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55. 아일론 상회 위기(1)
“이걸… 전부 가져가겠다는 겁니까?”
마차에서 내려진 짐가방은 세 개, 하나하나가 어린아이 한 명은 충분히 들어갈 정도로 커 보였다.
“아끼던 옷이나 귀하고 값나가는 장신구만 대략 추린 거예요.”
“아일론 상회와 합류하려면 오래 걸어야 합니다. 이걸 전부 가져가긴 힘듭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여기 있는 물건 중 단 하나도 놓고 갈 수 없어요.”
“…정말 이걸 다 가져가야 한단 말입니까?”
“그래요.”
중년 여인은 단호하게 말하며 카일을 노려봤다.
“그럼 할 수 없군요. 알아서 하시지요.”
“정말인가요?”
의심 가득한 유모의 눈초리에도 카일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전 그저 조언만 드릴 뿐 제가 결정할 일은 아니죠.”
“다행… 이군요.”
사실 유모는 여벌의 옷가지만 들어간 가방 하나를 따로 준비해둔 상황이었다. 카일이 짐을 줄이라 계속 강요하면 못 이긴 척 여분의 가방을 빼낸 뒤 남은 두 개를 온전히 가져갈 생각이었다. 헌데 몇 번 우려를 표하던 카일이 그냥 뒤로 물러나 버린 것이다.
“흠… 이상하군요?”
멀지 않은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테트가 의아한 얼굴로 잠시 턱을 쓰다듬었다.
“…뭐가 이상해요?”
“아가씨가 봤을 땐, 저 카일이란 녀석 어떻습니까?”
“글쎄요? 전 잘….”
“저 녀석 그리 호락호락하게 메아린의 말을 들을 녀석이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도테트 경도 오늘 처음 봤잖아요?”
“본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녀석의 검술은 확실하게 봤습니다. 단순하지만, 고집스럽고 단호하더군요. 거기다 엑스퍼트 초급을 넘어 중급에 이르렀습니다. 멍청한 녀석이라면 절대 저 나이에 오를 수 없는 경지죠.”
“그런가요? 그럼 왜 순순히 유모의 말에 따른 걸까요?”
“저도 그게 궁금하군요.”
도데트가 흥미로운 얼굴로 메락과 함께 멀어져가는 카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카일과 메락이 향한 곳은 멀리 않은 곳에 반파되어 쓰러진 짐마차였다. 여행에 필요한 식량을 비롯한 잡다한 물건을 실어 놓았던 곳이다.
“완전히 부서져 다시 쓰긴 힘들 것 같군요.”
“일부러 부쉈으니 당연하죠.”
“일부러요?”
“쫓아오는 오크를 막아야 했거든요. 결과적으론 실패했지만요.”
뒤를 쫓는 오크는 저지했지만, 양측에서 나타난 오크들로 인해 오히려 고립되고 만 것이다. 카일은 메락의 뒤를 쫓아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기름을 잔뜩 먹인 가죽 천막이 찢어지고 음식 재료들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엉망이라… 여기 어디 있을 겁니다. 잠시만….”
메락이 마차 안 여기저기를 뒤지더니 마차 안쪽에서 제법 커다란 상자 하나를 끌고 나왔다.
“다행히 부서진 곳이 없네요.”
“잠겨 있군요.”
카일이 커다란 자물쇠를 들어 보며 물었다.
“그게, 임시로 보관하고 있는 거라…잘 사용도 안 하고 해서요. 하지만 물건에 이상은 없는 겁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확실히 챙겨 뒀으니 말이죠. 다만 열쇠가…!”
까드득-
메락의 말에 자물쇠를 꽉 말아쥔 카일의 손에 점점 힘이 실리기 시작하더니 곧 텅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부서져 나갔다. 힘으로 단단한 자물쇠를 단번에 뜯어내 버린 것이다.
“세상에, 자물쇠를!”
메락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부서진 자물쇠를 바라보았다. 특별한 자물쇠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힘으로 쉽게 뜯겨나갈 만큼 허술한 자물쇠도 아니었다. 카일은 메락의 놀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무상자를 열었다.
“제법 잘 만들었군요.”
상자 안 가득 든 화살 중 하나를 꺼낸 카일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상단에서 들여온 것보다 영지 공방에서 만든 것이 훨씬 튼튼하다니까요?”
메락이 잠시 웃음을 지었지만, 곧 아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화살이야 얼마든지 있지만, 활이 없습니다. 저쪽에 장궁이 몇 자루가 있었는데 마차가 부서지고 물건이 뒤집히면서 함께 부서진 것 같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전 화살만 있으면 되니까요.”
