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48. 백작성으로 가는길(1)
“왔느냐?”
“네, 마티슨 님께서 찾으셨다고 들었어요.”
“상단주님은 쉬고 계시니 나와 이야기하면 된다.”
상단주인 마티슨은 늦은 저녁까지 다핸 남작과 술잔을 기울이다 새벽녘에나 도착해 마차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토일은 마차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그래, 용병패는 받아 왔느냐?”
“네?”
“용병 길드에 다녀온다고 했으니 용병패를 받아 왔을 것 아니냐?”
카일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토일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한 것이다.
“아… 네, 용병패 받아왔습니다.”
“잠시 볼까?”
토일이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용병패는 왜…?”
“일단 용병패부터 확인하고 말해주마.”
“알겠습니다.”
카일이 어색하게 웃으며 용병패를 내밀었다.
“흠… C급이군, 길드에 처음 가입하고 받은 용병패가 C급이라니, 그럼 최소 소드 엑스퍼트 초급…. 휴, 이거 생각보다 실력이 대단한걸.”
“그걸 어떻게….”
“십수 년 동안 상단에 필요한 용병을 선별해 고용한 나다. 이런 것쯤은 식은 스프 먹기보다 쉽지.”
토일이 웃으며 용병패를 카일에게 돌려줬다.
“용병패를 먼저 확인한 건, 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기 위해서다.”
“제안요?”
토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성으로 갈 동안 우리와 계약하는 게 어떻겠느냐? 상단 호위를 하다 보면 용병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을 거다.”
“상단엔 호위 용병들이 많이 있습니다. 상행 중 위험이 발생하면 저도 도울 거고요. 굳이 계약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녀석, 용병이 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멀구나!”
“네?”
“목숨을 공짜로 파는 용병이 어디 있느냐?”
토일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왜, 우리 아일론 상회가 네게 잘 보이려, 하지 않아도 될 계약을 맺으려는 것 같으냐?”
“그건….”
토일의 직설적인 물음에 마음이 읽힌 듯 카일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이거 정확히 마음을 읽었나 보군. 뭐, 틀린 생각도 아니다.”
“네?”
“반쯤, 아니 반보다 조금 더 많이, 네 생각대로 너와 인연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목적도 있다. 도자기나 옹기의 가치가 그만큼 높기 때문이지.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너와 용병 계약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럼, 다른 이유도 있다는 말씀이세요?”
“일단, 너와의 용병 계약을 먼저 제안한 사람은 코퍼 대장이다.”
“코퍼 대장이요?”
토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번 상행은 코퍼 용병대와 함께 계약을 맺었던 용병단 하나가 사라지며 일정을 미루려 했었다. 오랫동안 거래했던 용병단이 갑자기 사라졌으니….”
“혹시 누군가…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상단을 운영하면 수많은 친구도 만들지만 적도 만들 수밖에는 없다. 당연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럼 왜 상행을 강행하신 겁니까? 정말 누군가 의도한 일이라면… 위험할 수도 있는데요.”
“상행을 취소하거나 늦추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해관계가 엮인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게 되는 일이다. 다만 피해보다 중요한 건, 누군가가 상행을 막기 위해 일을 벌였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지.”
“그럴 수도….”
“물론 정말 우연한 사고로 용병단이 계약을 지키지 못한 경우라면 다행이지만, 누군가 상행을 방해하려 한 것이었다면 더더욱 상행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코퍼 대장과 평소 친분이 있던 D급 용병 비터와 마크가 합류하고 E급 용병을 다수 고용하면서 숫자는 어찌 맞췄지만….”
“호위의 질이 현저히 떨어졌군요.”
“맞다, 그래서 남작령에서 호위병을 추가로 모집하려 했는데, 코퍼 대장이 너와의 계약을 제안했다. D급 용병을 몇 명 추가하는 것보단 너와 계약하는 게 낫겠다더군. 아일론 상회 입장에서도 너와의 계약을 통해 인연을 더욱 공공이 할 수 있고, 덤으로 엑스퍼트급 실력자를 호위에 참여시킬 수 있으니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용병 계약을 하지 않아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카일의 말에 토일이 고개를 저었다.
