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04화 (304/404)

외전 - 38. 부러진 검(1)

“이번 대결은 목숨을 건 검투가 아닌 대련, 그것도 상단주의 손님인 저와 상단에 고용된 개인 용병 간 대련입니다. 이것이 정말 승패를 나누는 정당한 대련이었고 생각하신 겁니까?”

“그건….”

카일의 말에 비터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코퍼를 바라보았다. 사실 코퍼는 비터를 불러 카일이 다치지 않도록 주의를 준 사실이 있었다. 실력은 물론 실전경험까지 풍부한 비터라면 카일에게 부상을 입히지 않고도 무난히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 한 말이었다.

“상단주께서 지켜보고 있는데 그분의 손님을 상대로 전력을 기울이긴 힘들지?”

“하긴, 아무리 대련이라지만 상단 손님을 다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야.”

“비터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단 말인가?”

“글쎄? 적어도 다치지 않게 적당히 상대하려 했겠지. 하지만 저 카일이란 녀석, 생각보다 독특하고 대단한 검술을 지니고 있지 않았나.”

“정말 독특하긴 했지. 마지막 검식은, 검이 언제 바뀌었는지 난 알지도 못했다니까.”

“여기서 그걸 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어차피 승패를 겨루는 대련도 아니었고 말이야.”

카일이 분위기를 잡아주자 이후 주변을 둘러싼 용병들과 상단 일꾼들이 적당히 살을 붙여 비터의 패배에 대한 명분을 만들어 주기 시작했다. 비록 개인 용병이긴 하지만 비터는 그동안 상행을 함께해온 동료였다. 비터가 오러까지 사용할 정도로 최선을 다한 사실은 알지만, 승자인 카일까지 비터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동료라 할 수 있는 그들이 비터의 편을 들어 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짝-

코퍼가 손바닥을 마주 부딪치며 공터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이제 대련은 끝났다. 모두 자리로 돌아가도록.”

코퍼의 말에 일꾼들이 각자 자리로 돌아가 잘 준비를 했다. 어차피 그들에게 카일과 비터의 대련은 그저 좋은 구경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용병들은 달랐다. 그들은 두세 명씩 모여 카일과 비터의 대련을 복귀하거나 일부는 카일의 검술을 따라 펼치기도 했다.

물론 그저 검식을 따라 한다고 해서 쉽게 배울 수 있는 검술은 아니었지만, 꾸준히 수련한다면 어쩌면 검식의 원리를 이해하고 어느 정도 흉내는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기분 나쁜가? 용병들이 자네 검식을 흉내 내서?”

“그럴 리가요. 저런 식으로 흉내 낸다고 배울 수 있는 검술이 아닙니다. 원리를 알아야죠.”

코퍼가 고개를 돌려 카일을 바라보았다. 설마 나이 어린 카일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자넨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르군. 갓 용병이 된 이들은 물론, 상급 용병들도 자신의 검술을 따라 하는 걸 보통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네. 심한 경우 검투를 신청하기도 하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저런 모습을 좋아할 수는 없죠.”

용병들을 돌아보던 코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대단하군. 용병으로 떠돌며 수없이 많은 검술을 보았지만, 자네가 펼친 그런 독특한 검술은 처음이었네. 느림과 극한의 빠름이라. 자네 아버지가 만든 검술이겠지? 예전, 멀리서 자네 아버지의 검술을 잠시 본 적이 있었다네. 몇 가지 비슷한 검식도 보이더군!”

카일은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

“내 보기에는 이미 자네 아버지는 상급에 이른 것 같은데, 어떤가?”

카일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이 코퍼를 바라보며 웃었다. 보일이 상급에 오른 것은 맞지만, 그는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주인 없는 상급 엑스퍼트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퍼지면 많은 귀족들이 찾아와 그를 곤란하게 만들 것이다.

코퍼가 보일의 이야기를 조금 더 물으려던 차, 카일이 아무 말 없이 입을 굳게 닫으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 가버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코퍼가 고개를 저었다.

“받아라!”

비터와 마크가 절벽 한쪽에서 꺼져가는 모닥불을 살리려 숯을 뒤적이는 카일의 앞에 털썩 주저앉더니 묵직한 가죽 주머니 하나를 던졌다.

“뭡니까?”

“약속한 20실버다.”

