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54. 백작성으로 가는길(7)
“크아악-”
혼란에 빠진 듯 사방을 돌아보던 오크들이 잠시 후 괴성을 지르며 서로를 향해 달려들더니 무차별적으로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검은 오크들이 회색 오크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저 녀석들 왜 저러지?”
“아무래도 불안합니다. 서둘러 물러나는 게….”
“어어, 저 녀석들… 이쪽으로 오는데요?”
버크가 당황한 얼굴로 다급히 소리쳤다. 회색 오크들이 검은 오크를 피해 물러나는 용병들의 뒤를 쫓기 시작한 것이다. 도망치는 오크의 숫자는 못 해도 40여 마리, 뒤를 쫓는 검은 오크들도 그에 못지않았다. 이들이 이대로 한꺼번에 밀려들면 용병이든 아일론 상회든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대장! 어쩌죠?”
야튜의 물음에 코퍼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용병들은 뒤로 물러나 중간중간 떨어져 나온 오크들을 요격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대로 물러나면 용병들과 아이론 상회가 휩쓸릴 거다.”
“설마 녀석들을 막겠다는 겁니까?”
“용병들이 다 달려들어도 안 됩니다. 차라리 도망가죠. 아무리 검을 팔지만, 골드 때문에 죽을 순 없지 않습니까?”
“그러시죠! 몇 년 서부에서 활동하다 돌아오면 아무도 모를 겁니다.”
“그럼, 저들 모두는 죽을 거다.”
“젠장! 대장, 여기서 오크를 막는다고 상회나 용병들이 죽지 않을 것 같습니까!”
“피해는… 줄지 않겠느냐!”
“빌어먹을! 우리가 명예를 먹고 사는 기사도 아니고….”
“너희는 돌아가라! 이곳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요! 대장이 없는 용병대가 어디 있다고….”
버크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대검을 바닥에 꽂은 뒤 가죽끈을 꺼내 대검과 손을 단단히 묶었다.
“버크….”
“대장, 죽어도 같이 살아도 같이 사는 거요.”
버크가 히죽 웃으며 어깨 위로 대검을 척 걸쳤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언젠가 대장 때문에 죽을 줄 알았지, 이런다고 누가 알아준다고…. 오늘로 대장에게 진 빚은 퉁 치는 거요.”
“야튜, 죽을 수 있다.”
“어차피 대장이 구해주지 않았으면 죽었을 목숨이요. 의리가 있지, 대장이 죽는데 도망칠 수는 없지 않소.”
야튜도 롱소드와 함께 허리춤에서 손도끼를 꺼내 들었다.
“형님! 아직도 손도끼 들고 다닙니까?”
“큭큭, 평생 손에 익힌 무기다. 버릴 수야 있나!”
버크와 야튜가 장난을 치듯 서로를 보며 히죽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코퍼가 피식 마주 웃었다.
“옵니다.”
버크와 야투, 코퍼가 무기를 고쳐잡았다.
“와악!”
셋은 괴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는 오크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까앙-
깡-
회색 오크 떼가 거칠게 밀려드는 파도라면 코퍼 용병대는 파도를 온몸으로 부딪히는 위태로운 작은 바위였다. 거칠 것 없기 밀려든 파도를 작은 바위가 모두 막을 수는 없지만, 물결은 바위를 만나 작은 와류를 만들고 정체되며 휘돌았다.
코퍼 용병대가 선두에서 오크들 막아내는 동안, 떨어져 나온 오크들을 요격하며 퇴각하던 하급 용병들도 서둘러 작은 진형을 만들며 오크 떼를 막아섰다. 덕분에 거친 파도가 여러 개의 작은 바위를 만나 잘게 부서지더니 결국 아일론 상회의 석궁에 소멸하고 말았다.
“헉헉! 대장… 후퇴해야 합니다. 저 녀석들은 겁먹고 도망치던 녀석들과는 다릅니다.”
야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코퍼에게 다가갔다.
“버크, 괜찮냐?”
“이쯤은 끄떡없습니다.”
버크가 당연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그 모습을 피식 웃으며 바라보던 코퍼가 멀지 않은 곳에서 살육을 벌이는 검은 오크를 확인하고는 얼굴을 굳혔다. 코퍼 용병대가 회색 오크의 질주를 막을 수 있었던 건 그들의 목적이 직접적인 전투보단 아일론 상회로 몰려드는 회색 오크들을 저지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색 오크는 검은 오크를 피해 도주하는 중이었기에, 병목현상으로 생긴 정체는 재앙과 같았다. 뒤쪽의 검은 오크들이 정체된 회색 오크의 후위를 덮친 것이다.
“좋다… 진형을 유지한 채 빠르게 뒤로 물러난다.”
코퍼의 명에 야튜와 버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곧 석궁 사정거리 안이다. 조금만 더….”
“취익- 죽어라!”
