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52. 백작성으로 가는길(5)
언덕을 내려온 카일은 최대한 몸을 낮춰 조심스럽게 마차로 접근했다.
“…흠.”
커다란 전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전황을 살피던 카일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언덕 위에서 보던 것보다 상황이 심각했다. 남은 병사라고는 고작해야 다섯을 넘지 않았고, 앞장서서 오크를 막아야 할 기사는 제법 심각한 부상을 당했는지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처절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에 반해 못 해도 수십 마리의 오크가 아직도 마차를 포위한 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검은 복면인들이 사라지면서 오크들 사이에서도 혼란이 생겼는지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하긴 검은 오크와 회색 오크가 함께 있는 것도 이상하지.”
오크라고 다 같은 오크들이 아니다. 언뜻 보기엔 비슷하게 보이지만 털이나 눈동자의 색에 따라 성격이나 습성도 달랐고 신장의 차이도 있었다. 보통 대륙에 알려진 오크는 회색 오크로 인간보다 약간 작은 신장에 번식력이 뛰어나고 적응력이 강해 대륙 어느 곳이든 널리 서식하는 종이다. 하지만 검은 오크는 일단 신장에서 인간보다 덩치가 컸고 오크 중에서도 가장 힘이 강했다. 다만 번식력이 회색 오크보다 떨어졌고 대륙 남쪽에서만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오크랜드에서 잡히는 오크 대부분이 바로 이 검은 오크들로, 오크 중에서도 가장 가죽의 질이 좋았다. 아일론 상회가 오지 마을인 샤론마을까지 직접 원정 상행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검은 오크 가죽 때문이었다.
검은 오크와 회색 오크는 양립하기 힘든 종족이다. 호전성이 강한 검은 오크가 종종 회색 오크를 약탈하기 때문이다. 물론 회색 오크 역시 자신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검은 오크를 살려두지 않았다. 그런 두 종족이 마법에 취해 인간을 공격하다 정신을 차렸으니 혼란에 빠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 상황을 지켜본다.”
카일이 내린 결론이다. 두 종족의 비율은 대략 6대4로 회색 오크가 우위를 보이지만 종족 특성상 전체적인 전력은 비슷했다. 만약 두 종족이 전투를 벌이면 사실상 양패구상이다. 굳이 카일이 나서서 마차를 구원할 필요가 없으니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만약 두 종족이 사냥감을 공동으로 사냥하기로 한다면 카일로서는 나설 수밖게 없게 되는 것이다.
“취익- 사냥이다.”
“캬아!”
“인간을 죽이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협곡 안에서 들려온 오크 특유의 괴성과 어눌한 말투에 카일의 얼굴이 찌푸렸다. 카일의 우려대로 반목하던 오크들이 인간이란 공동의 사냥감에 합심하기로 한 것이다.
“귀찮아졌군.”
마차를 향해 서서히 거리를 좁혀가는 오크들을 보며 카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숲을 빠져나왔다. 카일이 숲을 빠져나와 모습을 드러냈지만 카일을 공격하는 오크는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마차로 향해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카일은 쉽게 오크들의 후위로 다가설 수 있었다.
“크르륵-”
붉게 충혈된 눈동자와 낮은 으르렁거림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섰다. 카일은 천천히 단검을 뽑은 뒤 조심스럽게 오크 뒤로 바짝 다가섰다.
“취익?”
카일이 바짝 다가서자 이상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린 오크와 카일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오크가 당황한 표정으로 카일을 멍하니 바라보자, 카일이 히죽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잘 가!”
카일의 단검이 전광석화 같이 뻗어나갔다.
푸욱-
단검은 정확히 오크의 목을 꿰뚫었다.
“크르륵-”
오크는 목을 부여 잡으며 비명을 지르려는지 입을 뻥긋거렸지만, 나오는 건 낮은 그르렁거림과 피거품 뿐이었다.
“곧 친구들도 보내 줄 테니 조용히 누워 있어.”
카일이 무너지는 오크를 받아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곤 또다시 다른 오크에게 다가갔다. 이번엔 회색 오크, 카일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체구에 신장도 검은 오크에 비해 확실히 작았다.
