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47. 용병 카일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이른 새벽, 여관을 벗어난 세 사람은 서둘러 용병 길드로 향했다.
“날이 밝지도 않았는데 용병들이 많군요.”
길드 앞에는 수십 명의 용병들이 여기저기 피워놓은 화톳불 앞에 삼삼오오 모여 차가워진 몸을 녹이고 있었다.
“이들은 E급 용병들이다.”
“E급이면 아직 마나를 느끼지 못한다는….”
“그래, 최하급 용병들이지.”
비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녀석들이 동이 트지도 않은 이른 시간에 길드 앞으로 나온 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다.”
“일자리라면… 길드 안 게시판에서 의뢰지를 언제든 확인할 수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건 그렇다만, 게시판에 게시된 의뢰 대부분이 D급 이상의 용병을 찾는 것들이라 E급 용병들이 할 만한 일은 없다.”
“그럼 이들은 무슨 일을 하는 겁니까?”
“흠…. 몬스터 사냥에 짐꾼으로 따라가거나 상단에 부족한 일꾼을 대신할 때도 있다. 아무래도 무기를 다루는 녀석들이라 위험하고 험한 일들에 동원되는 경우가 많지. 뭐… 가끔이긴 하지만, 호위 용병에 갑자기 결원이 생길 때 머릿수를 채우려 찾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건 그야말로 아주 예외적인 경우지.”
“그렇군요.”
카일이 용병들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급 용병들 대부분이 낡고 허름한 갑옷에 검보다는 메이슨이나 도끼처럼 무겁고 쉽게 부러지지 않는 중 병기를 들고 있었다.
“미리 말해 두겠지만, 최하급 용병이라고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무슨 말입니까?”
“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녀석들이 누굴 것 같으냐?”
“네?”
비터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카일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애초부터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비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서운 몬스터? 고위 귀족이나 높은 경지의 기사? 아니다. 약한 척, 선한 척 친근하게 다가와 뒤통수를 치는 포악하고 굶주린 승냥이 같은 녀석들이지.”
비터의 말에 마크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잊지 못한 거냐?”
“….”
마크의 물음에 비터가 잠시 얼굴을 찌푸리더니 아무 말 없이 길드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들과 좋지 못한 일이 있었나 보군요.”
“오래된 일이다. 날 만나기도 훨씬 전 함께 다니던 녀석이 죽었다고 하더군.”
“그게 하급 용병 때문이란 말이군요.”
마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떠돌이 하급 용병이라 했다. 오크에게 쫓기는 녀석을 살려줬더니, 그날 저녁 음식에 독을 타고는 무기와 가지고 있던 돈까지 모두 털어 도망쳤다고…. 결국 친우 녀석은 독을 버티지 못하고 죽고, 비터는 인근을 지나던 상단에게 발견된 덕분에 사흘 동안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깨어났다고 하더군.”
“그럼… 그 떠돌이 용병은 잡았습니까?”
“2년을 쫓아다닌 끝에 잡았다고 하더군.”
“왜 독을 썼다고 합니까?”
“그냥.”
“……네?”
“말 그대로 이유가 없다고, 딱히 이유를 찾자면… 글쎄? 밑바닥 인생인 자신과 다른 두 사람에 대한 질투라고나 할까?”
“흐음… 그렇군요.”
카일과 마크가 용병길드 안으로 들어섰다. 밖과는 달리, 길드 접수대에 앉아 비터와 이야기를 나누는 에릴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카일, 일찍 왔군요.”
에릴이 카일을 반겼다.
“네, 동이 트는 대로 상단이 출발할 것 같아 일찍 나왔습니다.”
“사정은 비터에게 들어 알고 있으니, 서둘러야겠죠.”
에릴이 웃으며 용병패를 카일에게 내밀었다.
“정식으로 용병이 된 걸 축하해요. 용병 카일!”
“감사합니다.”
카일이 가죽 주머니에서 꺼낸 50실버를 접수대 위에 올렸다.
“50실버 확인했어요. 그럼 카일은 앞으로 남작령에서 활동할 건가요?”
“아닙니다. 일단은 아일론 상회를 따라 백작령으로 갈 생각입니다.”
“흠…. 아쉽군요. 좀 더 오래 카일을 보고 싶었는데.”
에릴이 정말 아쉬운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자 카일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어렸다.
“에릴, 장난치지 마라!”
“그래, 카일은 이제 막 열여덟이 됐다.”
비터와 마크의 말에, 조금 전까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에릴이 표독스럽게 눈을 치켜뜨며 두 사람을 사납게 노려봤다.
