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36. 대련(1)
“이름이 카일이라 했나?”
“네, 카일입니다.”
비터가 웃으며 카일의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비터는 이번에 처음 아일론 상단 호위에 참여한 개인 용병으로, 평균적인 키에 다소 마른 체형을 가진 전형적인 용병의 모습이었다. 다만 카일의 시선을 잡아끈 게 있었는데, 바로 허리에 매어진 무기였다.
오리알 굵기에서부터 끝으로 갈수록 송곳처럼 뾰족해지는 독특한 무기였는데, 길이는 1미터 정도로 보였다.
“승마는 처음이라 들었는데, 제법 안정적으로 보이는걸?”
“코퍼 대장이 구해준 말이 순해서 그런 것 같아요.”
“아니, 말이 아무리 순해도 걸어가는 말 위에서 중심을 잡기란 힘든 일이지.”
“저도 지금 열심히 중심을 잡으려 노력중인 걸요.”
“아니야. 떨어지려면 벌써 떨어졌을 거야. 그만하면 곧 달리는 것도 가능하겠다. 일단은 허리를 좀 더 세우고 고삐를 편안하게 잡고, 그리고 최대한 말의 움직임에 몸을 맡겨. 그럼 좀 더 편안해질 거다.”
비터가 나름대로 말 타는 법을 알려 주었지만, 코퍼의 말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결국 결론은 많이 타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비터의 시선이 카일의 허리에 멈췄다.
“다들 궁금해서… 일단 내가 대표로 물어 보러 왔는데… 혹시 쌍검술을 익혔나? 다들 쌍검술을 익혔다 아니다 말들이 많아서 말이야.”
비터는 사실 카일의 허리에 메인 검과, 나아가 카일의 실력이 궁금했던 용병들을 대표에 다가온 것이었다.
“비터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쌍검술을 익혔을 거라 생각하나요?”
“붉은 트롤, 그러니까 보일 대장이라면 분명 쌍검술의 단점을 알려 주셨을 테니… 쌍검술을 익힌 건 아니라 생각한다.”
카일은 비터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쌍검술은 아닙니다.”
“그렇지! 분명 예비 검일 거라 생각했다.”
비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왼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자 뒤쪽에서 용병들의 희비가 엇갈렸다. 아무래도 카일의 검을 보고 내기를 벌인 것 같았다. 그때 뒤에서 또 다른 사내가 작은 주머니를 들고 다가왔다.
아무래도 쌍검술을 익혔다는 쪽에 건 용병인 듯 보였다.
“여기 있다. 정확히 20실버, 흥! 모양도 다른 예비 검을 뭐하러 들고 다니는 것이냐?”
사내가 카일을 보며 투덜거렸다. 카일의 검은 서로 검신의 형태만 달라 자신처럼 두 검을 모두 사용하는 검사라 생각했고, 어떤 검술을 쓸지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지고 다니는 검이 예비 검이라니, 돈을 잃은 것보다 새로운 쌍검술을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카일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쌍검술을 익히지 않았다고 했지, 예비 검을 가지고 다닌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요?”
“어…?”
“뭐야!”
비터와 용병 사내는 서로 다른 의미에서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니, 두 개의 검을 동시에 사용하면 그게 쌍검술 아니냐?”
비터가 황급히 카일에게 다가와 물었다.
“넌 빠져!”
사내가 자신이 탄 말로 비터의 말을 밀어내더니, 카일과 비터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카일이라 했나? 난 마크라 한다. 그러니까, 지금 말은 어찌 되었든 두 개의 검을 모두 사용 한다는 말이지?”
“에… 그렇긴 하죠.”
“뭐! 일단 좋아.”
마크라 불린 사내가 만족스럽다는 듯 이번에는 오른손을 높이 들었다.
“와아!”
그러자 이번에도 소란이 일며 용병들 사이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검을 모두 사용하기는 하는데 쌍검술은 아니다?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번엔 비터가 카일을 향해 따지듯 물었다.
“이봐! 지금 카일이 직접 한 말이잖아! 무슨 말이 더 필요해!”
“무슨 소리! 검술을 확인하기 전까지 절대 인정 못 해.”
“검술을 확인해야 해.”
