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49. 백작성으로 가는길(2)
“카일, 넌 따로 신고식 같은 건 필요 없다.”
“신고식… 그런 게 있긴 하군요.”
“물론 있다. 이제 막 용병이 된 녀석들을 상대로 텃세를 부리기도 하고 어떨 땐 시비를 걸기도 하지.”
“유치하군요, 자신보다 약한 자를 괴롭히다니….”
전생의 기억, 무시와 조롱을 당했던 어린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는지 카일의 얼굴이 깊게 가라앉았다.
“쯧, 이거 왠지 나쁜 놈이 된 기분인데?”
“확실히, 착한 놈은 아니지.”
“뭐야!”
비터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노려보았지만, 마크는 고개를 돌려 깨끗이 무시하며 카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고식이란 것 때문에 기분이 상한 거냐?”
“세상이 힘 있는 자의 뜻에 좌우되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이제 막 용병이란 세계에 발을 들인 사람들을 신고식이란 명목으로 괴롭히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해요.”
“그래, 용병 중엔 힘만 믿고 초짜 용병들을 괴롭히는 녀석들도 있지, 하지만 신고식이란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무슨… 말입니까?”
“넌 용병이 뭐라고 생각하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카일이 마크를 바라보았다. 토일에게 들었던 말을 이번엔 마크에게서 똑같이 듣고 있었다.
“검을… 파는 자.”
“하하, 상단 녀석들이 하는 말을 너에게 듣게 될 줄은 몰랐군.”
마크의 웃음소리에 카일이 무안한지 고개를 숙였다. 검을 파는 자, 토일에게 들었던 말을 자신도 모르게 그대로 내뱉은 것이다.
“뭐,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건 용병을 단지 골드, 돈이라는 관점에서 본 것뿐이다.”
“그럼 용병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보나요?”
“죽음 위를 걷는 자!”
비터가 마크의 말에 탄성을 터트리며 카일의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캬! 멋지지 않냐? 죽음 위를 걷는 자.”
허공에 화려하게 글자를 그리듯 손가락을 휘적이는 비터의 모습에, 마크가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너 글자 모르잖아!”
화려하게 손가락을 휘젓던 비터의 손이 허공에서 뚝 멈췄다. 그렇다. 비터는 아직 문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비, 빌어먹을… 녀석, 한참 기분 좋았는데,.”
“그러게, 읽고 쓸 정도는 배워야 할 것 아니야!”
“용병이 검만 잘 쓰면 되지 글자는 무슨, 일없다.”
비터가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나 버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일이 의아한 듯 마크를 바라보았다.
“죽음 위를 걷는 자! 정확히 썼습니다.”
“알고 있다. 자기 이름 하나도 못 쓰는 녀석이 저 문장 하나만은 달달 외우고 있지.”
뒤로 물러난 비터를 바라보던 마크가 말을 이었다.
“용병의 삶은 항상 죽음과 함께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그래서 오늘 나와 함께 걷는 용병들의 실력과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혹 등급은 낮지만, 경험 많은 용병이 대장을 맡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다, 아주 특별한 의뢰의 경우 실력보다는 경험을 따지기도 하지, 하지만 이제 막 용병이 된 자는 어떠냐? 누구도 그에 대해 알지 못한다. 실력도, 경험도, 하다못해 성격까지…. 그런 녀석에게 내 목숨을 맡겨야 한다면 말이다.”
“…불안하겠죠.”
“맞다. 녀석에게 내 목숨이 달려있으니 정확한 실력과 능력을 파악해야 한다. 실력은 물론 인내심, 성격, 마지막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 이 모든 걸 단시간에 알아내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직접 확인하는 것이군요.”
마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함께 훈련하며 진형을 이루고 싸우는 병사들이나 기사들은 집단의 힘으로 부족한 실력과 경험을 보완할 수 있지. 하지만 용병은 다르다. 개인의 실력과 경험이 생과 사를 가른다. 그러니 신고식이란 명목으로 시비를 걸기도 하고, 직접 검 맞대고 실력을 가늠하기도 하지.”
“그럼 전….”
“넌 이미 비터와 대련을 통해 확실하게 실력을 검증받았으니 신고식 같은 건 필요가 없지, 코퍼 용병대를 제외하면 나와 비터의 실력이 용병들 중 가장 높았으니까.”