“제가 뭐 어때서요!”
“그건 네가 더 잘 알 거 아니야?”
“뭐예요!?”
에릴이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외치자 비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잘 있어라! 아무래도 당분간 만나긴 힘들 것 같구나.”
“두 사람, 다시 돌아오진 않을 건가요?”
“당분간은, 카일과 함께 움직일 테니 아마도 그렇게 되겠지?”
“그렇군요.”
“뭐야? 반응이 영 시원치 않은데?”
“흥! 그럼 뭐, 엄청 아쉬워서 할 줄 알았나요?”
에릴의 뾰로통한 말에 비터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칫, 이거 서러워서…. 잘 있어라! 간다.”
비터가 투덜거리며 밖으로 걸어나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은 마크가 에릴을 보며 말했다.
“나도 가야겠다. 잘 있어라, 에릴.”
“무사히 다시 만나길 대지의 여신 레아 님께 기도드릴게요.”
“고맙다.”
마크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카일과 함께 길드를 벗어났다.
용병 길드를 벗어난 카일은 마크의 조언에 따라 마시장으로 향했다. 언제까지 상단의 말을 계속 빌려서 탈 수는 없었을 뿐 아니라 남작령 서쪽엔 작은 목장 있어 백작령보다 저렴하게 말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보시오.”
마시장에 도착한 세 사람은 커다란 마사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중년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하암, 누구… 요?”
아직 잠에서 덜 깼는지 부스스한 눈으로 커다란 하품을 내뿜은 중년인이 세 사람을 돌아보더니 비칠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을 사고 싶어 왔습니다.”
“…말이라면, 한발 늦었소.”
“그게 무슨 말이요? 늦다니?”
“며칠 뒤 영주성에서 사냥대회가 있다며 어제저녁에 마사에 있는 말들을 죄다 끌고 가버렸소. 남은 말이라곤 늙거나 병든 말뿐이라오.”
“이런….”
마크가 탄식을 터트리며 카일을 돌아봤다.
“아무래도 백작성에 가서 말을 사야 할 것 같다.”
마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려던 카일의 눈에, 마사 한쪽에서 고개를 내밀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말 한 마리가 들어왔다.
“저 말은 뭡니까?”
카일의 물음에 중년인이 고개를 들어 카일이 가리킨 방향을 돌아봤다.
“저 녀석은 도축될 녀석이오.”
“도축요?”
“그렇소, 며칠 전 이곳을 지났던 상단에서 수레를 끌던 녀석인데… 체구도 작고 힘도 떨어지는 녀석이라 상단에서 팔고 간 녀석이라오, 말을 맡긴 했지만 볼품없는 녀석이라 내일쯤 도축해 영주성에 납품할 생각이라오.”
“음….”
잠시 고민에 싸인 카일이 한동안 말을 마주 바라봤다. 이내 결심했는지, 중년인에게 말했다.
“저 말, 제가 사죠.”
“헉!”
“카일!”
비터와 마크가 깜짝 놀라 소리쳤지만, 카일은 손을 들어 두 사람의 말을 가볍게 막았다.
“녀석을… 말인가?”
“네, 어차피 도축하실 생각이라면 어려운 결정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그야 그렇긴 하지만, 저런 녀석을 데려다 어디다 쓰려는 것이오?”
“그건 차차 생각해 볼 생각입니다. 어떻습니까? 제게 파시겠습니까?”
“뭐, 어려운 일은 아니오만… 좋소, 10골드만 주시오, 어차피 도축될 녀석이었으니 딱 그만큼만 받겠소.”
카일이 그 자리에서 10골드를 꺼내 건넸다.
“이제 이 녀석은 제 말입니다.”
“하하! 결정이 아주 빠르군. 맞소. 이제 이 말은 자네 것이나 데려가시오.”
“고맙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사에서 말을 끌고 나왔다. 중년인의 말대로 말은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왜소한 체형에 털까지 푸석푸석해 보였다.
“아무리 싸다고 해도 이건 아닌 것 같다. 지금이라도 말을 돌려주는 게 어떻겠냐?”
비터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생각이었으면 처음부터 사지도 않았을 겁니다.”
카일이 말을 쓰다듬으며 단호하게 말하자, 비터와 마크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이미 카일의 결심이 확고한 상태이기에 아무리 설득한다고 해도 마음이 바뀔 것 같지는 않았다. 마시장을 벗어난 세 사람은 속도를 높여 가죽공방으로 향했다. 비터의 검집과 함께 말 안장을 사기 위해서였다.
“어서 오게,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던 참이네.”
