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41. 대장장이 노인(1)
아일론 상회가 공터를 떠나 세트 마을에 도착한 건 정오가 지난 늦은 오후 무렵이었다.
마을에 도착한 아일론 상회는 샤론 마을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을 회관을 빌려 짐을 풀었다.
“서둘러라!”
“말을 한곳에 모아.”
“그건 이쪽이 아니라 저쪽으로 가야지!”
분주히 움직이는 상단 일꾼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카일이 비터를 돌아봤다.
“이젠 우린 뭘 하면 됩니까?”
“뭘 하긴? 그냥 쉬는 거지.”
“아무것도 안 하고요?”
“상단 일에 용병이 할 일은 없다. 가끔 상단주의 요청으로 마을 주변 오크나 몬스터 토벌을 하기도 하지만 아주 예외적이지. 물론 상행과는 별건이니 추가 비용도 받아야 하고.”
비터를 대신해 마크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잘 됐군요. 그럼 바로 가죠.”
카일이 비터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도 말이냐?”
“비터의 검이니 당연히 비터가 가야죠.”
마크가 엑스퍼트에 올랐다는 충격적인 현실에 검을 수리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 그렇지.”
비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뭐해! 오지 않고.”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카일과 마크를 향해 비터가 버럭 소리쳤다.
“그쪽이 아닌데요?”
“어….”
앞서가던 비터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그렇다. 비터는 오늘 처음 세트 마을을 방문했다. 당연히 대장간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따라오세요. 대장간 위치는 조금 전 마을 사람에게 물어 알아놨습니다.”
카일이 웃으며 비터와는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도 갈 거냐?”
비터가 마크를 보며 물었다. 마크는 마을에 도착한 용병들이 하릴없이 휴식을 취할 때에도 검술 수련에 열을 올리는 수련광이었다.
“카일이 당분간 검술 수련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렇겠지….”
비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마크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마크가 은혜를 갚는다며 카일과 동행을 원했고 카일 역시 흔쾌히 동의했다곤 하지만,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엑스퍼트에 먼저 오른 마크에 대한 질투일 수도 있겠지만, 못마땅한 건 비터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땅-
카일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마을 외곽, 제법 유량이 풍부한 소하천 바로 옆 작은 대장간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시선을 가장 사로잡은 건 대장간 옆 하천 위로 끊임없이 회전하는 수차였다.
“수차?”
카일이 눈을 크게 뜨곤 수차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마법이 발달한 이곳에서 기초적이긴 하지만 기계적 장치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이도 어린데 수차를 다 알아보는군.”
막 대장간 안에서 걸어 나오던 노인이 카일을 이리저리 살폈다.
“용병들 같은데, 여긴 무슨 일로 왔는가?”
“검이 부러져 왔습니다만, 여기 주인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카일을 대신해 비터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흠…. 검이라면, 이리 줘 보게.”
“노인장께 말입니까?”
비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소한 체구에 작은 키, 망치 하나 들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가는 팔과 다리까지 청화를 피울 만큼 대단한 대장장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허허, 검을 봐야 수리를 할지 말지를 판단을 할 것 아닌가?”
“설마, 노인장께서 이곳 주인, 그러니까 대장장이란 말씀입니까?”
“왜, 힘없는 늙은 노인이라 대장장이가 아닐 것 같은가?”
노인의 날카로운 질문에 비터가 당황한 얼굴로 주춤 물러나자, 마크가 비터를 대신해 황급히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나도 내가 대장장이 같아 보이진 않으니.”
마크의 사과에 노인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젠 내가 누군지 알았으니 검을 보여주겠나?”
“물론입니다.”
마크가 뒤로 물러난 비터를 돌아보며 손을 내밀었다. 노인의 왜소한 체구에 신뢰가 떨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곳까지 와서 검을 보여주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부러진 검을 받아든 노인이 세심하게 검을 살폈다. 겉으론 내색하진 않았지만 비터의 말에 기분이 상했던 노인은 내심 부러진 검을 완벽히 수리해 비터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부러진 검을 확인하자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흠, 이건… 여기선 수리할 수 없다.”
“…네?”
“이걸 수리하려면 화로의 온도를 푸른 불꽃까지 높아야 하는데, 보다시피 여긴 합금을 녹일 마법 화로가 없으니 수리는 불가능하지.”