“쯧, 아직 이해를 못 했군.”
“네?”
“나와 코퍼 대장이 원하는 건 외부인으로서의 도움이 아닌 상행의 일원이 되어 달라는 말이다.”
카일은 외부인이다. 상단이 위험에 빠졌을 때, 계약을 맺은 다른 용병들처럼 코퍼 대장의 명에 따라 적극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며 상단을 지켜줄 의무가 없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래서 대답은?”
“네, 계약하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토일이 웃으며 미리 준비해둔 서류를 꺼냈다.
“C급 용병인 코퍼 대장이 하루 1골드씩, 30골드에 계약을 했다. 하지만 코퍼 대장은 엑스퍼트 초급의 끝자락에 있고, 연륜도 깊으니 너에게 코퍼 대장과 같은 금액을 줄 수는 없다.”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이해한다니 좋다. 일단 엑스퍼트이긴 하지만 이제 첫 계약이니 하루 50실버, 백작성까지 남은 기간은 10일, 여기에 여유 기간을 더해 6골드는 주마. 어떠냐?”
“좋습니다.”
카일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토일이 얼굴을 찌푸렸다.
“처음 하는 용병 계약이다. 남일 하듯 말하는구나?”
“어차피 첫 계약이라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니 그냥 믿고 맡겨야죠.”
“믿고 맡긴다…. 그것만큼 무서운 말도 없지, 여기 계약서다. 글은 읽고 쓸 줄 안다고 했으니 한번 읽어 보거라!”
토일이 작성한 계약서를 받아든 카일이 대략적인 내용을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럼 여기, 용병패를 찍으면 된다.”
먼저 상단 문장이 선명하게 새겨진 인장 반지를 꺼낸 토일이 손가락으로 한 번 꾹 누른 다음 계약서에 찍었다. 아마도 용병패처럼 피를 인용한 마법진이 새겨진 반지 같았다. 카일 역시 용병패 중앙, 작은 홈에 손가락을 꾹 누른 뒤 은은한 푸른 빛에 싸인 용병패를 계약서에 찍었다.
“계약이 끝났다. 앞으로 열흘 간 잘 부탁하마. 용병패 뒤쪽을 확인하면 상단의 문장이 찍혀있을 거다. 백작성에 도착하는 대로 용병패와 함께 계약서를 길드에 접수하면 길드에서 돈을 지급해 줄 거다.”
“감사합니다.”
“곧 상단이 출발할 거다. 그전에 코퍼에게 가 보거라.”
“그전에,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토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물어 보아라.”
“호위 용병의 전력이 약했다면 상행 중에도 얼마든지 공격을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일찍 용병을 보충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이제야 호위 용병대를 보충하려 하는 겁니까?”
카일의 물음에 토일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넌 어떠냐? 만약 상단을 공격하려 한다면 언제 공격하는 것이 좋겠느냐?”
“당연히 병력이 약하고 경계심이 느슨해졌을 때라 생각합니다. 상행을 떠날 때나 복귀할 땐 가장 경계심이 강할 때입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상행 도중 급습하겠죠.”
“그래, 단순히 인명에 대한 피해를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상단에 가장 큰 피해를 입히려면 언제 공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으냐?”
“그야 당연히….”
“상행을 마치고 돌아갈 때가 될 거다. 상행을 통해 거둬들인 가죽을 잃으면 상단으로선 그야말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고, 반대로 적들은 오히려 가죽을 얻어 큰 이득을 볼 거다.”
“그, 그렇군요.”
“그럼 이제 코퍼를 찾아가 보거라! 아무래도 널 기다리는 것 같으니.”
토일이 고개를 돌리자 멀리 코퍼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일은 고개를 숙인 뒤 급히 용병대장인 코퍼를 찾았다.
“계약은 잘 끝났느냐?”