카일은 화살을 꺼내 다발로 묶어 허리 뒤쪽으로 돌려 멘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에 오크들이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앞서가며 표식을 남겨 줄 테니 뒤따라오십시오.”
“먼저… 가신다고요?”
메락이 깜짝 놀라 물었다.
“도보로 이동해야 하는데, 자칫 오크들이 대규모 기습이라도 하면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미리 대비를 하는 게 좋겠죠.”
“정찰병이라면 저도 할 수 있습니다. 몇 번 해보기도 했고요.”
“지금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대규모 오크 무리라면 빠르게 돌아오거나 우회로를 찾아야 하고, 소규모 무리라면 즉시 처리해야 합니다. 메락 님이나 도테트 님께선 오랜 전투로 지쳐있으니, 정찰은 제가 하는 게 맞습니다.”
“그래도 일단 도테트 님께 먼저 말씀을 드리는 게….”
“부상당했던 동료들도 지금쯤이면 아일론 상회와 합류했을 테니, 추가로 도와줄 용병들을 보냈을 겁니다. 제가 먼저가 동료들을 데려오는 게 빠를 겁니다. 도테트 님께는 메락 님께서 잘 설명해 주십시오.”
“그건…!”
“그럼 부탁드리죠. 중간중간 안전하단 신호로 나뭇가지에… 천을 묶어 놓겠습니다.”
카일이 바닥에 떨어진 낡은 천을 들고는 마차를 벗어나 버렸다. 메락이 급히 마차 밖으로 달려 나왔지만 얼마나 빠른지 이미 뒤를 쫓기엔 무리였다.
“일단 도테트 님께 알려야….”
메락이 황급히 마차를 벗어나 도테트에게 달려갔다.
“무슨 일이냐?”
“헉헉… 그게, 용병 카일이 먼저 출발했습니다.”
“무슨… 카일이 먼저 가다니!”
도테트가 버럭 소리쳤다. 비단 도테트 뿐 아니라 짐을 정리하던 유모인 메아린 역시 도테트의 외침을 듣고는 깜짝 놀라 달려왔다.
“무슨 소리죠? 카일이 떠나다니!”
“…떠난 게 아니라 정찰을 한다며 먼저 출발했습니다. 도보로 이동 중 오크들이 기습이라도 한다면 큰일이라고….”
“정찰 정도야 메락이 해도 되는 것 아닌가요? 굳이 카일이 나설 필요는….”
“…아니, 그건 그렇지는 않죠.”
도테트가 메락을 대신해 말했다.
“메락은 정예 병사지만 많이 지쳤습니다. 저는 아가씨를 밀착해서 지켜야 하니, 카일이 정찰을 하는 게 맞긴 합니다. 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요.”
“카일도 도테트 님과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소규모 오크나 몬스터가 나타나면 피하는 게 아니라 직접 처리도 해야 한다고요.”
“무력 정찰까지…. 제법이군.”
도테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녀석이 먼저 앞서갔으니, 우리도 이젠 뒤처지지 않게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안전한 곳엔 나뭇가지에 천을 묶어 놓겠다고 했습니다.”
“잘됐군, 그럼 이만 가시죠. 아가씨.”
도테트가 손을 내밀었다.
“잠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모 메아린이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그럼, 저건… 누가 들고 가죠?”
“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마차 앞에 놓인 커다란 가방으로 향했다.
“제, 제가 들겠습니다.”
메락이 급히 달려갔다. 영애를 지켜야 할 기사 도테트가 검 대신 가방을 짊어질 수는 없으니 남은 사람은 결국 메락 뿐이었다. 하지만….
“크헉-!”
메락이 커다란 가방 하나를 기합까지 넣으며 힘겹게 들어 올리더니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저래서는 몇 발자국 걷지도 못하고 쓰러져 버릴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메아린의 얼굴은 더더욱 일그러졌다. 커다란 바위를 단번에 번쩍 들어 올리는 카일을 염두하고 짐가방을 꾸렸으니, 무거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유모가 당한 것 같죠?”
“명분도 충분하니 아무리 메아린이라고 해도 카일을 탓하진 못할 겁니다.”
“유모가 저렇게 당황한 모습은 처음 봐요.”