노인의 말에 비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카일의 말을 믿고 이곳까지 왔지만 결국 헛고생만 한 것이다.
“그럼 이곳에선 검을 수리할 방법이 없단 말이군요.”
“샤론 마을의 대장장이 타론을 찾아간다면 가능하긴 하다. 그것엔 소형 마법 화로가 있으니 말이다.”
“죄송하지만 저흰 내일 이곳을 떠나 영주성으로 가야 합니다. 다시 샤론 마을로 되돌아갈 시간이 없습니다.”
“흠…. 그럼 방법은 백작령을 찾아가는 것뿐이다.”
“역시… 방법이 없군요.”
비터가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마크가 노인을 향해 물었다.
“여기 남작령에 타론 대장장이 말고 고 합금 검을 수리할 사람이 한 명 더 있다고 들었습니다.”
“응? 그걸 어떻게…. 아는 사람이 몇 없을 텐데?”
“정말… 청화를 피울 사람이 있단 말입니까?”
“청화까진 모르겠고, 망치질 하나만큼은 기가 막힌 녀석이 있지.”
“망치… 질? 청화를 피우지 않고 망치질만으로 검을 수리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보통은 불가능하지만, 그 녀석은 가능할 거라더군.”
“네?”
“녀석은 아비를 닮아 생나무를 뽑을 정도로 힘이 아주 대단해서, 합금을 녹이지 않고 낮은 온도에서 접합시킬 수 있다고 하더군.”
청화를 피울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검을 수리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크와 비터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분은… 어딜 가면 만날 수 있는 겁니까?”
“녀석 말인가? 흠…. 안타깝지만, 그곳 역시 샤론 마을이라네, 녀석은… 타론의 제자라서 말이야.”
노인의 말에 비터와 마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카일에게로 돌아갔다. 카일은 샤론 마을 출신이다. 당연히 샤론 마을에 있는 또 다른 대장장이의 존재를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세트 마을에서 검을 수리 할 수 있다고 했다. 아니, 정확히는 검을 수리해 주겠다고 말했었다.
“설마….”
마크와 비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카일에게로 향했다.
“죄송하지만 타론 님께선 절 정식 제자로 받아들이진 않으셨습니다.”
카일이 두 사람의 시선을 담담히 받으며 노인에게 다가갔다.
“자넨?”
“카일이라 합니다. 타론 님에게서 망치질을 배웠죠.”
“카일…. 그래, 타론 녀석의 제자가 카일이라고 했던 것 같군. 이제 보니 타론 녀석이 자랑하던 제자 녀석이 바로 자네였군.”
“타론 아저씨가 절 제자라고 하셨습니까?”
“대장장이로선 천부적인 자질을 가진 녀석이라고 했지, 하지만 가는 길이 다르다며 상당히 아쉬워했다네.”
“타론 아저씨가 그런 말을 했을 줄은 몰랐습니다.”
카일의 말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한 것 아니겠나? 아들 녀석이 없다면 모르겠다만, 후계자 녀석이 있는데 가문의 비법을 외부인에게 전할 수는 없을 거야. 거기다 넌 대장장이가 아닌 검을 쥔 검사다. 제자로 삼아 합금법을 알려준다 해도 너에겐 큰 의미가 없지않느냐.”
“그건 그렇습니다.”
“타론이 널 보면 항상 아쉬워했다. 천부적인 대장장이 기질을 타고났다며, 제대로만 배웠다면 대륙에서 손꼽는 명장이 될 거라고 말이다.”
“명장이라니…. 과분한 말씀이군요.”
카일이 미소를 짓고는 비터의 부러진 검을 바라보았다.
“여길 하루 정도 빌리고 싶습니다. 손해에 대한 보상은 따로 하죠.”
카일이 돌아보자 비터가 잠시 당황하더니 곧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지금 제가 가진 전부입니다.”
비터의 말에 주머니를 확인한 노인이 피식 웃으며 금화 한 닢을 꺼낸 뒤 다시 비터에게 주머니를 던졌다.
“이런 작은 대장간은 금화 한 닢도 많다고 할 수 있지.”
“그래도 금화 한 닢은….”