보턴의 안내를 받아 공방으로 들어가자 고투슨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가죽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고, 스턴이 보조를 하고 있었다.
“…왔군, 잠시 기다려 보게!”
뒤늦게 카일 일행을 발견한 고투슨이 안쪽으로 들어가 비터의 검집을 가지고 나왔다.
“어떤가? 이전의 검집을 최대한 변형시키지 않고 만들어 봤는데?”
“아주 좋습니다!”
비터가 검집을 이리저리 살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 이야기를 들었네만, 말 안장이 필요하다지?”
“그렇습니다.”
“흠…. 마침 잘됐군, 공방에서 새롭게 개발된 안장이 있는데 말이야.”
“새로운 안장이요?”
“그래. 기존 황동 안장은 무겁기도 하고 열기가 배출이 안 되지 않았나? 이번에 새롭게 만든 건 나무로 황동 일부를 대체해서 무게도 줄였고, 안장 중앙에는 홈도 파내서 열도 잘 빠져나가지.”
“응? 그렇게 좋은 안장이면 왜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겁니까?”
비터의 물음에 고투슨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워낙 기능성에 치중하다 보니 외형이 볼품없다. 원래 기사들을 위해 만들었지만, 권위와 명예에 집착하는 기사들은 볼품없는 안장을 선호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그럼 용병은 어떻습니까?”
“용병들이 사용하는 안장은 무겁고 투박하긴 하지만 가격이 아주 싸니 신형 안장이 아무리 좋아도 찾질 않는다. 그래서 이놈은 기사도 용병도 아무도 찾지 않아 그동안 창고 안에 처박혀 있었다. 어떠냐, 원한다면 너에겐 싼 가격에 넘겨주마.”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고투슨이 카일의 말에 환하게 웃었다. 카일 역시 무겁고 투박한 안장보다는 훨씬 편하고 가볍다는 말이 일단 마음에 들었다.
“클클, 역시 결정이 빠르구나. 잠시 기다리거라. 안장을 가지고 나오겠다.”
고투슨과 보턴이 황급히 창고로 향하더니, 잠시 후 독특한 형태의 안장을 들고 나왔다.
기존에 보았던 안장에 비해 크기는 작았지만, 안장 옆으로 여러 개의 주머니와 걸쇠가 달려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기사들을 위해 만든 안장이다 보니 각종 무장이나 소품을 보관할 수 있게 만든 것 같았다.
“아주 마음에 듭니다.”
“다행이구나! 마음에 든다니….”
카일의 맑은 표정에 고투슨 역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외면받으며 창고에 처박혀 있던 안장이 빛을 본 것만으로도 고투슨에게는 기쁜 일이었다.
카일 일행이 일을 마치고 여관으로 돌아왔을 땐 상단은 여행에 필요한 식료품과 식수를 새로 마차에 싣고 있었다. 한쪽에선 떠나기 전 막바지 물품 확인 작업을 하고 있었다.
“딱 맞춰 돌아왔군, 곧 인원 점검을 마치고 출발할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늦지 않게 도착해 다행이군요.”
“헌데… 저 녀석은 뭔가?”
코퍼가 카일의 뒤를 따라온 왜소한 말을 보며 물었다.
“수레를 끌던 말인데… 어떻게 하다 보니 제 소유가 됐습니다.”
카일의 말에 코퍼가 피식 웃으며 말에게 다가가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이체를 띈 눈으로 카일을 바라봤다.
“흠…. 이 녀석, 단순히 수레를 끌던 녀석이 아니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말 몰랐나?”
“아시겠지만 이제 말을 탄 지 고작 이틀이 지났을 뿐입니다.”
“일단 저 녀석, 왜소해 보이긴 하지만 분명 훈련받은 전투마가 분명하다.”
“전투마요?”
카일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렇다고 좋아하긴 이르다. 어떻게 짐수레를 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혹사당한 상태라 다시 기력을 회복한다고 해도 전투마로 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녀석에게 기대를 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런 생각이라면 잘 보살펴 주거라.”
“감사합니다, 알려주셔서.”
카일의 말에 코퍼가 피식 웃으며 몇 가지 전달 사항을 알려주었다.
“아! 깜빡할 뻔했군, 조금 전 상단주께서 찾으셨네.”
“상단주께서요? 혹시 무슨 일인지 아십니까?”
“글쎄? 나 역시 정확히 아는 건 없네.”
코퍼의 말에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서가는 행렬의 선두에 서 있는 마차로 다가갔다.
“카일입니다.”
카일이 마차에 난 작은 창을 두드리자 토일이 창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