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32. 아일론 상회(2)
“아!”
마티슨의 말에 그때서야 보일과 카일이 마티슨의 손에 든 찻잔을 보았다.
찻잔은 최근 카일이 만들기 시작한 도자기였다. 대장간에서 사용할 숯을 굽기 위한 가마가 있었는데, 그 가마를 이용해서 용기를 만들어 본 것이었다.
일부 주석이나 황동, 부유한 귀족의 경우엔 금이나 은제 식기를 사용하긴 하지만 대부분의 평민은 목기로 된 식기를 사용했다. 하지만 목기는 쉽게 썩거나 곰팡이 생겼다. 심한 경우엔 악취가 진동해 음식을 먹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옹기였다. 이미 숯가마가 있으니 옹기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고령토를 구할 수 없어 도자기는 만들지 못했었는데, 최근 오크랜드 인근에서 고령토를 발견하면서 처음 만든 도자기가 바로 찻잔이었다.
“손에 든 찻잔은 카일이 직접 만든 겁니다.”
“이걸 자네 아들이 만들었단 말인가?”
마티슨이 놀란 얼굴로 찻잔과 카일을 번갈아 보며 탄성을 터트렸다.
“이 아름다운 빛깔이며 완벽한 균형감까지! 도대체 이걸 어떻게 만든 건가?”
마티슨은 눈을 빛내며 카일을 바라보았다.
사실 보일 역시 집에서 사용하는 옹기와 찻잔을 처음 봤을 때는 상당히 놀라워했지만, 용병 출신인 데다가 거친 음식에 익숙한 보일은 식기나 음식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음식이란 맛보다는 배만 채우면 그만이란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물론 보일 역시 옹기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수수술은 바로 옹기 단지에서 익혀야 가장 맛이 좋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티슨은 달랐다. 찻잔을 보자는 순간 상인으로서의 본능이 그를 일깨웠다.
‘이걸 귀족들에게 팔 수만 있다면…!’
마티슨이 카일에게 대답을 재촉하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카일 역시 도자기와 옹기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마티슨의 말에 쉽게 도자기나 옹기 제조법을 알려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우연히 만드는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만 이걸 만들려면 특별한 재료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대량으로 만들기는 힘듭니다.”
카일이 마티슨의 의중을 알아보고는 바로 선을 그었다.
“…쩝! 자네 아들 제법 똑똑하군, 좋다. 그럼 제작 비법을 내게 팔게, 500골드 주겠네! 어떤가?”
마티슨의 말에 별생각이 없었던 보일이 눈이 크게 떴다.
설마 마티슨이 500골드라는 거금을 내어놓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A급 용병이 한 번의 의뢰를 수행하면 10골드에서 많이 받아야 20골드를 받는 걸 생각하면 500골드가 얼마나 큰 돈인지 알 수 있었다.
보일은 당연히 카일이 마티슨의 의견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카일의 다음 말에 보일이 놀란 얼굴로 카일을 돌아보았다.
“제작법을 알려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도자기를 만들려면 특별한 재료가 필요합니다.”
마티슨은 고개를 저었다. 어리게만 보았던 녀석이 제법 강단 있게 500골드를 거부하고 나온 것이다.
“이걸 도자기라 부르나 보군? 좋아, 천 골드 어떤가? 이만하면 도자기 제조법의 가치론 충분할 것 같은데, 내가 줄 수 있는 최고 금액이다.”
마티슨의 말에 카일은 내심 헛웃음을 지었다. 전생에서 도자기는 명, 청시대 최고의 수출품으로 중세 귀족들의 최대 사치품이었다. 오죽하면 임진왜란을 다른 말로 도자기전쟁이라 불렀다고 하겠나. 카일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시지요. 오늘 마티슨 님을 초대한 건 아버님께서 부탁하신 것 때문입니다.”
보일은 카일과 마티슨의 대화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간 금액이 보일로서는 상상도 해보지 않은 금액이기 때문이었다.
“휴, 정말 안 되겠나?”
마티슨의 말에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좋아! 그럼 이 찻잔과 가지고 있는 도자기들을 모두 내게 팔게! 이것까지 거절한다면 난 지금 일어나 돌아가겠네!”
마티슨의 초강수에 카일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주방에서 크고 작은 접시 이십여 개와 찻잔 일곱 개, 그리고 작은 찻주전자 하나를 꺼내놓았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이 정도가 전부입니다.”
뒤이어 카일은 옹이로 만든 접시와 그릇도 내놓았다.
