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53. 백작성으로 가는길(6)
“부사수, 서둘러 장전하라!”
“준비가 끝난 사수들부터 자유 사격이다.”
“4번째 마차 누구야! 버릭, 아직도 정신 못 차리나! 정면이 아니라 취약한 측면을 보호해야 할 거 아니야! 정신 똑바로 차려!”
“2번 마차, 장전 속도가 왜 저따위야! 사수가 누구… 페릴, 부사수 똑바로 훈련 안 시켜?”
마차 위에 올라선 토일의 입에서 거침없는 욕설과 질책이 난무했다. 마치 전장을 지휘하는 장수처럼 토일이 명령을 내리자, 상단 일꾼들이 노련한 병사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지부장님! 저길 보십시오.”
외곽에서 몰려드는 오크를 상대하고 있는 가장 선두, 1번 마차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마크와 비터입니다.”
“뭐야!”
토일이 황급히 고개를 들자, 맹렬하게 검을 휘두르며 포위망을 돌파하는 마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용병들을 이끌고 정면 돌파를 시도한 코퍼 대장과 합류하려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코퍼의 모습만 보일 뿐 정작 비터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비터는…?”
“저기입니다. 좌측!”
“좌측!”
좌측 숲에서 뛰쳐나온 비터가 아덱을 둘러업고 검을 휘두르며 포위망을 뚫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마크의 난입으로 포위망이 옅어져 비터가 돌파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으나, 순간 검은 오크가 난입하여 역으로 포위당할 위기에 빠졌다.
“뭘 멍하니 서 있나! 당장 지원사격, 아니, 1, 2번 마차 부사수들, 당장 사격 개시해!”
“지부장님! 그랬다간 다음 사격까지 텀이 너무 길어집니다.”
“빌어먹을, 그렇다고 저들을 죽일 수는 없잖아! 지금은 저 녀석들 살리는 게 먼저다. 당장 시작해!”
토일이 버럭 고함을 치며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아일론 상회의 마차 하나에는 보통 둘에서 셋 정도의 일꾼들이 배치되며, 석궁 역시 사람의 수에 따라 마차에 항시 보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위급 상황에서 석궁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선임뿐이었다. 상단의 석궁은 편리한 데다 무척이나 강력했지만, 그만큼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장전에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보통의 석궁은 전면의 등자에 발을 걸고 손으로 시위를 당겨 장전하는 방식을 사용했지만, 아일론 상회가 사용하는 석궁은 전혀 달랐다. 등자에 발을 거는 방식은 같지만, 시위는 석궁 후면에 달린 도르레와 물레를 감는 방식으로 장전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그만큼 강력한 위력과 사거리를 자랑했다. 또한 장전에 소모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두 명 이상의 부사수가 예비 석궁을 미지 장전해 발사간 텀을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부사수까지 한 번에 사격을 개시해야 하니, 비터를 구할 수는 있더라도 잠시간의 사격 공백으로 좌측 1, 2번 마차가 위기에 직면할 수 있었다.
“3번 마차에 전달, 지금부터 1, 2번 마차의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접근하는 오크를 전담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되는 대로 바로 시작해!”
토일의 명이 떨어지자 부사수들이 황급히 석궁을 들고 비터를 포위한 오크들을 조준했다.
“실수하지 말고 한 번에 처리한다, 자칫 비터가 맞을 수 있으니 최대한 신중히 발사하도록!”
“단번에 급소를 맞출 자신이 없으면 다리나 몸통을 노려라!”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 * *
스각-
“빌어먹을 녀석들, 왜 이렇게 강한 거야!”
앞을 막아선 회색 오크를 베어낸 비터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거대한 도끼를 피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쉽게 오크를 베어 넘길 수 있었지만, 갑자기 덩치 큰 오크들이 난입하며 전선이 한순간 뒤로 밀려나 버렸다. 물론 정상적인 상항이라면 검은 오크 정도야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을 테지만, 비터는 지금 혼자가 아니었다.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진 아덱을 보호하면서 밀려드는 오크를 상대해야 하는 정체 절명의 순간이었다. 이대로 포위망을 뚫지 못하면 살아남기도 어려웠다.
