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33. 오크마을(1)
“3서클 마법사면 인첸트가 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하급 마나석에 1서클의 라이트 마법을 인첸트시키는 일이라면 3서클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중급 마나석에 라이트 같은 1서클 마법을 인첸트하려는 건 아닐 것 아닌가?”
“….”
마티슨은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짓는 카일의 모습에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허허, 설마 중급 마나석에 1서클 마법을 인첸트시키려는 건가! 자네가 뭘 모르나 본데, 마나석에 한 번 인첸트를 시키면 다시 지울 수 없어! 1서클 마법을 인첸트시키면 마나석은 영원히 1서클 마법밖에는 쓰지 못하네.”
“알고 있습니다. 일단 세공사를 소개해주시면, 마법진을 새기고 용병 마법사를 고용해서 마법을 인첸트시킬 생각입니다.”
“이거… 참! 이 비싼 중급 마나석에 1서클 마법을 인첸트시키겠다니…. 휴, 일단 알겠네! 이미 마나석의 주인은 자네들이니 알아서 하게, 따로 마법사는 구할 필요는 없네, 마침 이곳에 거래하는 3서클 마법사가 있으니 그에게 부탁하면 될 거야. 세공사도 소개해주겠네, 다만 아일론 상회 본점이 있는 크로먼 백작가까진 가야 하네. 좋은 세공사를 만나려면 어쩔 수 없네!”
잠시 얼굴을 찌푸리며 고심하던 카일이 마티슨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가지고 있는 스크롤이 더 있습니까?”
“스크롤이야 더 가지고 있네만, 남은 30장은 앞으로 들러야 할 마을에 판매를 하기 위해 남겨 놓아야 하네.”
마티슨의 말에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도 저에게 파시지요. 가격은 두 배로 쳐 드리겠습니다.”
카일이 말에 마티슨이 눈을 크게 뜨고 카일을 바라보았다. 무려 두 배, 아일론 상회가 구입한 스크롤의 원가는 대략 5실버였다. 스크롤 자체가 이런 오지 마을에선 구하기 힘든 물건이라 비싼 가격에 팔고 있는 것이다. 헌데 카일이 그 두 배를 불렀다. 매입가의 무려 4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마티슨이 토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의 이윤을 뽑아내야 하는 마티슨의 입장에선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남은 두 마을에 가더라도 스크롤을 매입하려 할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좋아. 그렇게 하지.”
마티슨의 승낙에 토일이 재빨리 계산을 시작했다. 마나석과 스크롤 가격을 제외하고 추가로 필요한 물품을 구매했다.
“마나석과 스크롤, 그리고 기타 물건을 합해서 17골드를 제외하고 여기! 135골드입니다.”
토일이 식탁 위에 내려놓은 가죽 주머니에서 골드를 꺼내 정산하곤 다시 카일에게 건넸다.
카일은 받은 가죽 주머니에서 50골드를 꺼내어 다른 가죽 주머니에 넣고는 보일에게 내밀었다. 마나석 세공비와 마법 인첸트 비용, 그리고 약간의 여유 자금을 챙기고는 나머지는 모두 보일에게 내민 것이다.
“이걸 나에게 다 주면 어찌하느냐?”
보일은 카일이 건넨 주머니에서 5골드만 꺼내곤 다시 주머니를 돌려주었다.
“난 이 정도면 충분하다. 너도 알다시피 이곳에선 골드를 쓸 일이 없다. 아비도 그동안 모아놓은 골드가 제법 있으니 걱정 말고, 이번에 나가면 넓은 세상을 둘러보거라.”
제자들의 배신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핸 남작은 강경책 대신 유화책으로 작전을 바꿔 몇 년 전부터 은근히 자신의 딸과 카일의 혼인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카일을 가문으로 받아들여 검술을 차지하겠단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지금까지야 적당한 변명으로 미루고는 있지만, 카일이 올해 성년에 접어든 이상 다핸 남작의 요구를 언제까지나 거부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남작의 요구를 받아들여 카일에게 원치 않는 혼인을 강요할 생각이 없는 보일은 결국 남작가와의 분쟁을 피하기 위해 카일을 떠나보내기로 한 것이다. 카일 역시 보일의 뜻을 받아들였는데, 이번에 백작령으로 떠나면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보일도, 떠나야 할 카일도 알 수 없었다.
결국 카일은 보일에게서 다시 골드가 든 주머니를 받았다.
“마티슨 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라… 말해보게, 자네들 부자 덕분에 우리 상회도 제법 이득을 봤으니 최대한 편의를 봐주겠네.”