대련에서 카일은 비터를 압도했다. 이미 실력을 검증한 상황에서 카일에게 시비를 걸 용병은 없었다. 그래서 가장 힘들고 위험한 곳에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셋을 배치한 것이다.
“그렇다고 위험한 후방에 배치됐다고 기분 나빠할 이유는 없다, 원래 실력이 좋은 용병일수록 가장 위험한 곳에 배치되기 마련이니 말이다.”
뒤로 물러났던 비터가 어느새 옆으로 살며시 다가와 말했다.
“맞다. 하는 일이 다른 건 어쩔 수 없지, 그리고 후방이라고 그리 나쁜 건 아니다. 상단주나 코퍼 대장의 눈치를 볼 일도 없고, 나름 혜택도 있으니 말이야.”
“혜택요?”
“큭, 나중에 보면 안다.”
비터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카일은 그 외에도 마크와 비터를 통해 용병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흠…. 무슨 일이 있나 본데?”
잠시 후, 앞서가던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자 마크와 비터의 얼굴에 약간의 긴장이 어렸다. 한적한 길에서 갑자기 마차가 멈춰서는 건 그리 좋은 일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펄럭-
멈춰선 가장 후위 짐마차의 천막이 젖혀지며 상단 일꾼 하나가 고개를 쑥 내밀었다.
“용병대장께서 세 분을 찾습니다. 서둘러 행렬의 선두로 오시길 요청하셨습니다.”
길이 좁아지고 대열이 길게 늘어나자 따로 전령을 보내지 않고 마차에 타고 있던 상단 일꾼을 통해 말을 전해 온 것이다.
“우리 셋이 모두 빠지면 이곳은 누가 지킵니까?”
“잠시 동안… 제가 경계를 설 겁니다.”
이야기를 전하던 상단 일꾼이 장전된 석궁을 들어올렸다.
“아무래도 일이 생긴 것 같다. 서둘러 가보자.”
마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비터와 카일이 서둘러 앞쪽으로 달려 나갔다.
* * *
용병대장 코퍼 뿐 아니라 코퍼 용병대 전원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서 오게.”
“무슨 일입니까?”
카일 일행이 서둘러 다가가자 코퍼가 바로 이야기를 꺼냈다.
“앞서가던 척후가 오크에게 공격받고 있는 마차 한 대를 발견했네, 좁은 길을 막고 사방에서 달려드는 중이라 고전 중이라는군.”
“마차라면… 귀족입니까?”
“기사가 섞여 있다니 귀족이 확실해.”
“그럼 별문제가 있겠습니까? 기사들이라면 오크 정도야….”
“숫자가 문제야. 족히 백여 마리가 넘어. 기사들만으론 힘들 거다.”
코퍼의 말에 마크와 비터가 심각하게 굳어졌다. 백여 마리의 오크라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상단주께선 뭐라고 하십니까?”
“그들을 도와주길 바라시네, 그래서 자네들을 부른 것이고.”
“저희만 가는 겁니까?”
“상단을 지켜야 하니 모두가 갈 수는 없다.”
“조금… 위험하군요.”
“강요할 생각은 없다.”
아무리 코퍼가 현재 용병들을 이끌고 있지만, 위험에 처한 귀족을 돕는 건 코퍼로서도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상단에서도 계약 외적인 일이기 때문에 거절을 한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때문에 코퍼도 명령이 아닌 부탁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용병대장이 상단주의 마차를 떠날 수는 없기에 가장 실력이 좋은 셋과 척후를 보냈던 브린와 아덱을 함께 보내려는 것이다. 하지만 카일 일행이 거절한다면 코퍼 역시 깨끗이 포기할 생각이었다. 코퍼를 제외한 D용병만으론 백여 마리에 달하는 오크를 상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엑스퍼트인 마크와 카일의 도움이 절실했다.
“대가는 있겠죠?”
“물론, 상단주께서 금화를 약속하셨다.”
마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비터를 돌아봤다.
“어차피 두 사람이 결정할 문제, 난 그냥 따르지.”
“전 상관없습니다. 오크 정도야….”
“그럼 결정은 났군요.”
“잘 생각했다. 그럼 한시가 급하니 바로 출발하게.”
코퍼가 브린와 아덱을 돌아봤다.
“따라오시죠.”
브린이 앞서 달려가자 그 뒤를 카일 일행이 바짝 뒤쫓았다. 한참을 달리던 브린과 아덱이 갑자기 길에서 벗어나 전나무가 빽빽한 숲속 구릉을 향했다.