그동안 취미 삼아 조금씩 굽기 시작한 옹기그릇과 접시가 작업실 한쪽에 제법 많이 쌓여 있어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긴 했다.
“이건 저것과 다르군…?”
“도자기와는 조금 다르지요, 이건 비교적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어 하나둘씩 만들다 보니 숫자가 제법 많이 늘었습니다. 다 가져가시지요.”
마티슨은 옹기를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질감이나 색감이 도자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름 독특한 개성이 있어 상품성은 있어 보였다.
“이것도 모두 사겠네! 옹기그릇은 개당 50실버, 도자기는 개당 2골드 쳐 주지. 어떤가?”
마티슨이 카일을 보며 물었다.
카일이 또다시 거절 할까 처음부터 생각한 가격보다 조금 올려 불렀다.
“좋습니다.”
카일이 순순히 응하자, 이번에는 잔뜩 긴장했던 마티슨의 맥이 탁 풀려 버렸다.
그러나 카일의 입장에서도 그리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팔려고 만든 물건도 아니었고, 취미로 만든 것이 생각지도 못하게 비싼 가격에 팔린 거라 전혀 불만이 없었다.
“좋아! 가서 토일과 일꾼을 데려오지.”
마티슨은 그렇게 말하고는 휑하니 집을 나가 버렸다. 혹시나 카일이 말을 바꿀까 서둘러 자리를 피한 것이다.
“카일. 천 골드라는 엄청난 돈을 왜 거절한 것이냐?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돈이다.”
보일이 카일을 보며 나무라듯 물었다. 당시엔 당황도 했고 카일의 체면을 생각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아까운 마음이 든 것이다.
“아버지는 천 골드를 받으면 뭘 하실 생각이세요?”
보일은 카일의 말에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마을을 떠나 영주성, 아니, 왕도로 갈 건가요?”
보일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이곳 사론 마을을 떠나지 않는 건 카렌에 대한 추억과 더불어 마을 사람들과 쌓아온 깊은 정 때문이었다.
“난 이곳을 떠나지 않을 거다. 허나 너는 다르지 않으냐? 넌 오래전부터 영지를 떠나고 싶어 했으니 충분히 도움이 될 거다.”
보일의 말에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저에게 천 골드라는 거금은 오히려 독이에요. 만약 제게 거금이 생겼단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요.”
“그건… 음…….”
“골드를 차지하기 위해 도적단이 마을로 쳐들어올지도 몰라요. 도적단보다 더 무서운 귀족들이 찾아올 수도 있겠죠. 아일론이라는 중소 상단이 천 골드나 내어놓으며 산 기술이 어떤 건지 궁금하지 않겠어요?”
보일이 심각하게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물이란 지킬 수 있을 때 가치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가치의 물건이라도 지킬 수 없다면 오히려 스스로를 망칠 뿐이다. 이 사실을 보일은 얼마 전 제자들의 배신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만약 보일이나 카일 둘 중 하나라도 스스로 지킬 힘이 없었다면 두 사람 모두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다핸 남작이 직접 카일을 찾아와 도자기제작법을 빼앗으려 할 수도 있었다. 무력에선 보일 부자에게 밀릴지 모르지만, 그들은 귀족이라는 무소불위한 특권을 가진 존재이니 무력이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해 보일 부자를 압박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 골드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또 머릿속 기술이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니 서두를 필요는 없죠.”
보일은 결국 고개를 끄떡였다. 카일의 말 중 틀린 것이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오크 가죽과 래빗 가죽으로도 상당한 돈을 벌었고, 옹기와 도자기만 팔아도 수백 골드는 될 것 같았다. 앞으로 계속 옹기나 도자기만 만들어도 천 골드는 어렵지 않게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카일이 집 안과 작업실에 쌓아 놓은 옹기그릇과 도자기를 꺼내놓고 있는 동안, 마티슨이 수레와 토일, 그리고 일꾼을 데리고 서둘러 달려왔다.
“헉헉~ 상단주님! 천천히, 천천히 좀 가요.”
토일과 수레를 끌고 온 일꾼들은 마당에 도착한 후 거친 숨을 골랐다.
막 가죽을 정리하고 마을 회관에서 휴식을 취하려는데 마티슨이 뛰어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토일과 일꾼들을 끌다시피 닦달해 수레를 가지고 달려온 것이다.
“자자!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이것들을 서둘러 실어라! 저기 갈색 옹기는 하나에 50실버, 여기 도자기는 하나에 2골드다. 토일 자네는 물량과 금액을 계산하게.”