“그럴 겁니다. 저도 이렇게 당황스러운데 직접 당한 메아린은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메락을 사납게 노려보던 메아린이 가방을 빼앗더니 다시 내용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불필요한 물건은 최대한 버리고, 꼭 필요한 물건만 따로 챙겼다. 메락이 짊어질 수 있게 최소화한 것이다. 그래도 남는 물건은 따로 작은 가방에 담아 메아린이 직접 들었다.
“…카일, 널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메아린이 카일이 사라져간 곳을 사납게 노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유모 메아린이 카일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있을 그때, 카일은 길을 따라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
“큭, 지금쯤이면 난리가 났겠지?”
화가 잔뜩 났을 유모의 얼굴을 떠올리자 카일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어렸다. 유모 메아린이 내어놓은 짐들이 카일 자신을 염두하고 싸놓은 것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물론 짐 한두 개 정도 들어 주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노골적으로 강요하듯 내어놓은 짐가방을 카일은 들어줄 생각도, 의무도 없었다.
“그나저나 지금쯤이면 용병들이 도착할 만도 한데… 이상하군.”
비터와 마크를 먼저 보낸 건 아덱을 치료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마티슨 상단주라면 용병들을 추가로 보내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전투가 끝난 지금까지도 용병들이 도착하지 않았다면, 상단에도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카일이 정찰이란 명목으로 먼저 출발한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유모인 메아린과 논쟁을 벌이며 시간을 지체하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서둘러 상단과 합류하기를 선택한 것이다.
“지름길로 가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지.”
언덕을 넘으면 조금 더 빠르게 상단과 합류하겠지만 카일은 지금 혼자가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 오크 떼가 뛰쳐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여인들을 데리고 숲을 가로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카일은 가슴속에 피어나는 불안감을 애써 누르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 *
“빌어먹을!”
카일이 급히 언덕 위로 뛰어올랐다. 멀지 않은 곳에서 격렬한 전투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귀족 마차를 구하기 위해 아일론 상회를 떠났던 장소와는 달랐지만, 상단이 계속 이동 하다 습격을 당했다면 이상할 것 없는 위치였다.
황급히 언덕 위로 뛰어오른 카일의 눈에 펼쳐진 광경을 처참했다. 가파른 구릉을 배후로 두고, 전면에서 검은 오크 수십 마리가 상회를 완전히 포위한 체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이미 주변은 오크들의 시체로 가득했고, 하급 용병 몇몇이 마차에 올라 부상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나마 코퍼 용병대를 비롯한 마크와 비터만이 선두에서 오크를 저지해준 덕분에 상단 일꾼들이 석궁을 날리며 그나마 마차를 사수할 수 있었지만, 아이론 상회의 처지는 갈수록 위태로워질 것이었다.
잠시 전황을 살피던 카일이 재빨리 허리에서 활과 화살을 풀어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마차까지 달려가며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꽈드득-
카일의 단궁이 부러질 듯 휘어졌다. 장궁용 화살이다 보니 단궁에 사용하기엔 다소 긴 편이었지만, 단궁으로 사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투웅-
시위가 튕겨 나가는 묵직한 소음과 함께 빠르게 날아간 화살이 막 코퍼의 뒤를 덮치려는 검은 오크의 머리에 정통으로 박혔다. 얼마나 강력한지 두꺼운 두개골을 관통한 화살이 반대쪽 머리를 뚫고 나왔다.
“커억-!”
고통이 섞인 짧은 비명과 함께 오크는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코퍼가 깜짝 놀라 뒤돌아서서 두리번거렸지만, 곧 다른 곳으로 달려 가버렸다. 지금 중요한 건 오크들을 막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사이 카일도 쉴 틈 없이 화살을 날려 위기에 처한 용병을 구하거나 마차로 달려드는 오크를 저격했다. 잠깐 사이 카일의 화살에 쓰러진 오크는 벌써 열 마리가 넘어갔고, 덕분에 전장의 상황도 점점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이제 보니 자네, 궁술도 대단하군.”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도 카일은 아무런 동요 없이 시위를 놓았다. 누군가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카일도 잘 알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왜? 늦을 거라생각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글쎄요?”
카일이 피식 웃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며 커다란 짐가방을 등에 짊어진 메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헉헉… 여기 계셨군요.”
메락이 지친 얼굴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뒤로 유모인 메아린이 날카로운 눈으로 카일을 노려봤다. 하지만….
“너….”
“모두 도착하셨으니 여기서 잠시 쉬고 계십시오.”
스르릉-
메아린의 말을 단박에 끊은 카일이 검을 뽑아 들곤 곧장 언덕 아래로 달려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