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10화 (310/404)

외전 - 44. 계획된 일

“제안을 받아들이거라.”

“스승님!”

벨이 놀리 소리쳤지만,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카일을 돌아봤다.

“녀석은 반드시 샤론 마을로 보내겠네, 그러니 서신을 적어주지 않겠나?”

“처음부터 서신은 적어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대신 벨의 의견을 최대한 들어주십시오.”

“물론이네.”

노인의 말에 벨이 고개를 저었다.

“전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대장장이 타론에게 배울 기회다. 망설이지 말고 가거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스승님을 두고 어딜 간단 말입니까?”

벨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노인은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벨을 바라보았다.

“너도 알 것이다. 내게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음을 말이다.”

“아직 제겐 스승님이 필요합니다. 이곳에 남게 해 주십시오.”

“어리석은 소리! 이곳에서 나처럼 고작 하급 대장장이 따위가 되겠단 말이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카일 님께서 새로운 제련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이것만 완벽하게 익힌다면 고합금검을 제련할 수 있을 겁니다.”

대장장이 중 단연 최고는 검을 만드는 장인이다. 하지만 검을 만든다고 모두가 최고는 아니다. 대장장이는 합금을 매입해 단순히 형태만 제작하는 하급에서부터, 자신만의 독특한 합금법이나 제련법, 둘 중 하나를 익힌 중급이 있었다. 이 모든 기술을 집약해 검을 만드는 상급이 있고, 그리고 대륙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명장도 있었다.

벨이 카일의 제련법을 완벽하게만 익힌다면 중급대장장이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조금 전 새롭게 만들어진 검이 통나무를 가볍게 베었기에, 노인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제련법은 단순히 본 것만으로 익힐 수 없다. 뜨거운 불과 끊임없이 싸우며 망치를 두들겨야만 겨우 익힐 수 있지. 헌데 마법 화로도 없는 이 작은 대장간에서 정말 제련법을 익힐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 그건….”

“불가능하다. 이곳에선 절대 제련법을 익힐 수 없다. 그러니 가거라! 비록 정식 제자가 되긴 힘들다 해도, 일급 대장장이 타론이라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얻게 될 거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던 벨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생각했다.”

따뜻한 눈으로 벨을 바라보던 노인이 고개를 돌려 카일에게 말했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누겠나?.”

노인이 카일의 대답도 듣지 않고 대장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카일이 노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모루 위에 올려진 망치를 쓰다듬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이곳에 정착한 지도 벌써 사십 년이 훌쩍 넘었군.”

“세트 마을 출신이 아니셨군요.”

“그렇네, 왕도의 빈민촌에서 태어났네, 운이 좋아 공방에서 대장장이 기술을 배웠네. 처음 공방에 들어갈 때만 해도 그렇게 도망치듯 떠날 줄은 몰랐지.”

“큰일이 있었나 보군요.”

“…공방장 아들 녀석의 머리를 망치로 내려쳤으니 큰일이긴 하겠지.”

카일의 당황스러운 표정이 재밌는지 노인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어렸다.

“녀석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죽지는 않았다더군. 헌데 내가 왜 녀석의 머리를 망치로 내려친 줄 아나?”

“글쎄요.”

“당시 녀석은 가문의 합금법을 연구하고 있었다네. 그걸 알고 난 녀석의 수련을 몰래 훔쳐봤지. 녀석에게서 합금법을 훔쳐내기 위해서 말이야. 하지만 실패했네. 녀석이 내가 있던 곳을 찾아냈거든.”

“그래서 머릴 내려친 겁니까?”

“녀석은 기술과 배움에 대해 목마른 내게 일부러 정보를 흘린 뒤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지, 날 내쫓기 위해서 말이야. 만약 그대로 있었다면 다시는 망치를 들 수 없게 손을 부러트린 뒤 쫓아냈겠지.”

노인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가 함정을 파놓긴 했지만 결국 그 함정으로 걸어 들어간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욕심 때문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왜 제게 하시는 겁니까?”

