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56. 아일론 상회 위기(2)
스각-
마지막 남은 검은 오크를 베어 넘긴 코퍼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질척거리는 대지나 비릿한 피 냄새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지쳐있었다.
“결국… 살았군.”
서서히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코퍼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감상에만 젖어 있으면 곧 죽을 겁니다.”
“어린 녀석이… 감정이 메말랐군.”
“죽으면 감정이 무슨 소용입니까?”
화살이 박힌 오크를 이리저리 둘러본 카일이 단번에 화살대를 뽑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코퍼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지금… 뭘 하는 거냐?”
“보면 모르십니까? 화살 수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굳이… 한 번 쓴 화살을 다시 쓸 필요가 있느냐?”
카일의 손엔 이미 오크 피가 뚝뚝 떨어지는 화살대 십여 대가 쥐어져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날아온 화살의 정체가 이제야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잘 모르시나 본데, 오크 피에 섞인 독은 천연 방부제죠. 나무에 바르면 나무가 질기고 단단해질 뿐 아니라 잘 썩지 않아서 저희 마을에선 장궁이나 화살대에 일부러 바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금 화살을 새로 만들기보단 재사용하는 게 편하기도 하고요.”
“오크 피를?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군.”
“당연하죠. 아무리 재료가 좋다고 해도, 몬스터인 오크 피를 여기저기 바를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오크 피는 바르면 바를수록 특유의 녹빛이 강해져서 보기에도 좋지 않고요.”
“그건…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코퍼가 검을 지팡이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보다 피해는… 어떤가요.”
“그건… 휴! 하급 용병 일곱을 잃었다.”
“…피해가 크군요.”
“그나마도 네가 제때 도와주지 않았다면, 피해가 더 컸을 거다. 고맙다.”
코퍼의 말에 카일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맙기는요. 저도 아일론 상회와 계약한 용병인걸요. 그보다 여기서 오래 있을 수는 없어요. 곧 날이 저물면 피 냄새를 맡고 몬스터들이 몰려올 거예요.”
“걱정 마라! 주변이 정리되는 대로 떠날 테니!”
마차에서 내려온 토일이 여기저기 쓰러져있는 오크 사체를 피해 카일에게 다가왔다.
“녀석, 역시 보일 님의 아들답구나! 덕분에 살았다.”
“아버질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죠. 그보다 상단 피해는 없나요?”
“일꾼 하나가 마차에서 떨어지며 경미한 부상을 당했지만, 큰 피해는 없다. 모두 카일, 네가 늦지 않게 도와준 덕분이다.”
“상단 피해가 적어 다행이군요. 그보다 볼트는 얼마나 남았습니까?”
“그리 많이 남진 않았다만, 왜 그러느냐?”
“아무래도 최대한 볼트를 수거하셔야 할 것 같아서요.”
“또 습격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일단 안전한 곳을 찾은 뒤 말씀드리죠.”
“흠… 알겠다. 그리고 갔던 일은 어찌 되었냐?”
토일의 물음에 카일이 멀지 않은 언덕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을 가리켰다.
“마침 여기로 오고 계시군요.”
“저들이냐?”
“함께 있던 기사와 병사는 전멸했고, 타고 있던 마차도 상당 부분 부서졌습니다. 말도 모두 죽었더군요. 그곳도 여기만큼 처참한 곳이라 곧장 데려왔습니다.”
“이번 전투는… 마치 이 주변 오크들이 죄다 몰려든 것 같구나!”
토일이 주변에 쓰러진 오크들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혹,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 아느냐?”
“그건 저도 잘…. 짧게 통성명만 하곤 바로 출발하느라 미처 묻지 못했습니다.”
“마차나 깃발이라도 있으면 가문을 확인할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봐선 어느 가문 사람인지 알 수가 없군. 일단 상단주님께 말씀드리겠다. 볼트는… 네 말대로 최대한 수거해 보마.”
토일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 상단 일꾼들에게 급히 지시를 내리곤 마티슨이 탄 마차로 향했다.
“귀족 나리들이 오셨으니 나도 가봐야겠군, 볼트 수거는 용병들에게도 지시해 놓겠다. 귀찮아도 살고 싶으면 녀석들도 나서줄 거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나 역시 네게 듣고 싶은 말이 있지만, 이야기는 안전한 곳에서 듣기로 하지.”