카일은 회색 오크의 머리를 재빨리 낚아채 뒤로 확 잡아당겼다. 영문도 모르고 뒤로 넘어간 회색 오크의 목엔 언제 박아 넣었는지 카일의 단검이 박혀 있었다.
스윽-
단검을 뽑아낸 카일이 다시 오크들의 뒤쪽으로 바짝 따라붙었다. 그 사이 마차로 접근한 오크들이 본격적으로 마차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취익- 죽어라!”
커다란 클럽이 방패 위로 작렬했다.
꽝-
“밀리면 죽는다. 진형을 유지해!”
검은 오크의 강력한 일격에 방패를 든 병사가 뒤로 주춤 밀려나자, 힘겹게 달려드는 오크를 배어넘긴 기사 도테트가 다급히 외쳤다.
“아, 알겠습니다.”
병사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방패를 고쳐 잡고선 있는 힘껏 오크를 밀어냈다. 하지만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밀려오는 오크는 수십 마리였다. 고작 병사 다섯으로 오크의 공격을 막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뒤로 밀리고 밀리던 병사들이 마차에 부딪혔다.
“안 돼!”
도테트의 검이 푸른 빛에 휩싸였다. 고작해야 검날에만 가느다란 오러를 감쌀 정도로 보잘것없지만, 이것만으로도 병사들을 밀어붙이는 오크들을 베어 넘길 수 있었다. 그 사이 뒤로 밀려났던 병사들이 황급히 전열을 가다듬으며 다시 마차와 거리를 벌렸다.
“빌어먹을….!”
기사 도테트의 활약에 오크들이 뒤로 물러났지만, 그 사이 방패병 하나가 오크에게 붙잡혀 끌려가 버렸다.
“아악- 살려줘-!”
비명을 지르며 끌려가는 병사의 모습에 얼굴을 찌푸렸지만 이미 구하기엔 늦은 상황, 도테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는 없었다.
퍼억-
발버둥을 치는 방패병의 머리 위로 커다란 클럽이 떨어져 내렸다.
“아악-”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고, 흥분한 오크는 클럽을 더욱 잔혹하게 휘둘렀다.
“이놈들!”
“경거망동 말게! 녀석들이 노리는 게 바로 그거다.”
병사들의 얼굴에 잠시 분노가 어렸지만 분노는 곧 공포로 변하기 시작했다.
‘…틀렸는가?’
도테트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병사들의 얼굴엔 공포가 어렸다. 이제까지 맹목적으로 공격만 이어가던 오크들이 갑자기 변했다. 이젠 드러내놓고 잔인하게 병사를 죽이고 있었다. 이미 상당한 타격을 입은 병사들에겐 변해버린 오크들의 행동이 오히려 치명적이었다. 그동안 정신없이 공격을 막아내기 급급해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는데, 잠깐의 휴식기가 오히려 병사들에게 공포를 각인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을 주고 만 것이다.
도테트가 비통한 얼굴로 마차를 바라보았다. 굳게 닫혀있긴 하지만 마차 안의 상황은 확인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놈들! 마차로 다가가려면 날 넘어야 할 것이다.”
병사들 앞을 막아선 도테트가 결연한 표정으로 오크들을 노려봤다. 이것만이 병사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다잡을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어차피 이번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다음은 없었다.
“크르륵-”
도테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흉측한 미소를 머금은 오크들이 마른 입술을 핥으며 다시 다가오기 시작했다.
“와라!”
도테트가 가죽끈으로 검이 빠지지 않게 단단히 묶었다. 죽을 때까지 절대 이 자리를 벗어나지 않겠단 강력한 의지였다.
“취익-”
도테트의 의지에 자극을 받았는지 회색 오크들을 거칠게 밀어내며 거대한 도끼를 손에 든 검은 오크들이 앞으로 밀고 나왔다.
“크르륵- 머리통, 부숴버린다.”
“흉측한 놈, 머리통을 날려주마!”
도테트가 검은 오크를 향해 오히려 먼저 달려들었다.