토일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마티슨 상단주가 이렇게 난리를 치는지 확인하기 위해 옹기와 도자기를 들고는 천천히 살폈다. 특히 토일이 유심히 살핀 건 바로 도자기였다. 유백색 특유의 독특한 빛깔과 절묘하게 잡혀있는 균형감이 조화되어 묘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었다. 사실 카일이 만든 도자기는 전통 백자라기보다는 청자에 회백토와 유약을 입혀 구운 분청사였지만, 이들에게 어필하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이거… 뭘로 만든 겁니까?”
토일 역시 오랫동안 마티슨을 따라다니며 상인으로 살아왔기에 도자기와 옹기의 가치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걸 내가 어찌 알겠느냐만, 특별한 재료가 필요하다더구나.”
마티슨이 카일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토일은 단번에 카일이 이 도자기란 물건을 만든 당사자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특별한 재료가 필요하다면 대량생산은 힘들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그럼 제작법은….”
“천 골드! 제안했는데, 거절했다.”
토일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마티슨이 도자기와 옹기를 구매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제안이 거절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제작법을 얻었다면 굳이 골드를 들여가며 도자기와 옹기를 매입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토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옹기그릇 하나를 들어 이리저리 살폈다. 도자기 특유의 유백색 아름다움보다는 다소 투박한 색감과 거친 표면을 가졌지만, 나름 실용적이면서도 그만의 독특한 개성이 느껴졌다.
“도자기는 21점에 옹기는 94점입니다. 도자기는 1점당 2골드씩 42골드에 옹기는 1점당 50실버씩 470실버, 47골드입니다. 합해서 총 89골드에 가죽값은 63골드, 모두 152골드입니다.”
토일이 미리 준비해온 가죽 주머니를 식탁 위에 내려놓은 뒤 또 다른 주머니 하나를 더 꺼내 그 옆에 내려놓았다. 무려 150골드, 가죽과 도자기 및 옹기를 판 골드였다.
마티슨이 제시한 가격은 보일 역시 함께 들었기에 알고는 있었지만, 이야기로만 듣는 것과 달리 실제로 눈앞에 거금에 놓여있자 비로소 카일이 만든 도자기와 옹기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확히 152골드입니다. 확인해 보시지요.”
이들로서는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거금이니, 토일은 카일이 당장이라도 주머니를 확인해 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카일은 그의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차분한 눈으로 주머니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일전에 아버님께서 부탁하신 것이 있을 겁니다.”
“이런! 정신이 없어 잊고 있었군. 잠시있어 보게.”
마티슨이 허리에 달린 가죽 주머니를 끌러 급히 내밀었다.
“여기, 중급 마나석이네. 아직 가공되지 않은 원석으로 가격은 10골드, 여기에 지난번 부탁한 대로 최대한 많은 스크롤을 구해 왔네! 총 40장, 가격은 평소와 같이 장당 10실버라네.”
마티슨이 내민 마나석과 스크롤을 카일이 다가가 건네받았다.
“헌데 마나석을 가공하고 마법진을 각인하려면 마법사가 있어야 하네. 2서클 이상의 마법진이면 4서클 이상의 마법사를 찾아야 할 텐데, 어찌할 생각인가? 혹 과거 인연이 있는 마법사가 있는 건가?”
보일은 오래전 제법 유명했던 용병이었던 만큼 나름 인연을 가진 마법사가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4서클 이상이면 보통 영지에 소속된 마법사일 텐데, 저 같은 용병이 어떻게 인연을 맺을 수 있겠습니까?”
보일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허허, 이 사람이, 그럼 어떻게 마법 무구를 만들려는 건가? 마나석 가공이나 마법진을 세기는 거야 세공사를 통한다 해도 마법진을 인첸트하려면 무조건 4서클 마법사가 있어야 하네. 자네도 잘 알지 않나. 고서클 마법사의 콧대가 얼마나 높은지 말이야! 아무리 골드를 들이밀어도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거네.”
마나석은 크기와 불순물의 함유에서 등급이 결정되는데, 마나석의 형태를 가공하는 일은 보석을 전문적으로 가공하는 세공사들이 맡아 가공했다. 여기에 필요한 형태의 마법진을 새겨 주었는데, 문제는 이를 인첸트하기 위해서는 해당 마법진의 서클보다 2서클 이상 높은 마법사가 필요했다. 마법을 인첸트하기 위해선 최소 3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필요했지만, 마법 무구라 칭할 수 있는 공격이나 방어를 위한 마법을 인첸트시키기 위해서는 최소 4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필요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