“맞아!”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용병들이 몰려와 비터의 말에 힘을 보탰다. 용병들의 눈빛에선 반드시 검술을 확인하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카일은 언젠가 이런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바로 보일을 공격하던 쟝과 조셉의 눈빛에서였다. 카일이 거절한다고 해도, 어떻게 해서든 이들은 카일의 검술을 확인하려 할 것이다.
“제가 왜 확인을 받아야 하죠? 보아하니 절 두고 내기를 한 것 같은데, 저에게는 무슨 이득이 있죠?”
사납게 노려보는 용병들을 상대로 카일이 태연하게 물었다. 이런 당당한 모습에 오히려 비터와 용병들의 말문이 막혔다. 상단주의 손님인 카일을 상대로 윽박지르며 직접 시비를 걸기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넘어가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좋다! 그럼 내기에 걸린 60실버에서 20실버를 카일에게 주지. 어때?”
마크가 용병들에게 동의를 구하며 말했지만, 사실상 카일이 거절할 수 없게 미리 압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카일도 용병들과의 사이가 틀어질 수 있기에 거절하지 않았다.
“좋아요!”
카일이 승낙하자 마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다. 그럼 저녁때 다시 보도록 하지.”
마크가 카일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비터와 용병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이만 자리로 돌아가, 조금 전부터 코퍼 대장이 이쪽을 보고 있다.”
굳은 얼굴로 이곳을 바라보는 코퍼의 모습에 화들짝 놀란 용병들이 서둘러 자리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상단은 날이 어둑해질 무렵 나타난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넓은 공터는 정면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높은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절벽에 난 균열을 따라 흘러내리는 조그만 물줄기가 작은 하천을 이루고 있어 방어하기에는 그야말로 최상의 조건을 갖춘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도착한 용병들이나 일꾼들의 얼굴에서는 은연중 자리 잡았던 긴장감이 조금은 가신 듯 보였다.
“식사는 맛있게 했나?”
절벽을 배후로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아 상단 일꾼들이 건넨 스프와 빵을 묵묵히 뜯어 먹는 카일의 옆으로 코퍼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용병들이 절 계속 노려보고 있어 체할 것 같습니다.”
카일이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을 살피는 용병들을 보며 투덜거렸다. 그의 모습 어디에서도 겁먹은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하! 이제 보니 생각보다 담이 큰 친구군, 용병들과 대련을 하기로 했다지? 비터와 마크가 찾아와 허락을 구하고 갔네.”
“제 무기를 보고 내기를 한 모양인데… 적당히 상대해줄 생각입니다.”
카일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음…. 자네가 용병 세계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것 같으니 미리 말해주겠네만, 용병들에겐 대련이나 실전이나 큰 의미가 없다네.”
“하지만 이미 약속했는걸요.”
카일의 말에 코퍼가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원한다면 내가 중재를 하겠네, 어차피 상행 중 벌어진 대련이니 내 허락이 없으면 대련을 벌일 수 없는 걸 저들도 알고 있네.”
코퍼는 상단주의 중요한 손님인 카일이 이번 대련으로 다치는 걸 원치 않았다. 아무리 카일이 동의했다고 해도 대련 중 부상을 입는다면 그 책임은 용병들 전체를 통솔하는 용병단장인 자신이 질 수밖에는 없었다. 코퍼의 입장에선 이번 일로 수년을 안정적으로 거래해온 아이론 상회와 자칫 불화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단장님의 말씀은 고맙지만, 그렇게 되면 앞으로 수일 동안 함께 해야 할 용병들과 불편한 관계를 지속해야 하잖아요.”
“원한다면 코퍼 용병대가 널 지켜줄 거다.”
“아니, 그랬다간 오히려 용병 간 반발심이 더 커질 거예요. 그리고… 코퍼 용병대가 언제까지 절 지켜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건….”
카일의 말대로 코퍼 용병대가 카일을 지켜 줄 수 있는 건 백작령에 도착할 때까지만이다. 상행이 끝나면 더 이상 코퍼가 용병들을 강제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코퍼 용병대가 계속해서 카일을 지켜줄 의무도 없었다.
카일의 입장에선 대련의 시기만 잠시 미뤘을 뿐, 어쩌면 약속을 어겼다는 이유로 용병들로부터 더 큰 보복을 당할 위험도 있었다.
“정말 괜찮겠느냐?”
“걱정 마세요, 최대한 다치지 않게 할 테니까요.”
