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35. 이별
카일은 항상 입던 레더 아머에 오른쪽 허리에는 검과 환도를 나란히 차고, 검집과 도집이 흔들리지 않게 검집 끝을 가죽끈으로 묶었다. 그다음 오크 가죽으로 만든 가방에 필요한 몇 가지 옷과 강철로 만든 철합, 육포, 마른 곡식과 몇 가지에 간단한 공구도 챙겨 넣었다. 그리고 가방 옆으로 개머리판을 접은 라이플이 든 가죽집을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묶은 다음 팔목과 발목에 각각 단검과 단도를 끼워 넣었다.
이렇게 단도나 단검을 팔다리에 끼워 놓으면, 적을 상대할 때 검격을 팔에 찬 단도나 단검으로 막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더군다나 카일의 경우 특전부사관으로 배운 단검술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어 좋았다.
“이제 가는구나.”
카일이 짐과 장비를 차고 나오자,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던 보일이 씁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지금 가려고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 위에 올려진 옹기 찻잔을 바라보았다. 도자기 찻잔은 모두 마티슨에게 팔아 버리는 바람에 예전에 쓰던 옹기 찻잔을 다시 꺼내 사용하고 있었다.
“시간이 되면 도자기 찻잔을 만들어 보내 드릴게요.”
“그럴 필요 없다. 오히려 난 이 옹기로 만든 찻잔이 마음에 든다. 나처럼 검을 쓰는 거친 사람에게는 이런 거칠고 투박한 옹기 찻잔이 더 어울리지.”
보일의 말에 카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가보자, 마티슨 상단주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네.”
카일과 보일은 나란히 걸어서 북쪽 목책으로 향했다.
“소개장을 줄 테니 가능하면 남작령에 가서 바로 용병등록을 하거라, 용병 가족들에게는 조금 더 절차가 간소하니 필요할 거다.”
보일은 품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주었다.
양피지에는 카일에 대한 기록과 이를 보증하는 보일의 용병패가 인장처럼 찍혀 있었다.
용병패는 용병 자신을 증명하는 패로 상당히 중요한 신분증이라,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 있었다. 덕분에 계약이나 신분을 보증할 때 귀족들의 인장처럼 용병패를 사용할 수 있었다.
카일과 보일이 북문 앞에 도착했을 땐 아일론 상회의 일꾼들이 떠날 준비에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가겠습니다.”
“혹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면 언제든 연락하거라! 아비가 달려가마.”
“걱정 마세요, 아무 일 없을 테니!”
카일의 말에도 보일의 얼굴은 여전히 잔뜩 굳어 있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검을 사용해야 할 땐, 반드시 세 번 이상 생각한 뒤 결정하고, 의뢰를 맡더라도 되도록 귀족 간 분쟁은 최대한 피하거라. 자칫 이용만 당하다 버려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벌써 18살, 소드 엑스퍼트에 자신의 어깨를 훌쩍 넘어설 정도로 자랐지만, 보일에게 카일은 언제나 옆에서 지켜줘야 할 어린 아들에 불과한지 한동안 당부와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이대로 있다간 오늘 안에 마을을 떠나긴 힘들어 보였다.
“용병 검투에서는 말이다….”
“아버지.”
카일이 가만히 다가가 보일을 끌어안았다.
“이제 가야 해요.”
카일의 나지막한 말에 보일이 긴 한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카일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래…. 이젠, 정말 가야 하는구나.”
“반드시, 다시 돌아올게요.”
“그럴 필요 없다. 너와 샤론 마을의 인연은 여기까지다. 그저, 가끔 살아있단 소식만 아비에게 전해 주면 그걸로 충분하다.”
보일이 담담하게 말하며 품 안에 안긴 카일을 밀어냈다.
“이제 가거라!”
“그럼 갈게요. 몸 건강히 계세요.”
카일이 마지막으로 보일에게 고개를 숙이곤 아일론 상단에게 향했다.
“말은 탈 줄 아느냐?”
말 한 마리를 끌고 카일에게 다가온 토일이 물었다.
“아직 배우진 못했어요.”
“응? 용병이 되려면 말타기는 기본이다. 그런데 아직 배우지 못했단 말이냐?”
토일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아시겠지만 여긴 오지마을이라 말을 구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설령 말을 구한다고 해도 탈 곳도 마땅치 않고요.”