“젠장, 어쩌지…?”
비터가 아덱을 힐끔 돌아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이곳을 빠져나갈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덱을 포기하고 포위망을 돌파하는 것이었다.
비터는 아덱과 자신을 단단히 묶어둔 가죽끈을 손에 쥐었다. 이제 이걸 풀어버리면 아덱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진다.
“그럼… 살 수 있다.”
아덱과는 고작해야 코퍼 대장을 만나며 몇 번 인사를 나눈 정도, 용병들 사이에선 그 정도면 그냥 남이다. 살기 위해선 몇 년을 함께한 동료도 배신하는 용병 세계에서 아덱을 포기하는 건 이상 할 것 없는 행동이었다.
“개자식! 그놈과 난 다르다고…!”
비터가 잡았던 끈을 놓고는 두 손으로 검을 말아쥐었다. 아덱의 부상은 몇 년을 동고동락했던 브린의 배신 때문이었다. 여기서 아덱을 포기하는 순간 그 배신자 녀석과 자신이 다를 것 없어진다는 생각에 도저히 아덱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젠장, 하루에 두 번이나 배신당하게 할 수는 없잖아!”
버럭 고함을 지른 비터가 과감하게 정면을 막아선 검은 오크를 향해 뛰어들었다.
“죽어!”
쉬익-
비터의 검이 검은 오크의 심장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까앙-
거친 쇳소리와 함께 비터의 검이 막혔다. 검은 오크가 거대 도끼를 틀어 넓은 면으로 비터의 찌르기를 막아낸 것이다. 비터의 검이 도끼 깊숙이 박히긴 했지만, 도끼의 두께가 워낙 두꺼워 완전히 뚫지는 못했다.
“제수 옴 붙었군.”
비터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검이 도끼에 박혀 들자 오크가 도끼를 비틀어 비터의 검을 봉쇄해 버렸다. 사방이 오크로 포위된 상태에서 검까지 봉쇄당했으니 사실상 죽었다고 봐야 했다.
“쳇, 그래도 함께 갈 동지가 있어 다행인가?”
비터가 고개를 축 늘어트린 아덱을 힐끔거리다 거대한 클럽을 높이 치켜든 오크를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클럽으로 맞아 죽는 건 싫은데….”
비터가 체념한 채 눈을 감았다.
“발사!”
그때였다. 멀리서 들려온 어렴풋이 들려온 목소리에 비터가 눈을 번쩍 떴다. 순간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수발의 강력한 볼트가 비터를 포위한 오크에게 떨어져 내렸다.
퍽-
퍼퍽-
퍽-
가장 먼저 비터를 내려치려던 오크의 머리통에 볼트가 박혔고, 앞을 막던 검은 오크가 동시에 바닥에 쓰러졌으며, 다리나 허벅지 깊숙이 볼트가 박힌 오크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크헉-”
“취익-컥.”
“크아악-”
황급히 도끼에 박힌 검을 뽑아낸 뒤 고통 속에 비명을 지르는 오크들의 목을 베어 넘겼다.
“빌어먹을 놈들, 죽을 뻔했네!”
비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차를 바라봤다. 마차 위에 올라탄 상단 일꾼들이 손을 흔들며 그를 반겨주고 있었다.
“아아! 그래, 고맙다고. 나중에 술 한잔 살게!”
비터가 마주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었지만, 마차 위에 올라선 상단 일꾼들은 더욱 거세게 손을 흔들며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여럿이 동시에 고함을 지르니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는 거야?”
비터가 머릴 긁적이며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쿵-
순간 묵직한 진동과 함께 꼬리뼈에서 시작된 싸늘한 기운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비터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조금 전까지 서 있었던 자리에 커다란 도끼가 바닥 깊숙이 박혀 있었다.
깜짝 놀란 비터가 주춤 뒤로 물러나더니 황급히 몸을 틀어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크어억-”
“취익- 죽여라!”