“왜 방향을 바꾼 겁니까?”
“지름길입니다. 여길 넘으면 바로 보일 겁니다.”
“잠깐!”
앞을 달려가던 카일이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마크와 비터가 카일에게 다가갔다.
“오크입니다.”
“뭐?”
“사방에 오크가 깔렸습니다.”
“말도 안….”
크르륵-
우거진 숲사이로 들리는 낮은 울림과 함께 하나둘 오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에서 다가오는 오크의 숫자는 적어도 오십 마리, 카일이 멈추지 않았다면 오크들의 급습에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빌어먹을….”
“저놈들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이럴 리가….”
아덱이 당황한 얼굴로 주춤 물러났다. 오크들은 아덱과 브린이 척후를 나갔다 되돌아왔던 길을 정확히 알고 숨어 있었다. 마치 이 넓은 숲에서 정확히 이 길로 되돌아올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푸욱-
“크윽- 브린, 너….”
옆구리로 파고드는 차가운 검날을 붙잡은 아덱이 브린을 노려봤다.
“미안, 이런 빌어먹을 용병 짓은 그만 끝내고 싶어서 말이야!”
“…너 이 개자식, 감히…. 대장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다.”
“큭, 멍청한, 아덱…. 놈들이 내건 조건이면, 대장도 날 어쩔 수 없을 거다.”
아덱을 향해 속삭이듯 말하던 브린이 급히 몸을 돌려 아덱을 힘껏 밀어내며 뒤로 물러났다.
“아아! 그렇겐 안 되지.”
“눈치가 빠르군.”
브린에게 떠밀린 아덱을 받아낸 카일이 얼굴을 찌푸렸다.
“네놈이 펼쳤던 그 빠른 검, 아직 잊지 않았거든.”
“그래서 날 피해 도망갈 수 있을까?”
“큭, 맞아…. 넌 비터나 마크보다도 강한 존재다. 네놈의 빠른 검… 난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저 녀석들은 어떨까? 날 쫓을 동안 녀석들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는 브린과는 달리 오크들은 점점 더 거리를 좁혀 왔다.
“오크를 조종하는군.”
“이 반지 덕분이지.”
손가락에 끼워진 검은 반지를 들어 올린 브린이 피식 웃었다.
“이대로 물러갈 생각인가?”
“어차피 내 목적은 시간만 끌면 되는 거라서 말이지….”
“어느 쪽을 노리는 것이지? 귀족 마차? 아니면 아일론 상회?”
카일의 말에 브린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생각보다… 똑똑하군.”
“작은 상단 하나 잡겠다고 이런 일을 벌였다고 보긴 어렵지 않나?”
“하긴, 좀 과하긴 하지.”
“역시, 목적은 귀족 마차인가?”
“글쎄? 그건 나도 궁금하군.”
브린이 피식 웃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부디 살아남길.”
“멈춰!”
분노한 아덱이 소리쳤지만, 브린의 모습은 어느새 오크들 사이로 빠르게 사라져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이제 어쩌지?”
천천히 다가오는 오크를 보며 비터가 얼굴을 찌푸렸다. 여느 오크들과 다를 것 없는 흉측한 모습이지만, 단 하나 다른 것이 있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무기들이 하나같이 정련된 금속제 무기라는 사실이었다.
“어차피 방법은 두 가지, 이대로 돌아가 코퍼 대장에게 결정을 맡긴다. 다른 하나는….”
“처음 계획대로 오크를 뚫고 귀족 마차를 구하는 거겠죠.”
“맞아! 목적이야 귀족일 테니 놈을 구하면 이걸 지시한 녀석도 역시 타격을 입겠지.”
“우리가 놈을 구하고 다시 돌아갈 때까지 상단이 버틸 수 있느냐가 문젠데, 잘못하다간 상단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게 맞는 것 같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돌아가자!”
카일을 비롯해 비터와 마크 모두 아일론 상회와 호위 용병 계약을 맺었다. 가장 우선할 수밖에 없는 건 상단의 안전이다. 상단이 위험에 처한 사실을 안 이상 돌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럼. 여기서 갈라지는 건 어떻겠습니까?”
“무슨 소리냐? 갈라지다니?”
“두 분은 다친 아덱 님을 데리고 돌아가십시오. 전 마차로 가겠습니다.”
카일의 말을 잠시 이해하지 못한 비터가 눈을 끔뻑이며 마크를 돌아봤다.
“이 녀석….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