후웅-
거친 파공성과 함께 검은 오크의 도끼가 횡으로 휘둘러졌다. 공격뿐 아니라 방어까지 생각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도테트는 엑스퍼트다. 비록 오러와 체력이 이미 바닥났지만, 오크의 공격에 쉽게 당할 만큼 어리숙하지 않았다. 오크를 향해 달려들던 도테트의 신형이 아래로 푹 꺼졌다. 잔뜩 몸을 움츠려 도끼를 피했다가 반사적으로 튕겨 오르며 도테트의 장검이 벼락처럼 검은 오크의 심장에 파고들었다.
푸욱-
“크아악-”
심장 깊숙이 파고든 도테트의 검을 부릅뜬 눈으로 내려다본 검은 오크가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반사적으로 들고 있던 도끼를 놓아버렸다. 도끼는 원심력에 따라 빙글빙글 돌더니 회색 오크의 가슴에 박혔다. 하지만 도테트를 상대하던 오크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검은 오크가 갑자기 도테트의 팔과 검을 덥석 붙잡았다.
“취익- 함께 죽자!”
“이… 놈!”
도테트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설마 오크가 이런 식으로 행동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크르륵-”
우측에 서 있던 또다른 검은 오크들이 회색 오크를 밀치며 다가오더니 머리 위로 도끼를 높게 치켜들었다. 검은 오크에게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던 도테트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이렇게 쉽게 오크의 손에 잡혀 목숨을 잃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것이다.
“…끝까지 지키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도테트가 슬픈 눈으로 마차를 돌아보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쉬익-
그때였다. 귓가로 들려온 날카로운 바람 소리에 감았던 도테트의 눈이 번쩍 떠졌다.
퍼억-
도끼를 높이 치켜들었던 오크의 이마에 단검 하나가 자루까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취.”
쿵-
검은 오크가 그대로 뒤로 넘어가 버렸다. 그사이 도테트도 생기를 다한 오크의 몸에서 검을 뽑아내 뒤로 물러났다. 이 모든 것이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도테트 자신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크아악-
“취익- 인간이다!”
오크들이 괴성을 지르며 일제히 고개를 돌려 후위를 바라봤다. 덕분에 도테트 역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존재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번 놀랄 수밖에는 없었다. 정체 모를 사내의 뒤로 오크들의 사체가 여기저기 널려져 있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열 마리는 충분히 넘어 보였다. 그러한 중에도 오크들이 아무런 낌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단 뜻이었다.
“하하! 이거, 들켜 버렸군.”
분노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크들의 모습에 카일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곤 곧장 횡으로 검을 그었다.
스악-
빠르게 뻗어간 검이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오크의 가슴을 길게 갈랐다.
“크악- 죽여라!”
오크의 외침에 카일을 바라보고 있던 오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젠장! 조금 더 죽일 수 있었는데….”
카일이 아쉬운 듯 고개를 저으며 다가오는 오크를 향해 마주 달려갔다.
휘잉-
거대란 클럽이 머리 위로 떨어지자 카일이 몸을 반 바퀴 회전하며 클럽을 피해 옆에서 다가오는 오크의 팔을 갈랐다.
“크악-”
팔이 잘려 비명을 지르는 오크를 낚아챈 카일이 뒤에서 날아드는 클럽을 향해 집어 던졌다.
퍼억-
클럽을 정통으로 맞은 오크의 머리가 박살이 나며 녹빛 핏물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 사이 낮게 자세를 낮춘 카일이 빠르게 좌우로 검을 휘두르며 다가오는 회색 오크를 갈랐다.
“뭐하십니까!”
카일이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도테트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도테트가 뒤에서 있는 병사들을 보며 외쳤다.
“지금이다. 공격하라!”
4명의 방패병들도 다급히 창과 방패를 들고는 앞으로 뛰쳐나왔다. 혼자서는 오크 한 마리 상대하기 힘들지만, 4명이 진형을 이루면 다르다. 진형을 형성하고 방패를 앞세운 병사들이 오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오크들이 다시 방패에 달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