무심히 마른 나뭇가지를 부러트려 이제 막 살아나기 시작한 불꽃에 던져 넣는 비터를 보며, 카일이 피식 웃음을 흘리다 가죽 주머니를 열었다. 주머니엔 손때 묻은 은화와 동화들이 가득 들어 었었다. 카일은 거절하지 않고 주머니를 가방 안에 밀어 넣었다.

“아깐 고마웠다.”

“…무슨 말씀인지?”

“이번 대련, 난 최선을 다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비터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그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그 검, 도대체 뭐로 만든 건지 물어도 될까?”

“….”

스르릉-

비터는 허리에서 검을 꺼냈다. 앞서 잘려 나간 검 여기저기엔 대련 중 갈리고 폐인 흔적들이 여기저기 선명히 남아 있었다.

“보기엔 볼품없어 보여도 수년 동안 용병으로 떠돌며 모아온 골드를 쏟아부어 제법 유명한 대장장이에게 부탁해 만든 검이다. 이걸 이렇게 만들 정도라면 그 검은….”

비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카일의 허리로 향했다.

“그래서요. 이 검에 대해 알아서 뭘 하실 생각입니까?”

싸늘하게 굳어진 카일의 얼굴에 비터가 당황한 듯 급히 손을 저었다. 자신의 검을 잘라낼 정도의 강도를 지닌, 날카롭고 얇은 은빛 검, 소위 특수합금으로 만든 명검일 수 있었다. 그런 검에 대한 의문은 어쩌면 검에 대한 욕심으로 비칠 수 있었다.

“아, 아니 난 그저….”

비터가 황급히 변명을 하려 했지만 카일이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밀었다.

“한번 볼까요?”

“무슨….”

“부러진 검 말입니다. 한번 볼 수 있겠습니까?”

카일의 말에 잠시 주저하던 비터가 한숨을 내쉬며 부러진 검을 건넸다. 아무리 친분이 두텁다 해도 자신의 무기를 전하는 건 극히 예외적인 경우지만, 비터의 경우 이미 검이 부러진 상태라 오랜 고민 없이 카일에게 검을 보였다.

카일이 잠시간 비터의 검을 천천히 살피기도 하고 허공에 휘둘러 보기도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부러트렸으니 다음 마을에 도착하면 대장간을 찾아 수리해 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대련 전 말했듯 부러진 검은 내가 수리하는 게 맞다. 보기엔 투박해도 제법 많은 미스랄이 합금 된 검이라 이곳에서 수리하긴 힘들다. 아마도 백작령에서나 가야 할 거다.”

비터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틀렸습니다.”

“틀리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남부 전체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여기 다핸 남작령에선 검을 수리할 수 있는 사람이 적어도 두 사람은 있죠.”

“그게 정말이냐!”

미스랄 함유가 많은 합금일수록 녹는점이 높아, 검을 수리하려면 실력 좋은 대장장이를 찾거나 적어도 마법 화로가 있는 백작령까지 가야만 했다. 그런 만큼 꼼짝없이 부러진 검을 지닌 채 백작령까지 가야만 검을 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비터로서는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이건 미스랄을 고 합금시켜 만든 검이다. 이걸 수리하려면 마법 화로가 있거나….”

“푸른 불꽃을 피울 수 있는 대장장이가 필요하죠.”

“정말, 여기서 검을 수리할 수 있단 말이냐?”

“샤론 마을엔 고 합금 검을 만들 수 있는 타론이란 뛰어난 대장장이가 있죠.”

“설마 샤론 마을에 마법 화로가 있단 말이냐!”

비터의 물음에 카일이 긍정했지만, 옆에서 함께 이야기를 듣던 마크가 고개를 저었다.

“샤론 마을을 떠난 지 벌써 하루가 지났다. 다시 마을로 돌아가 검을 수리한다면 시간이 너무 지체될 거다. 그건 상단 주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다.”

“어차피 다음 마을에서 하루 정도 쉬었다가 갈 것 아닌가? 지금 상단주에게 허락을 받으면 남작령을 떠나기 전 다시 상단에 합류할 수 있을 거다.”

비터가 당장이라도 상단주를 찾아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마크가 비터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음 마을에서 쉬었다 간다고 해도 검을 수리하고 영주성까지 가려면 시간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부러진 검으로 상단 호위를 계속할 수는 없다.”

