공격임을 아실 테니 말이죠.”
“생각보다 심계가 깊군.”
코퍼가 고개를 끄덕이며 모닥불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보리빵을 반으로 뚝 잘라 카일에게 내밀었다.
“날도 저물었고 다들 전투로 지쳤다네. 오늘 저녁은 이걸로 간단하게 배나 채우게.”
“저기서 만드는 음식은 귀족들 몫인가 보군요.”
계곡 안쪽, 분주히 움직이는 상단 일꾼들의 모습에 마크가 얼굴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지, 상대가 그리미엄 가의 영애잖아! 상단주도 신경을 쓸 수밖에….”
비터가 딱딱한 보리빵을 뜯으며 투덜거렸다. 그때 어둠 속에서 어슬렁거리는 그림자가 다가와 비터의 말에 대답했다.
“그렇지, 고위 귀족가 영애에게 딱딱한 보리빵을 줄 수는 없지.”
찾아온 사람은 토일이었다.
토일은 항상 마티슨 상단주와 함께 식사했지만, 이번에는 귀족들이 함께 있는 상황이라 보리빵 하나를 들고 카일 일행을 찾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