“네.”
코퍼가 카일을 뒤로하고 용병들에게 지시를 내린 뒤 야튜와 함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아일론 상단의 호위를 맡은 코퍼라 합니다.”
“난 중부 그리미엄 자작가의 도테트라 한다네, 이곳 상단주를 만날 수 있겠나?”
“그리미엄 자작가였군요.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부탁하네.”
코퍼는 그리미엄 자작가 일행을 이끌고 마티슨이 머무는 마차로 향했다. 마티슨 역시 이미 토일에게 귀족가 일행이 도착했음을 들었기에 미리 마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미엄 자작가 일행을 모시고 왔습니다. 상단주님.”
코퍼가 눈치 빠르게 귀족가의 정체를 마티슨에게 알렸다.
“마티슨 데 아일론 준남작입니다.”
마티슨은 방계귀족 출신으로, 귀족의 신분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골드를 왕실에 기부하고 단승 작위이자 명예직인 준남작 작위를 받았다.
“그리미엄 자작가의 도테트 프로실입니다.”
도테트가 가슴에 손을 올리며 정중히 고개를 숙인 뒤, 한걸음 옆으로 물라나 작은 소녀를 가리켰다.
“이분은 그리미엄 자작가의 장녀 헬레나 그리미엄입니다.”
“헬레나예요. 마티슨 준남작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헬레나가 귀족가의 예법에 맞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얼마 전 카일을 향해 장난스럽게 미소를 짓던 소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귀족 특유의 우아하면서도 고귀한 기품이 느껴졌다.
“당연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제가 아닌 누구라도 그런 상황이면 도움을 주저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가 작다고 할 수는 없겠죠. 아버님께서도 분명 아일론 상회의 호의를 잊지 않으실 겁니다.”
“하하, 그리미엄 자작님을 만날 기회만 주셔도 제겐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아버님께서도 마티슨 준남작님을 직접 만나 감사 인사를 드릴 겁니다.”
헬레나의 말에 마티슨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지금껏 만나본 마티슨과는 왠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 * *
“여기 있었구나!”
카일의 옆으로 비터와 마크가 다가왔다.
“네, 다친 곳은 없습니까?”
“자잘한 상처가 있긴 하지만, 그 정도야 전투 중 늘상 입는 상처지. 그보다 귀족 마차의 주인이 그리미엄 자작가였군.”
“그리미엄 자작가라…. 상단주가 아주 운이 좋은데?”
“운이라니요?”
“그리미엄 자작가를 몰라?”
비터나 놀란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그리미엄 자작가가 그렇게 대단한 가문인가요?”
“물론 대단하지, 광산과 넓은 평원을 동시에 가진 몇 안 되는 가문이거든. 아마도 이번 일로 마티슨 상회가 챙길 이익은 엄청날 거다. 가문의 후계자를 구했으니 그리미엄 자작도 대가를 치르겠지.”
“가문의 후계자라면….”
“헬레나 그리미엄, 현 그리미엄 자작의 유일한 자식이지.”
“그럼 영애가 유일한 후계자란 말이군요.”
“그건 아니다. 현 그리미엄 자작에겐 조카딸이 하나 있는데, 가신 대부분이 그녀를 지지하고 있지.”
“가주의 딸이 아닌 조카를 지지한단 말인가요?”
“그래. 현 그리미엄 자작부인이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이기 때문이지.”
“네?”
카일이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대륙은 철저한 신분제 사회다. 자유민도 아닌 평민이 귀족, 그것도 작위를 가진 귀족가의 정실부인이 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대단한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요?”
“우연과 필연이 겹쳐 생긴… 운명이라고 할까?”
“네?”
“이걸 설명하려면 일단 헬레나 그리미엄의 외할아버지, 바르칼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바르칼 용병대 말씀이십니까?”
카일이 미간을 좁혔다.
“바르칼 경에 대해선 들어 본 모양이구나!”
“역시 용병이라면 바르칼 용병대를 모를 수가 없지.”
“그보다는 용병 가문인 바르칼 장원이 더 유명하지.”
비터와 마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바르칼 용병대는 삼백 명이 소속된 대형 용병단으로, 용병단의 단장인 바르칼은 삼대에 걸쳐 다듬어온 검술을 통해 용병으로서 상급 엑스퍼트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를 바탕으로 용병가문, 바이칼 장원을 세웠다.