그때였다. 갑자기 측면에서 튀어나온 검은 오크가 코퍼를 향해 거대한 도끼를 휘둘렀다.
“안 돼!”
버크가 고함을 지르며 급히 코퍼를 구하려 했지만, 이미 도끼는 코퍼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코퍼는 그동안 오크를 상대하느라 오러와 체력소모가 극심했고 무엇보다 오크의 공격을 너무 뒤늦게 발견해 대처하기 힘들었다.
“…이제 끝인가!”
코퍼가 낮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스각-
쿠웅-
거대한 도끼와 함께 검은 오크의 팔이 바닥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쿠아악-”
잘려나간 팔을 붙잡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던 오크가 결국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처박혔다.
“마크!”
“서둘러야 합니다. 더 많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마크의 외침에 그때야 정신을 차린 코퍼와 일행들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 * *
“죽여!”
짧은 외침과 함께 방패 사이로 빠져나온 짧은 단창이 오크들의 가슴과 배를 꿰뚫었다. 병사들도 가슴속에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떠오르자 언제 지쳤냐는 듯 오크를 맹렬히 공격했다.
“이놈들, 어서 오너라!”
도테트 역시 과감하게 오크 무리로 뛰어들어 종횡무진 검을 휘두르며 오크들을 베어 넘겼다. 호전적인 검은 오크들이 모두 카일에게 몰려들면서 병사들과 기사 도테트는 상대적으로 약한 회색 오크들만 상대하면 되었기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것이다.
스각-
검은 오크 한 마리를 갈라버린 카일이 빠르게 전황을 살폈다. 일단 사기를 높인 덕분에 어느 정도 승기를 잡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지금이야 흥분한 상태로 전투에 뛰어든 덕분에 어떻게든 전투를 이어가고는 있지만 이미 체력이 바닥난 상태다. 무엇보다 앞을 가로막는 오크들의 수가 상당했기에 아마도 오래 버티긴 힘들 것 같았다.
“할 수 없지.”
고개를 저은 카일이 다시 오크를 향해 검을 뻗었다.
우웅-
카일의 검이 부르르 떨리더니, 청백색의 기운이 일어나 선명한 오러 소드를 형성했다.
스각-
카일의 오러 소드가 달려드는 오크를 무기와 함께 갈라버렸다.
“아아!”
회색 오크를 베어 넘긴 도테트가 괴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카일의 모습에 낮은 탄성을 터트렸다. 카일의 오러 소드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오크를 베어 넘기고 있었다. 화려함이 전혀 깃들지 않아 단순하면서도 정직했지만 그만큼 위력적이었다. 무엇보다 검술 어디에서도 군더더기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깔끔했다.
“허허, 저런 훌륭한 검술을 보다니….”
도테트가 고개를 저으며 검을 거뒀다. 카일이 오크 무리를 정확히 반으로 갈라버린 이후 사실상 전투가 끝이 났다. 오크들은 겁을 잔뜩 집어먹고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남은 것은 그저 학살뿐이었다. 이미 체력과 오러까지 말라버린 도테트는 전투가 끝났다는 안도감과 급격히 밀려드는 피곤함에 더는 검을 들 힘도 없었다.
“기사님!”
“메락! 무사했구나!”
도테트가 다가온 병사 메락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예, 살았습니다. 살았는데….”
메락이 털썩 주저앉았다. 끝까지 함께 싸우던 병사들은 마지막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크윽-”
메락이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슬픈 울음을 터트렸다.
“살자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자고, 그렇게 약속했는데… 크윽.”
“이 전투는 누구의 잘못도 아닌…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일이었네. 혼자 살아남았다고 자책하지 말게.”
도테트의 말에 메락이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기뻤습니다. 살아남았다고,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친우가, 함께했던 동료들이 비명 속에 제 눈앞에서, 그렇게 처참히 죽어갔는데…. 차라리 저 같은 놈이 죽었어야 했는데.”
고개를 숙인 메락의 외침에 도테트가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메락… 넌 죽음에서 살아남았다. 넌 충분히 기뻐할 권리가 있다. 네가 이 처절한 전투에서 살아남았다고 해서 누가 널 비난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넌, 그저 병사일 뿐이다. 죽어간 이들이 남기고 간 생명의 무게는 네가 아닌… 이들을 온전히 책임지고 지켰어야 할… 살아남은 내 몫이다.”
도테트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일어나 죽음이 가득한 대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는 카일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한심하군. 지금 저렇게 감상에 젖을 때인가?”
이곳에서 죽은 오크의 사체만 적게 잡아도 백은 훌쩍 넘었다. 혈향을 맡고 얼마나 많은, 얼마나 강력한 몬스터가 몰려들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도 모자랄 판에 한가하게 감상에 젖어 있으니 한심할 뿐이었다. 샤론 마을의 자경대였다면 필요한 오크 가죽을 벗기고 벌써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저기 감상에 젖은 채 죽은 대지를 바라보는 사람은 기사다. 신분제가 엄연히 존재하는 이곳에서 카일이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귀족과 인연을 맺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카일은 마차 앞쪽에 쓰러져 있는 검은 오크를 뒤집었다.