“제게 며칠 시간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상단의 출발을 늦춰달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카일의 말에 마티슨이 토일을 돌아봤다. 마티슨이 비록 상단주이긴 하지만 상단 일꾼이나 물품관리 같은 실무는 토일이 도맡아 하기에 그의 의견을 듣고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이번에 매입한 가죽 수량이 제법 많아 기존 것들과도 재분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도자기와 옹기도 깨지기 쉬운 물품이라 모두 재포장을 해야 할 테니, 대략 이틀에서 삼일 정도는 마을에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음… 삼일이라, 용병들과는 어떤가? 기간이 늘어나면 추가 비용을 요구할 텐데?”
“계약 당시 십여 일 정도의 여유를 두고 계약을 했고, 일정도 이틀 정도 앞당겨졌으니 며칠 늦춘다고 큰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토일의 말에 마티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좋아. 그럼 출발은 앞으로 5일 뒤로 하겠네. 어떤가, 이 정도면 괜찮겠나?”
“충분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카일이 마티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마티슨과 토일이 돌아간 이후 카일은 곧장 작업실에 틀어박혔다가 정확히 삼 일째 되던 날 아침 보일을 작업실로 불렀다,
“아버지 거예요.”
“이건….”
보일이 눈을 크게 뜨곤 당황한 듯 손에 들린 라이플과 카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상단주에게 출발을 늦춰달라고 한 것이 이것 때문이었느냐?”
“떠나기 전에 꼭 만들어 드리고 싶었어요. 가지고 싶어 하셨잖아요.”
“이런 마법 무구라면 오크를 더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으니 당연하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되도록 다른 이들에겐 비밀로 했으면 해요. 라이플이 귀족들에게 알려진다면 어떻게 사용될지 알 수 없으니까요.”
“걱정 말거라!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으니 말이다.”
라이플을 유심히 살피는 보일을 보며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보일에게 주의를 주긴 했지만, 사실 카일은 총이 대량으로 생산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떤 물건이든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재료 수급이 원활해야 한다. 그러나 카일이 만든 라이플은 재료 수급에서부터 문제가 많았다. 강철이 발달하지 못한 세상에서 폭발력을 견딜 수 있는 총열의 재료는 미스랄이 함유된 합금뿐이기 때문이다. 설령 총을 만든다 해도 총열 안에 강선을 판다는 것은 더욱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흠… 전에 보던 것과는 많이 다른 것 같구나.”
“네. 하지만 사용하기는 더 쉬울 거예요.”
보일에게 건넨 라이플은 카일이 앞서 만든 라이플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카일의 라이플이 전체적으로 구경이 작고 날렵한 형태였다면, 보일의 라이플은 구경이 큰 두 개의 총열이 나란히 붙은 투박하고 둔중한 형태였다.
“총열을 꺾어 사용하는 중절식 라이플입니다. 사거리는 좀 짧지만, 구경이 큰 만큼 파괴력은 더 높아요. 아마도 몬스터, 특히 오크를 상대하기는 더 유용할 거예요.”
이번에 만든 라이플은 강선을 파지 않은 2개의 총열에, 작은 자탄 여러 개가 든 탄환을 한 발씩 쏘는 산탄총이었다.
이틀이란 짧은 시간 동안 만들다 보니 단순한 엽총 방식의 중절식 소총 형태를 띠게 된 것이다. 그나마 이것도 미리 만들어 놓은 총열이 있어 가능했다.
“일단 탄환 제작법부터 알려드릴게요.”
카일은 작업실 한쪽에 놓인 작은 나무상자를 들어 선반 위에 올렸다. 상자 안에는 작은 납 구슬들이 꽉 차 있었다.
“이건 납이 아니냐?”
“타론 아저씨께 부탁해 미리 만들어 놓은 납탄이에요. 이걸 이용해 탄환을 만들어야 해요.”
카일이 웃으며 상자 옆, 커다란 압착기 형태의 기계로 향했다.
“탄환을 만들려면 일단 밀랍이 필요해요.”
카일은 먼저 밀랍이 들어 있는 작은 철합을 화로 위에 올렸다. 밀랍이 녹기를 기다리는 동안 기계 아래쪽 작은 원통 안에 마티슨에게 매입한 스크롤을 올린 후,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납 구슬을 넣었다.
“마지막으로 밀랍을 부은 뒤 위에서 눌러 압착을 시키면 탄환이 완성되죠.”