“처음 정원이 세워지고 바이칼 경이 상급 엑스퍼트에 올랐단 소식이 알려지자 각지의 영주들이 바이칼을 영입하기 위해 달려들었지.”
“멀리 서부 맨피스 왕국에서도 찾아올 정도였으니 정말 대단했지.”
“그리미엄 자작가와 인연을 맺은 것도 그럼….”
“맞아! 그때였다. 당시만 해도 그리미엄 가문은 그저 그런 남작 가문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기사 가문도 아닌 학자와 관료들만 배출하던 가문이라 무력도 형편없었지.”
“형편없다고 보긴 좀…. 알려지기론 궁술에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다는 말도 있고, 당시 궁술만 전문으로 하는 기사단도 있었다던데? 그리미엄 가문의 오랜 조상 중 엘프가 있다는 말도 있잖아.”
“그건 그저 소문 아니었나? 귀족들이 천시하는 궁술을 전문적으로 익힌 기사단이라니….”
마크의 말에 비터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카일의 눈빛은 달라졌다. 어쩌면 언덕 위 복면인들이 단순히 청부업자들이 아닌 그리미엄 가문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당시 그리미엄 남작가는 이웃 영지와 분쟁 중이라 병력이 절실한 상황이었지. 그래서 파격적으로 바르탈 경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고 그의 딸과 차남 에비던을 혼인시켰지.”
“맞아! 한동안 이것 때문에 귀족들, 특히 사교계에서도 말들이 많았다고 했지, 아무튼 영지전은 이웃한 기사 가문이 압도적으로 승리할 거란 예상을 깨고 치열한 공방전과 소모전으로 변했는데. 당시 넓은 평원 덕분에 식량 수급이 자유로웠던 그리미엄 자작가로서는 아주 유리한 상황이었지.”
“일이 터진 건 신년을 맞아 잠시간 가진 휴전 중이었다.”
“설마 상대가 약속을 어긴 건가요?”
카일의 물음에 마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당시 성에 머물고 있던 영주를 비롯한 소영주 일가족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어린 하녀가 갓난아기였던 소영주의 장녀, 베아트리 그리미엄을 안고 탈출한 덕분에 겨우 목숨만 건졌지.”
당시 이웃 영지의 목적은 영주와 소영주를 인질로 잡은 뒤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것이었지만, 뜻하지 않게 영주성에 불이 나면서 영주의 일가족이 참변을 당하고 만 것이다.
“현 그리미엄 자작은 당시 처가인 바르칼의 집에 머물고 있어 다행히 참변을 면할 수 있었지만, 분노가 대단했다더군. 소식을 듣고 달려온 에비던과 바이칼은 영주성을 점령한 기사들을 몰살시키고, 여세를 몰아 이웃 영지를 급습, 영주와 일가족을 모두 죽여버렸다더군. 이후엔 두 남작가를 통합해 지금의 자작가를 만들었지.”
“맞아, 바르칼의 용병단과 그리미엄 자작가의 재력이면 남부와 중부 일대에서 당해낼 자가 없다는 뜻이지.”
“지금의 자작가를 만든 게 사실상 현 자작과 바르칼 용병대 덕분이란 말이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가신들은 다르지, 그들은 현 자작부인이 평민 출신이란 이유로 차기 자작위는 베아트리 그리미엄이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거든.”
“뭐, 전대 소영주의 장녀이니 명분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군요. 그럼… 그 베아트리 그리미엄이 만약 다음 대 자작가를 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바르칼 경이 가만있지는 않겠지.”
“내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내전? 바르칼 경이 나서면 내전 같은 게 일어날 수나 있을까?”
“맞아! 바르칼 경은 상급 엑스퍼트고, 용병도 삼백 명이나 거느리고 있지. 더구나 현 그리미엄 자작이 버티고 있는 한, 반발은 곧 반역이지!”
비터와 마크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베아트리 그리미엄에게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군요.”
“방법이라니?”
“그리미엄 자작의 장녀 헬레나 그리미엄의 죽음.”
카일의 말에 비터와 마크가 깜짝 놀라 카일을 바라보았다.
“너 설마 이번 일이….”
마크의 물음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