스륵-
쓰러진 오크의 이마에서 단검을 회수한 뒤 대충 핏물을 닦아낸 카일이 죽은 오크를 살폈다.
“아쉽군.”
“뭐가요?”
“가죽을 벗기면 최상급 오크 가죽으로 팔 수 있는데, 아쉬울 수밖에.”
“그럼 벗기면 되지 않나요?”
“그러고 싶긴 하지만, 이곳에 오래 머물 순 없어, 곧 몬스터가 몰려올 테니 서둘러 피해야지. 멍청하게 감상에 젖어 있다니… 그럴 시간이 있으면 죽은 동료를 서둘러 묻어 주는 게 먼저….”
카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 지금 누구와 대화하는 거지?’
“…그렇군요. 당신 말이 맞는 거 같아요.”
또다시 들려온 맑은 목소리에 카일이 살며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헉-
잠시 멍하니 두 눈동자를 바라보던 카일이 깜짝 놀라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당신이 우릴 구해준 사람이군요.”
“그렇습니다. 아가씨!”
언제 다가왔는지 카일의 옆으로 도테트가 위치해 있었다.
“언제….”
카일의 얼굴이 굳어졌다. 분명 도테트가 다가오는 걸 느끼지 못했다. 아무리 방심했다 해도 기척을 완전히 지우고 카일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카일 자신에게 문제가 생겼거나, 아니면 눈앞에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이 소녀 때문일 것이다.
“무례하군요, 아가씨를 그런 눈으로 보다니…. 귀족에 대한 예의를 모르나요?”
소녀의 뒤에 서 있던 중년 여인이 카일을 쏘아보았다.
“유모, 그러지 마요. 이 사람, 우리에겐 은인이에요.”
“하지만, 아가씨….”
소녀가 유모라 불린 여인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일이 들리지 않게 낮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자유민 용병 카일 입니다.”
“자유민?”
소녀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카일을 바라봤다. 소녀뿐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카일을 싸늘하게 바라보던 유모 역시 관심 있게 카일의 여기저기를 뜯어봤다.
작위를 받지 못한 귀족 자녀들이나 방계혈족, 몰락 귀족들, 극히 소수지만 높은 공을 세운 평민이 종종 왕실로부터 자유민의 직위를 하사받았다. 하지만 이는 무척이나 드물었다. 때문에 자유민이라면 대부분이 고귀한 귀족의 피를 이어받은 것으로 인식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왕실은 자유민이 공을 세워 다시 귀족의 작위를 습득할 경우를 대비해 귀족원에 따로 자유민에 대한 기록을 남겨놓고 있었다.
조금 전 보았던 그의 경지는 놀라울 정도로 대단했다. 소녀의 가문이 조금만 도움을 준다면 세습은 아니지만 단승 작위 정도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덤으로 카일이란 훌륭한 기사를 가문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네…!”
“죄송합니다만, 이곳은 위험합니다. 서둘러 피하셔야 합니다.”
카일이 급히 도테트의 말을 끊었다. 카일은 불편한 이 관계를 서둘러 끝내고 싶었다.
“흠… 알겠네.”
“필요한 물건만 간단히 챙겨 떠나야 합니다. 멀지 않은 곳에 아일론 상회가 있습니다. 그곳까지만 가면 안전할 겁니다.”
“아일론 상회?”
“상행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척후 마차를 발견하고 달려온 겁니다.”
“자네 혼자 말인가?”
“아닙니다. 동료가 있었습니다만, 오던 중 부상 때문에 돌아갔습니다.”
“습격을 받았단 말인가!”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브린의 배신 때문에 당한 부상이지만, 굳이 자세한 설명을 할 생각은 없었다. 자칫 상단 간 분쟁에 말려 귀족가의 영애가 죽을 뻔했다는 누명을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상단도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단과 합류한 뒤 다른 길을 찾는 것이 최선입니다.”
“알겠네, 준비하지.”
턱을 쓰다듬으며 도테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테트는 이미 지쳤다. 더구나 말도, 마차도 없이 영애를 데리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지금은 누구의 도움이라도 받아야만 했다.
도테트가 고개를 돌려 유모를 바라보았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준비하죠.”
유모가 소녀를 데리고 마차로 향했다. 그사이 카일과 도테트, 메락은 병사들의 사체를 모았다. 대부분은 정확한 신분을 확인할 수 없었기에, 온전한 사체를 제외하곤 한곳에 모아 가매장한 뒤 커다란 돌을 옮겨 덮었다. 물론 이 과정 대부분에 카일의 노력과 힘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