카일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샤론 마을은 남작령에서도 오크 랜드와 인접한 최남단, 수림 지역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값비싼 말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설령 말을 구한다고 해도 오크들이 득실거리는 수림 지역 안에서 말을 타고 달릴 만한 공간도 부족했다.
“흠…. 여기라면, 그럴 수도 있겠군.”
토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마차를 가리켰다.
“일단 마부석에 타거라, 오늘은 어쩔 수 없으니 내일부턴 좀 더 편한 곳에 자리를 마련해 주마.”
“아니에요. 전 마부석에 앉아도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앞으로 우리 아일론 상회 최고의 거래 상대가 될 텐데 그럴 수야 없지.”
토일이 웃으며 말을 끌어 마차 뒤에 묶었다. 그 사이 촌장과 작별 인사를 나눈 마티슨이 보일에게 다가갔다.
“그만 가야 할 것 같군.”
“조심히 가십시오. 그리고, 카일을 잘 부탁합니다.”
“하하! 결국 자네도 아비인가 보군, 고지식하던 자네가 아들 부탁을 다 하고 말이야.”
“말씀하신 대로, 자식 일이니….”
“걱정 말게, 카일은 앞으로 아일론 상회의 중요 거래 상대가 될 거야, 당연히 어려운 일이 있다면 앞서 도울 거야!”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하! 그럼 다음 거래 때 다시 보세!”
보일과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눈 마티슨이 천천히 마차에 올라탔다.
“출발한다!”
아일론 상회의 가장 선두, 상행의 보호를 책임진 코퍼 용병대장의 외침과 함께 마차와 함께 수십 대의 짐마차가 천천히 샤론 마을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봐 우리 통성명이나 하지!”
아일론 상단이 마을을 완전히 빠져나가고 얼마 뒤, 마차 옆으로 낡은 레더 아머를 입은 중년 사내가 다가와 카일에게 말을 걸었다. 카일에 뒤지지 않는 당당한 체구에 가슴을 보호하는 둥근 방어구와 허리에는 롱 소드 한 자루를 차고 있었는데, 얼핏 보아도 검신의 두께가 상당했다. 저급 합금으로 만들어 부족한 강도를 만회하려 검신의 두께를 늘린 듯 보였다.
“난 코퍼라 한다. 이번 아일론 상단의 호위를 책임지고 있다.”
“카일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샤론 마을 출신이에요.”
카일의 말에 코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붉은 트롤 보일은 아직도 용병들에겐 유명하지!”
“붉은 트롤?”
“오래전 용병계에 알려진 보일 대장의 별칭이다. 당시엔 제법 유명했지.”
“간혹 용병일 때 경험을 이야기해주셨지만, 별칭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이야기해주신 적이 없어요.”
“아마도… 그렇겠지.”
코퍼는 카일의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트롤이란 별칭은 오래전 영지전에서 대검을 휘두르며 수십 명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던 모습에서 얻은 악명이었다. 아무리 보일이라도 그런 별칭은 자신의 아들에게 알려주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이번에 용병이 되겠다던데?”
“네, 용병이 되어 대륙 여기저기를 돌아볼 생각입니다. 물론 당분간은 상단을 따라 백작령에 머물 생각이고요.”
“그럼 앞으로도 상당 기간 같이 있어야겠구나.”
“네, 아마도….”
코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못 탄다지?”
“네, 아직 배울 기회가 없어서요.”
“용병이 되려면 말은 기본적으로 타야지. 어때, 한동안 함께 가야 할 텐데, 한번 배워보겠느냐?”
“가르쳐 주신다면, 열심히 배워보겠습니다.”
코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코퍼가 먼저 다가와 카일에게 승마를 가르쳐 주겠다고 제안한 건 마티슨의 부탁 때문이었다.
샤론 마을을 떠나 정오가 다 되어 갈 때쯤, 아일론 상단은 제법 넓은 공터에 도착했다. 이곳은 영주성에서 샤론 마을로 내려오는 중간 기착지였다. 아일론 상단이 오랜 시간 샤론 마을 오가며 공터를 조금씩 넓혀오면서, 이젠 대여섯 대의 마차가 들어서도 남을 정도의 넓은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다.
코퍼는 일단 마차를 공터 둘레로 둥글게 세워 방벽을 만들었다. 자경단의 지속적인 토벌로 샤론 마을 주변으론 오크나 몬스터가 뜸해졌지만, 중간 기착지인 공터를 벗어나면 종종 몬스터들이 나타나 상단을 습격하곤 해 여기서부터는 특히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서둘러라!”