“알겠다. 그렇다면 일단 상단주님께 이번 대련에 대해 말씀드리마.”
“감사합니다. 걱정해 주셔서.”
카일의 고개를 숙이자 코퍼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코퍼는 그길로 곧장 마티슨을 찾았다.
“대련?”
“그렇습니다.”
“흠…. 그거, 재밌겠군.”
마티슨이 보고 있던 장부를 내려놓으며 웃음을 지었다.
“이봐 토일, 오랜만에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는데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지. 자리를 한번 만들어 주겠나?”
“알겠습니다. 마침 야토르산 와인이 한 병 남았으니 서둘러 함께 준비하겠습니다.”
“하하! 마침 잘됐군.”
마티슨이 환하게 웃으며 코퍼를 바라보았다.
“대련은 언제 시작하나?”
“아마도… 곧, 시작할 것 같습니다.”
“이런, 그럼 서둘러야겠군요. 전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코퍼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마차를 벗어나는 토일과 그런 그를 환하게 웃으며 바라보는 마티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가장 앞장서서 대련을 말려야 할 두 사람이 오히려 카일의 대련을 반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당사자와 상단주까지 허락한 마당에 코퍼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카일이 큰 부상 없이 안전하게 대련이 마무리되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 * *
공터 위로 짙은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자, 공터 주변으로 용병들과 함께 상단 일꾼들이 하나둘 횃불을 밝히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마티슨과 토일 역시 와인잔을 기울이며 대련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공터 중앙으로 향하는 코퍼에게로 향했다.
“카일은 아직 용병이 아니다. 그러니 이번 대결은 용병검투가 아닌 그저 단순히 서로의 기량과 내기의 사실만을 확인하는 대련임을 미리 밝혀둔다. 상대가 다치지 않게 양쪽 모두 신중을 기하 길 바란다.”
코퍼가 짧게 말을 마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용병검투가 뭐죠?”
카일이 마크를 향해 물었다. 이에 마크가 공터로 걸어 나오는 나오는 비터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생사투! 이긴 자가 모든 걸 갖는다. 그러나 보통 생사투까지는 가지 않고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기사는 명예에 목숨을 걸지만, 용병은 골드에 목숨을 판다고들 하지, 하지만 골드보다 우선하는 목숨이 어디 있겠나? 골드야 나중에 벌면 그만인데 말이야.”
“그것도 그렇군요.”
마크의 말에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다행히 코퍼 대장의 뒤에 숨진 않았구나.”
“그렇다고 대결을 피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저 시간만 벌 뿐이죠.”
“하하! 이거 생각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맞아! 이런 대결은 피한다고 피할 수가 없지.”
비터가 웃으며 천천히 허리에서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비터의 무기는 송곳처럼 뾰족한 끝부분으로 갈수록 색이 짙어졌는데, 끝부분만 특별히 합금의 함량을 높인 것 같았다.
비터의 검술 자체가 찌르기 위주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독특한 무기군요.”
“보기엔 볼품이 없어도 제법 거금을 주고 제작한 검이다. 웬만한 방어구는 모두 뚫을 수 있게 끝부분을 고합금강으로 보강했지.”
“흠…. 그렇군요.”
스르릉-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뽑아 든 순간, 주변을 둘러싼 용병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기하학적인 독특한 문양에 매끈하고 얇은 검신은 그들로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검이라 할 수 있었다.
“합금도 아닌 것 같은데… 이거 부딪치는 순간 부서져 버리는 거 아니야?”
“설마 새로운 합금법으로 만든 건가? 왜, 타론 대장장이라면 합금법으로 남부에서도 제법 유명한 대장장이가 아닌가?”
“흠, 그럴 수도 있긴 하지만….”
처음 접하는 검 형태에 용병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지만, 단 한 사람, 코퍼만이 유일하게 잔뜩 굳은 얼굴로 카일의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오래전 카일의 검과 비슷한 검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었다.
바로 근위 기사들이나 수준 높은 고위전투 기사들의 검들이었다.
이들이 사용하는 검은 미스릴을 고 합금시켜 검신 자체가 황금빛에 가까웠고, 가벼우면서도 날카롭다고 알려져 있었다. 코퍼 역시 오래전 딱 한 번 황금빛 검을 사용하는 기사를 멀리서 지켜본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