카일이 기계 위쪽에 달린 쇠막대기를 강하게 누르자 마치 코르크 마개 형태의 둥글고 커다란 탄환이 만들어졌다. 카일이 가진 라이플에 비해 조금 더 투박하고 컸다.
“생각보다 간단하구나.”
보일이 카일의 손에 들려 있는 총탄을 요모조모 뜯어보며 말했다.
“마법이라 총탄을 사용한 후에는 총열 안에 남아 있는 잔여물도 없어 편리하죠. 사용 방법은 단순하니까 쉽게 쓸 수 있을 거예요!”
카일은 예전에 만들어 두었던 가죽 벨트에 탄환을 하나씩 끼워 넣었다. 탄환을 쉽게 휴대하기 위해 언젠가 서부 영화에서 보았던 가죽 탄띠를 만들어 본 것이다.
“이제 갈 곳이 있어요.”
카일이 건넨 벨트를 이리저리 살피던 보일이 고개를 들었다.
“가다니? 갑자기 어딜 가잔 말이냐?”
보일의 물음에 카일이 웃으며 풀어놓았던 검 대를 허리에 차고 라이플이 든 가죽집을 등 뒤로 돌려 맸다.
“새로운 무기를 얻었다면 사용법도 알아야겠죠.”
“지금… 사냥을 가잔 말이냐?”
“얼마 전 정찰을 하던 중 우연히 마을 인근에서 오크 마을 하나를 발견했어요. 대략 3백여 마리는 될 것 같더군요.”
“3백이라…. 그 정도면 오크 전사는 백오십 마리 정도가 있겠구나.”
“제가 보기엔 전사의 숫자는 그리 많아 보이진 않았지만, 대신 어린 오크들이 상당했어요. 대략 백여 마리 정도?”
“음…. 그 정도면 2~3년 후엔 전사로 성장할 거다.”
“맞아요. 그래서 저도 떠나기 전에 정리하고 싶어요.”
“실전을 겸해 라이플 사용법을 알려주겠단 말이구나!”
카일의 뜻을 이해한 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늘 실전보다 좋은 훈련은 없다고 하셨잖아요.”
카일이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어린 카일을 데리고 위험천만한 고원 일대를 돌며 보일이 늘 강조했던 말이다.
“녀석,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카일의 말에 보일이 피식 웃음을 흘렸지만 이내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너와 함께하는 마지막 사냥이구나.”
“섭섭하세요?”
“녀석! 그래, 아니라곤 말하지 못하겠구나.”
“그럼… 가지 말까요?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가지 않겠어요.”
카일의 말에 보일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녀석,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구나.”
“정말인데요.”
“됐다, 이 녀석아! 지금 널 보내지 않으면 남작이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를 일이다. 지금 떠나는 것이 아비나 너에게 좋아.”
보일이 제법 심각한 얼굴로 말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미 결정한 일이었고 이것이 최선임을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좀 서둘러야겠다. 출발 시간에 맞추려면 좀 어중간하겠구나.”
아일론 상회가 마을을 떠나려면 아직 이틀이란 시간이 남았지만, 단둘이서 오크를 토벌하려면 이틀이란 시간도 빠듯했다.
“걱정 마세요.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니까요.”
목책을 벗어나 한참을 걸어가던 카일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평소 다니던 길에서 벗어났다.
“이곳은 베어 협곡으로 가는 길이 아니냐.”
베어 협곡, 오래전부터 곰이 많이 잡히는 곳이라 해서 베어 협곡이라 부르던 곳이다. 몇 년 전 카일이 희귀한 블루 베어를 잡은 곳이기도 했다.
“맞아요. 오크 마을이 있는 곳이 바로 베어 협곡 안쪽이에요.”
베어 협곡은 오크 랜드로 향하는 길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요새가 건립되고 영지병이 파견되자 최근 몇 년간 이곳을 찾는 사냥꾼이나 자경단도 사라진 상태였다. 요새 건립으로 더 이상 곰사냥을 나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양질의 몬스터나 오크 가죽을 얻을 수 있게 되었으니 위험한 곰사냥은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이다.
“오크 마을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자칫 낭패를 볼 뻔했구나!”
베어 협곡에서도 가끔 몬스터들이 발견되긴 하지만 떠돌이 오크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도 곰 자체가 떠돌이 오크 한두 마리 정돈 직접 사냥할 정도로 사나워 크게 신경 쓰지 못 했었다. 만약 이곳을 카일이 발견하지 못했다면 차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난 수백에 달하는 오크들의 기습적인 공격에 큰 피해를 입게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