용병들과 마부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짐마차로 방벽을 만드는 사이, 일꾼들이 불을 피우고 커다란 솥을 걸었다. 이미 자신이 할 일을 미리 알고 있는 듯 일꾼들의 움직임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지금 뭘 하는 겁니까?”
“이곳에서 점심을 먹으려는 거다. 너도 용병이 되려면 미리 알아야겠지만, 이처럼 의뢰주가 음식을 챙겨주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저렇게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 주는 곳은 더더욱 그렇지.”
“그럼 보통 용병들은 어떻게 식사를 해결하는 겁니까?”
“일반적으론 건량이나 말린 육포를 미리 준비해 먹고, 아주 가끔 사냥을 하기도 한다. 예외적인 경우지만 말이야.”
“어쨌든 직접 해결하면 된다는 말이군요.”
“맞다. 원칙적으로 그렇다.”
코퍼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방벽을 완성한 용병들이 마차들을 중심으로 경계를 섰다.
“카일!”
용병들과 일꾼들의 모습을 살피는 카일을 코퍼가 불렀다.
“네?”
“잠깐 따라봐 보게.”
코퍼가 카일의 대답도 듣지 않고 성큼성큼 앞서 걷더니 짐마차 후미에 묶인 말 앞에서 멈춰섰다.
“이놈은 제법 훈련이 잘되고 순한 놈이라 승마를 배우기는 좋을 거다. 일단 기초적인 건 가르쳐 줄 테니, 상행이 시작되면 말을 타고 천천히 따라오면 된다.”
“…? 곧장 말을 타고 상단을 따라오란 말씀입니까?”
“여기까지 오면서 보았겠지만, 상단의 이동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다. 이 정도면 충분히 따라 올 수 있을 거다. 말타기는 요령이 없다. 무조건 많이 타보고 말의 움직임에 익숙해지는 것밖에는 없으니 말이다.”
“제가 상행에 방해되지는 않을까요?”
카일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그럴 리는 없으니 걱정 말거라!”
코퍼는 우선 승마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안장을 올리는 법, 재갈을 물리고 굴레를 씌우는 법, 그리고 고삐를 매고 말 위에 올라타는 법까지 가장 기초적인 부분을 알려준 뒤 방벽 주변을 천천히 돌게 했다.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멀리서 들려온 상단 일꾼의 목소리에 고삐를 잡아주던 코퍼가 걸음을 멈췄다.
“어떠냐? 따라 올 수 있겠느냐?”
“네, 이 정도 속도라면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다행이구나. 그럼 이만하고 식사를 하러 갈까?”
코퍼가 빙그레 웃었다.
식사는 간단했다. 딱딱한 보리빵에 말린 육포를 조금 넣은 묽은 스프였지만, 어차피 보리빵이야 늘 마을에서 먹던 음식이었고, 스프가 너무 묽긴 했지만, 상행 중 노지에서 먹는 음식치고는 꽤 괜찮았다.
경계를 서는 용병들은 팀을 나눠 식사를 했다. 한 팀이 식사하는 동안 다른 팀이 경계를 서는 방식이었다.
상행을 보호하고 용병들 전체를 통솔하는 것은 코퍼 용병대장이지만, 모두가 코퍼 용병대의 대원은 아니었다. 상단의 상행을 책임질 동안만 임시로 용병들을 통솔할 뿐, 실제 코퍼 용병대는 다섯으로 이루어진 작은 파티에 개인 용병들이 추가 합류해 상단을 호위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자세히 보면 코퍼 용병대와 개인 용병들이 자연스럽게 나누어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티슨은 출발할 때를 제외하면 마차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음식을 챙기거나 일꾼들을 관리 감독하는 것 모두 토일의 책임이었다.
토일의 말에 따르면, 마티슨은 마을에서 매입과 매출한 물품을 하나씩 대조하고 확인한 뒤 장부에 기록하느라 이동중엔 마차에서 잘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식사가 끝나고 식기와 짐들을 정리한 후 상단은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카일도 말을 몰아 천천히 상단의 뒤를 따랐다. 대체로 길이 잘 다져져 있어 상단을 따라가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난생처음 말을 타서인지 말이 걸을 때마다 전해오는 충격이 상당했다. 다행히 용병들이 말 타는 모습을 따라 하며 충격을 최소화하며 부드럽게 말의 움직임에 몸을 맞추자, 어느 정도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그렇게 나름대로 말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카일의 옆으로 개인 용병 하나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