“늙은이 혼자인데 얼마나 필요하겠나,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네. 대신 부탁이 하나 있네.”
노인이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물론 어려운 부탁인 건 알고 있지만, 자네가 검을 수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네.”
“그건….”
노인의 말에 카일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실력이 떨어지는 대장장이라도 외부에 알리지 않는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요령이나 비법이 있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검 제련법은 합금법을 제외한 대장장이 기술이 모두 집약된 만큼, 후계자를 제외한 외부인에겐 공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카일 역시 전생의 기억을 바탕으로 습득한 그만의 독특한 제련법을 아직 누구에게도 보인 적이 없었다.
“그저 자네 실력을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일 뿐이라네. 제자도 없는 늙은 대장장이가 이제 와 기술을 배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노인의 말에 잠시 고심하던 카일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하하! 고맙네, 그럼 바로 시작할 텐가?”
“…시간이 없으니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럼 화로에 넣을 숯을 더 챙겨 오겠네.”
한층 밝아진 노인이 서둘러 밖으로 달려 나갔다.
“검술뿐 아니라 대장장이 기술까지…. 너 정말 대단하구나!”
“대단할 것까지야…. 그저 마을에 뛰어난 대장장이가 있었던 덕분에 기술을 조금 배웠을 뿐입니다.”
“마법 화로도 없이 합금 검을 수리할 정도면 조금 배운 건 아닌 것 같은데?”
마크의 말에 카일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마법 화로가 필요 없는 이유는 조금 뒤면 알게 될 겁니다.”
“우리가 참관해도 괜찮은 거냐? 대장장이 사이에선 각자의 기술이 검술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들었는데….”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알아도 따라 하긴 힘들 겁니다.”
카일이 메고 있던 가방과 검대를 풀어 한쪽에 내려놓은 뒤 레더 아머를 고정한 가죽끈을 풀었다. 두꺼운 가죽 갑옷을 입고선 뜨거운 열기를 견디며 검을 수리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으음….”
두꺼운 가죽 갑옷을 벗으며 잘 짜인 탄탄하고 아름다운 근육들이 드러났다. 하지만 정작 비터와 마크가 놀란 건 카일의 상체를 뒤덮은 크고 작은 상처 때문이었다.
“단순히… 좋은 부모를 만나 익힌 검술이 아니었군.”
비터가 침음을 삼키며 말했다. 지금까진 그저 가문에서 전해온 뛰어난 검술을 익혔기에 어쩌면 자신의 패배가 당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일의 몸에 새겨진 수많은 상처는 그가 얼마나 혹독한 실전을 치르며 지금의 경지에 올랐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허허… 몸이 놀랍군.”
숯이 가득 담긴 자루를 들고 안으로 들어선 노인이 카일의 상체를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카일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안해진 노인이 화로 안에 부러진 검과 숯을 가득 넣은 뒤 풀무질을 시작했다. 노인의 풀무질에 화로의 불꽃이 점점 노란빛으로 물들었다.
“검을 수리하기 전 한 가지 해둘 말이 있습니다.”
“뭐냐?”
“보통 고합금 검이 부러지면 수리보다는 녹여서 다시 만드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워낙 녹는점이 높고 강해서 검을 다시 붙이긴 힘들거든요.”
“그럼 검을 녹여야 한단 말이냐?”
“일반적인 방법이 그렇다는 겁니다. 전 다른 방법을 쓸 겁니다만, 문제는 지금과 같은 형태를 유지할 수는 없을 겁니다.”
비터의 검은 오리알 굵기의 둥근 봉 형태로, 끝으로 갈수록 뾰족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합금을 녹여 틀에 부은 전형적인 방법으로 검을 만든 것이다. 덕분에 둥근 형태로 모양을 잡긴 쉽지만, 망치질로는 그렇게 만들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모양은 상관이 없다. 미스릴과 합금 금속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봉 형태로 만든 것뿐이다.”
“그럼 원하는 형태가 있습니까?”
“원래 1미터가 넘는 롱소드를 사용했지만, 봉 형태로 바뀌며 길이를 줄였다.”
“잘됐군요. 그럼 롱소드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카일이 화로 안에서 뜨겁게 달궈진 잘린 검을 꺼내 모루 위에 올리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