“부족한 스승 때문에 고생하는 제자를 위해, 조금 전에는 잘못된 선택을 했네.”

노인이 카일의 얼굴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자네의 제련법이 타론의 것이 아님을 알았을 땐 오히려 마음이 편하더군,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을 기회를 얻었으니 말이야. 그렇게 대장간을 빠져나왔을 때, 갑자기 잊고 있던 사십 년 전 기억이 떠오르더군.”

“제가 함정을 팠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정말 아닌가?”

“아닙니다. 전 그저 검을 수리하러 왔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다만, 누군가 제련법을 훔쳐보고 있음을 알았을 뿐입니다.”

“그걸 어떻게….”

“전 대장장이가 아닌 검사니까요. 제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제법 수준이 높습니다.”

노인이 놀란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타론의 제자란 생각에만 집착한 나머지 카일이 자경대장의 아들임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런데 왜… 가만히 있었나? 분명 문제 삼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미 아시겠지만, 제련법은 미완입니다. 이질적인 성질의 두 금속을 접합시키는 일은 쉽지 않으니까요.”

“정말 이 모든 것이 우연이란 말인가?”

“우연입니다. 벨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도 그의 재능이 아까워 제안한 것뿐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오히려 떠나는 절 대신해 아버지 옆에 벨이 있다면 그것도 좋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카일의 말에 가만히 카일을 바라보던 노인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자네에게 용서를 빌고 싶네, 자네를 속이고 은인을 의심했으니 당연히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것이 옳은 일이겠지.”

“사과라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 전 이미 모든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이것 역시 내 욕심일 수는 있겠지만, 자네에게만은 꼭 사과하고 용서를 받고 싶네.”

노인의 단호한 말에 카일이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고집이 대단하시군요.”

“나 역시 대장장이라네. 자존심과 고집은 어딜 가도 뒤지지 않지.”

“휴! 알겠습니다.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니 일어나시지요.”

“고맙네.”

카일의 말에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샤론 마을과 세트 마을은 가까우니 자주는 아니라도 충분히 왕래는 가능할 겁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샤론 마을이 아무리 가깝다고는 해도 이 늙은이 하나 보자고 몬스터와 오크들이 활보하는 숲을 지나게 할 수는 없는 일, 가끔 상단이나 자경단을 통해 안부나 전해주면 그걸로 만족하네.”

“하지만….”

“괜찮네, 녀석만 무사히 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네.”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카일은 약속대로 타론과 보일에게 전하는 서신을 벨에게 건넨 뒤, 아일론 상회가 머물고 있는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세 사람이 아일론 상단에 도착했을 땐 이미 상단은 거래를 마치고 떠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출발은 정오가 지나서라고 들었는데, 벌써 떠날 준비를 하는 겁니까?”

“아무래도 일정이 바뀐 것 같구나.”

마크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때, 코퍼가 카일을 향해 다가왔다.

“사람을 보내려 했는데 늦지 않게 도착했군.”

“어떻게 된 겁니까?”

“거래가 생각보다 일찍 끝나 일정을 조금 당겼다.”

“반나절이나 일정을 앞당겼단 말입니까?”

“어쩌겠나. 상 단주의 결정이니 따르는 수밖에….”

코퍼가 고개를 저었다.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은 상단 호위를 책임져야 하는 코퍼로서도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나저나 갔던 일은 어찌 되었나? 여기서 부러진 검을 수리하긴 만만치 않았을 텐데?”

“다행히 수리가 잘됐습니다.”

비터가 검집을 대신해 가죽 천에 말아 등 뒤로 비끄러맨 검을 가리켰다.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기 대장장이 실력이 제법 뛰어난 모양이군.”

“그게 아니….”

“그럼 바로 영주성으로 향하는 겁니까?”

비터의 말을 끊으며 마크가 황급히 코퍼를 향해 물었다.