뒤에서 들려온 괴성에 고개를 힐끔 돌리자 다수의 검은 오크와 회색 오크들이 자신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으헉, 사람 살려!”
비터가 마차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스각-
앞을 막아선 오크를 단번에 베어버린 코퍼가 거친 숨을 내 뿜었다.
“헉헉… 이거 지치는군.”
“이만… 돌아가시지요. 너무 깊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요, 이러다 다 죽겠습니다.”
등을 마주한 야튜와 버크가 마주 다가오는 오크를 경계하며 말했다.
“다른 녀석들은 어떠냐?”
“아직은 그런대로 버티긴 하지만 이미 상당히 지쳤습니다. 오래는 버틸 수 없을 겁니다.”
“역시 한계인가?”
“오크 숫자가 너무 많아요. 이렇게 한꺼번에 달려드는 건 처음입니다. 마치….”
“미친 녀석들처럼 말이지….”
“네.”
“…브린과 아덱은 괜찮을까요? 그쪽은 인원도 적고… 오크 숫자도 상당한 것 같던데….”
“그쪽은 기사들도 있고 카일과 마크도 있으니 오히려 여기보단 오히려 여유가 있을 거다.”
“그렇다면야 다행이지만….”
코퍼가 회색 오크가 휘두른 클럽을 피해내는 동시에 검을 짧게 휘둘러 클럽을 단번에 잘라 버렸다. 코퍼의 뒤를 바짝 뒤쫓던 버크의 검이 회색 오크의 목을 꿰뚫고 지나갔다. 마치 오랫동안 합격을 수련한 듯 모든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목이 꿰뚫린 오크를 발로 차 달려드는 오크에게 날려 보낸 버크가 검을 한 차례 털어내며 코퍼와 야투를 따라 진형을 유지하며 뒤로 물러났다.
“야튜, 용병들에게 신호를 보내게. 마차 앞으로 집결! 이만하면 초전을 잘 견뎠으니 하급 용병들도 도망치진 않을 거다.”
“물론입니다. 마차도 안전하고 피해도 적으니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야튜가 환하게 웃으며 품에서 작은 피리를 꺼냈다. 전장에서 효율적으로 신호를 보내기 위해 마련한, 뼈로 만든 골 피리였다.
삐이익-
야튜가 힘껏 피리를 불곤 진형을 유지하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힘겹게 전투를 벌이던 하급 용병들도 신호를 따라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일단 석궁 사거리 안으로만 들어가면 조금 더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어 용병들의 걸음은 더욱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저기, 대장.”
빠르게 퇴각하던 코퍼를 향해 버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브린 말입니다.”
“그 녀석이 왜? 설마 또 사고라도 친 거냐?”
코퍼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브린은 성격이 활달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해 일견 따르는 사람이 많아 보이지만, 술과 도박, 여자를 좋아하니 조용할 날이 없었다. 특히 용병들 간 사기도박을 벌이거나 남의 여자에게 집적거리다 감옥에 갇히거나 싸움에 휩쓸렸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코퍼와 버크가 가장 앞장서서 브린을 구해냈었다.
“아니, 아닙니다. 그냥… 조금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소리냐?”
“그게, 그 녀석이 얼마 전 제게 단검을 줬습니다.”
“단검? 설마 녀석이 제일 아낀다는 그거 말이냐?”
“네, 그… 기사와의 내기에서 얻었던 단검 말입니다. 선물이라며… 그럴 녀석이 아닌데 갑자기….”
“그게 언제냐?”
“삼 일 전, 그러니까 영주성에 도착한 날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긴 했습니다. 항상 버크와 함께 가던 척후도 오늘따라 아덱과 함께 가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가르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덱이 용병대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긴 한데… 확실히 이상하긴 하군.”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심하던 코퍼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일단 이야기는 나중에. 지금은 전투에 집중하도록.”
“알겠… 대장!”
야튜가 깜짝 놀라 다급히 코퍼를 불렀다.
“무슨 일… 이런!”
뒤로 물러나던 코퍼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저 녀석들 뭐야!”
용병들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던 오크들이 갑자기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