비터는 상단 호위를 위해 아일론 상단과 계약을 맺은 용병이다. 아무리 대련으로 검이 부러졌다 해도 그건 용병 개인 사정일 뿐 무력이 반감된 용병과 계속 계약을 유지할 상단은 없었다. 때문에 비터는 영주성에 도착하는 대로 임시로 사용할 검을 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싸구려 검이라 해도 검을 사려면 적지 않은 골드가 필요했다. 여기에 부러진 검까지 수리해야 하는 비터이기에, 마법 화로가 있는 샤론 마을로 돌아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선택인지도 몰랐다.

“지금 마을로 돌아가도 바로 검을 수리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냐! 검을 수리할 수 없다니?”

비터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타론 아저씨의 마법 화로는 하급 마나석 두 개를 직렬연결한 소형화로인데, 합금을 녹일 정도로 화로의 온도를 높이려면 적어도 반나절 이상 화로를 가열해요. 마을에 도착한다고 해도 바로 검을 수리하기는 어려울 거란 뜻이죠.”

카일의 말에 비터가 표정을 굳히며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해도 검을 수리하려면 감수해야겠지.”

“아무리 아일론 상회의 단주가 관대해도, 며칠씩 상행에 빠지는 걸 좋아할 상단주는 없다. 어쩌면 계약한 금액 일부를 차감할 수도 있다. 차라리 처음 계획대로 임시로 사용할 검을 매입하는 것이 어떠냐? 부족한 골드는 내가 빌려주마.”

“아니,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백작령보다 이곳에서 검을 수리하는 게 오히려 비용을 더 줄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비터가 카일을 힐끔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백작령 소속 대장장이를 통한다면 상당한 골드를 지불하고도 몇 날 며칠은 기다려야 수리가 가능했다. 마법 화로를 보유한 대장간 대부분이 백작령 소속 기사단의 검을 도맡아 수리하기에 용병인 비터의 검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릴 터였다. 타론 역시 자경단의 무구를 수리하느라 바쁘긴 하지만, 기사단과 달리 자경 대장인 보일의 도움만 받을 수 있다면 저렴한 비용으로 빠르게 검을 수리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자경 대장을 움직이려면 카일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제 도움이 필요하단 말씀이군요.”

카일의 물음에 비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겠냐?”

“도와드리는 건 어렵지 않아요. 아버님이 아니라 타론 아저씨께 직접 서신을 적어드릴 수도 있어요.”

“그럼 부탁하마, 당장 출발하면 내일 새벽녘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거다.”

“지금 출발하겠단 말인가요?”

“남작령을 떠나기 전 상단에 합류하려면 지금 출발해도 늦다.”

카일이 황당한 표정으로 비터를 바라보았다.

“지금 가려는 마을이 어떤 곳인지 잊은 것 같은데, 샤론 마을은 오크 랜드와 가장 인접한 마을이에요. 상급 엑스퍼트라도 해가 진 이후엔 목책 밖으론 나가지 않아요. 그런 곳을 지금 무기도 없이 한밤에 가겠다는 말입니까?”

“그건….”

급한 마음에 정작 자신이 가려는 샤론 마을이 어떤 곳인지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비터가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밤에 이동할 수 없다면 상단이 남작령을 떠나기 전 합류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카일의 말에 비터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떳다.

“그리고 잊었나 본데, 분명 검을 수리할 수 있는 사람이 둘이라고 했어요. 샤론 마을에 갈 수 없다고 실망할 필요가 있나요?”

“그럼, 남작령에 마법 화로를 가진 대장간이 또 있단 말이냐?”

“마법 화로는 없지만 푸른 불꽃을 피울 수 있는 사람은 있죠.”

“푸른 불꽃….”

비터가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마법 화로가 아닌 대장장이의 순수한 능력만으로 푸른 불꽃, 청화를 피울 정도라면 분명 대단한 실력의 대장장이가 분명했다. 비터로선 이번 기회에 이전보다 더 좋은 검을 얻을 좋은 기회였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걱정이었다.

“뛰어난 대장장이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나도 잘 알지만, 난 그런 대단한 자에게 검을 맡길 만큼 골드가 풍족한 용병은 아니라서 말이다. 아무래도 검을 맡기긴 힘들 것 같구나.”

뛰어난 대장장이일수록 검을 제작하거나 수리할 때 거액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 골드가 부족한 하급 용병들은 사실상 검을 맡길 수가 없었다.

“걱정 말아요. 골드는… 크게 필요하진 않을 테니 말이죠.”

“그게 무슨…?”

비터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카일의 시선은 이미 마크에게로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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