“아직 한 곳 더 들려야 하겠지만, 이미 가지고 있던 물건 대부분을 팔았으니 오래 머물진 않을 거다. 영주성엔 아마도 4, 5일 뒤엔 도착하겠지.”

“생각보다 일정이 빠르군요.”

“샤론 마을에서 많이 팔아 치운 덕분에 거래할 물품이 줄었으니 그럴 수밖에. 아마도 곧 출발할 테니 자네들도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럼….”

코퍼가 세 사람을 남겨두곤 황급히 용병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갑작스럽게 일정이 변하면서 용병들을 통솔하는 코퍼의 움직임도 더욱 바빠졌다.

“너, 카일이 검을 만들어 줬다고 떠벌릴 생각이냐?”

코퍼의 모습이 사라지자 마크가 화난 얼굴로 비터를 돌아봤다.

“그게… 어때서?”

“멍청한, 카일이 검을 만들어 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용병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그야 당연히… 가만있진 않겠지.”

비터가 카일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바뀐 자신의 검을 서둘러 자랑하고 싶은 생각에 카일에게 돌아갈 피해는 정작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최대한 검을 숨겨라. 용병들에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당장 너도나도 검을 만들어달라고 카일에게 달려올 테니 말이야!”

“아… 알겠다.”

비터가 마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크 님은 왜 제게 검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지 않으세요?”

갑작스러운 카일의 물음에 마크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너에겐 이미 충분한 은혜를 입었다. 여기서 검까지 욕심부릴 수는 없다.”

“엑스퍼트에 오르면 가장 먼저 검을 바꿔야 해요. 오러의 강도와 밀도가 늘어난 지금 가지고 있는 검은 오래 버티지 못할 거예요.”

“그건….”

“어차피 검을 만들어야 하면 제가 만들어 드리죠. 어떠세요?”

“그렇게 해 준다면 나야 고마운 일이지만….”

비터의 검을 이미 확인한 마크다. 카일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하죠. 대신 검에 사용될 합금은 마크 님이 구하셔야 해요.”

“물론이다.”

마크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비터의 검을 부러워했던 마크로선 카일의 제안이 그저 기쁘기만 했다.

“그런데… 물어볼 말이 있다.”

“네.”

“그… 벨이란 녀석 말이다. 정말 그 녀석에 대해 몰랐느냐?”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느낌이지만, 카일 넌 처음부터 벨이란 녀석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서 말이다.”

“알았든 몰랐든 그게 중요한가요? 모두 잘 해결되었으면 그걸로 된 거죠?”

“그야 그렇긴 하지만….”

“설마 카일이 속이기라도 했다는 거야?”

“아니…카일,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하다.”

마크가 비터를 향해 사과했다. 하지만 카일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전 벨에 대해 몰랐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요?”

“뭐!”

“한 일 년쯤 전일 겁니다. 타론 아저씨가 세트 마을에 벨이란 대장장이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이도 저와 비슷하고 재능도 제법 있다며 한번 키워볼 만한 녀석이라고 말이죠.”

“그럼 너… 일부러 이곳에….”

“겸사겸사 찾아온 겁니다. 요즘 자경대와 영지병들 무기 제작 때문에 타론 아저씨가 힘들어하셨거든요. 제가 떠나면 아버지께서도 외로울 테니 벨이 함께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제안이나 해보려고 했죠. 일이 이렇게까지 잘 풀릴 줄은 저도 몰랐지만요.”

카일의 말에 비터와 마크가 황당한 얼굴로 서로를 돌아봤다. 결국 카일은 처음부터 모든 걸 파악하고 자신이 원하는 판으로 끌어들여 결국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무서운 녀석, 설마 검을 잘라낸 것도 처음부터 계획한 일이냐?”

비터의 물음에 카일이 흐릿하게 웃었다.

“글쎄요? 어쨌든 좋은 검을 얻었으니 비터 님에겐 오히려 잘된 일 아닌가요?”

“너!”

비터가 깜짝 놀라 소리쳤지만 카일은 모른 척 이제 막 목책을 벗어난 상단의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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