“네, 절 추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너도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용병들과 추가로 계약하는 것보단 믿을 수 있고 실력 있는 검증된 용병이 더 필요하다. 지난번 비터와의 대련도 직접 봤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덕분에 계약을 맺었으니 감사드립니다.”
코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단 호위는 다른 것 없다. 몬스터를 비롯한 외부의 적을 막아내고 상단을 보호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일단 네 자리는 상단의 최후미다. 비터와 마크와 함께 후미를 지키다가, 양 측면에서 기습 공격을 당할 경우 좌우측으로 돌아 적의 후미나 측면을 공격하면 된다.”
“네.”
“좋아! 그럼 남은 기간 동안 잘해보자.”
코퍼가 카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 위로 올라 천천히 상단의 선두로 향했다.
“그럼, 출발한다.”
코퍼의 명이 떨어지자 코퍼 용병대의 브린과 아덱이 척후조로 상단의 선두보다 멀찍이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마차가 길게 늘어서니 측면이 취약해 보이는군요.”
확실히 상단과 용병 계약을 맺은 뒤라 그런지, 이전과는 달리 상단의 취약점이 점점 눈에 확연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차 사이 용병들의 숫자도 적은 것 같고, 공격을 받으면 제대로 방어나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확실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용병만 봐서는 안 된다. 십수 년을 따라다닌 상단 일꾼들도 용병들만큼이나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지.”
카일이 의아한 얼굴로 마크를 바라봤다. 상단 일꾼이 가진 무기라면 고작해야 허리에 차고 다니는 작은 단검 정도가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아일론 상회의 일꾼들은 석궁의 명사수들이다.”
“석궁요?”
“그래, 마부석 아래에 다들 한두 정씩은 가지고 다니지, 듣기론 매년 상단 일꾼들을 대상으로 상금을 걸고 대회까지 벌이며 장려하고 있다고 하더군. 그 정도면 일꾼들도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지.”
“맞다, 공격이 있다고 해도 첫 기습만 잘 막아내면 튼튼한 마차를 방패 삼아 적을 상대할 수 있으니, 측면을 공격했다간 오히려 강력한 석궁세례에 적들의 피해만 더 커질 거다.”
아일론 상단엔 커다란 짐마차만 다섯 대가 있었다. 여기에 일꾼만 해도 십여 명에 달했다. 마차 한 대당 두세 명의 일꾼들이 있으니, 보유한 석궁은 다섯 개에 많게는 열 개가 넘는 것이었다. 일렬로 늘어선 마차에서 석궁이 일제히 발사된다면 무시하지 못할 위력을 자랑할 것이다.
“그렇군요, 그럼 상단에서 가장 약하거나 위험한 곳은 어딘가요?”
카일의 물음에 비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면하고 우리가 있는 후방이겠지, 다만 전방에는 척후로 나가 있는 용병도 있고 용병대장도 있으니….”
“결국 후방이 가장 위험하다는 말이군요.”
마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첫째로 뒤에서 갑자기 날아든 공격에 대처하기 어렵다. 어쨌든 우리의 말머리는 앞쪽을 보고 있으니 말이다. 두 번째로 기습이 있을 때 도움을 받기 어렵다. 앞쪽에 용병들이 배치되어 있고, 커다란 마차에 가려져 있기까지 해서 우리가 공격을 받았는지도 앞쪽에서는 확인이 쉽지 않으니까.”
“게다가 측면도 경계해야 해. 일꾼들에게 석궁이 있다고 해도 첫 기습 공격을 막아야 하고, 적이 마차로 접근하는 걸 최대한 저지해야 하니까. 코퍼 대장이 우릴 후미에 배치한 것도 측면과 후미의 공격을 대비하려는 거지.”
카일은 마크와 비터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너무 하는군요, 그래도 이제 막 용병이 됐는데, 가장 힘들고 위험한 곳이라니. 혹시 초짜 용병에게 가장 어렵고 힘든 곳을 맡기는… 용병들의 신고식 같은 건가요?”
“신고식?”
카일의 말에 비터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고개를 획 돌려 버렸다. 그 모습이 재밌는지 마크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웃지 마!”
비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