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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용병라이더-296화 (에필로그) (296/404)

296. 에필로그

왕자들이 이끌던 제국원정군은 트라발트 공작과 아이젠 공작의 뜻에 따라 모두 함정에 빠져 몰살당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제국 북부와 남부의 지원군들이 함께 전멸하면서 사실상 황궁을 점령한 아이젠 공작의 독주를 막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의외의 복병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아이스 랜드를 지나 비어버린 제국 북부 영지를 공격한 마파린 후작과 중립 귀족들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갑작스러운 드래곤의 등장과, 카일과 아이언 용병대의 후퇴로 인해 한때 철군을 계획하기도 했었다.

“어쩌실 생각입니까?”

“드래곤이 등장했으니 돌아가는 것이 맞지 않겠나? 이미 3왕자와 케시언 백작은 아이언 용병대의 호위를 받으며 철군했다니 더 이상 원정을 이어가는 것도 의미가 없을 것 같군.”

“그럼 역시 철군하는 것이 좋겠군요.”

마파린 후작의 말에 바이센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이 나타난 이상 서둘러 영지로 돌아가는 것이 현명하다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두 사람의 뜻에 폴론 남작이 강하게 반대했다.

“철군은 안 됩니다.”

“무슨 소린가? 드래곤이 나타난 걸 자네도 보지 않았나? 헌데 철군을 반대하다니?”

바이센 백작의 말에 폴론 남작이 오히려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드래곤이 나타났습니다. 천 년 만에 말이죠. 그럼 이후 어떻게 될 거라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드래곤으로부터 왕국을 수호할 군대를 조직할 거네, 천 년 전 그때처럼 말이야!”

“그렇습니다. 당연히 각 영지에선 이에 필요한 엄청난 세금을 왕국에 바쳐야 합니다.”

“그건 당연히…!”

“왕국, 아니, 영지를 지키기 위한 일이니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국 원정군이 언제 돌아갈지 모를 상황에서 저희가 먼저 돌아간들 수호군을 조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자네 말은?”

“왕국, 그리고 영지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이곳에서 최대한 자금을 긁어모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폴론 남작의 말에 중립 귀족들은 물론 북부에 영지를 가진 영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드래곤이 나타났다고 해서 당장 왕국이 멸망하는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드래곤이 나타난 이곳은 왕국이 아닌 제국이다. 공격을 받게 되면 제국이 먼저 받을 테니 잠시 철군을 미룬다고 해서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폴론 남작의 말대로 수호군 창설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철군을 늦출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럼… 철군은 조금만 뒤로 미루도록 하지.”

마파린 후작의 말에 바이센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립 귀족들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바이센 백작이기에 무조건 철군을 강요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결정으로 인해 제국은 엄청난 혼란에 빠지고 만다. 제국북부군과 남부군이 전멸하면서 고작 2만에 불과한 원정군을 막을 방법이 없어진 것이다. 마피린 후작과 바이센 백작의 원정군은 북부 영지를 샅샅이 약탈하며 남하하더니 아이젠 공작에 의해 방어기능을 상실한 황도를 덜컥 점령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원정군은 철저하게 황도를 약탈하고 불태웠다. 바야흐로 제국의 분열을 알리는 전화였다.

황도가 잿더미로 변하며 아이젠 공작이 크게 분개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동안 숨죽이며 잠들어있던 동부의 사자가 서서히 기지개를 켜며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제국이 이처럼 혼란에 빠져있을 때 상대적으로 크로노스 왕실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왕위를 주고 각축을 벌이던 두 왕자가 원정군과 함께 몰살당했고, 이어서 트라발트 공작의 반란으로 왕실 가족들 대부분이 죽임을 당하면서 정당한 왕위 계승권을 가진 사람은 사실상 복귀한 3왕자가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반란을 일으킨 트라발트 공작과 더불어 드래곤을 물리친 엄청난 공에 더해 제1왕녀란 신분으로 여왕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도 있었지만, 이사벨라 왕녀는 스스로를 스파더 가문의 남작이라 칭하며 3왕자를 적극 지지했다. 덕분에 무사히 왕위에 오른 3왕자 제르노는 이사벨라 남작의 공을 인정해 그녀를 공작으로 임명하고, 반란자 트라발트 공작의 영지를 몰수해 그녀의 영지로 하사했다. 물론 국왕이 된 제르노의 의지는 아니었다. 그는 트라발트 공작령을 왕실로 몰수하고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하지만 귀족, 특히 제국 원정에 성공한 마파린 후작과 중립 귀족들의 강력한 주장에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국왕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었던 중립 귀족들이 새롭게 권력을 차지하며 어느새 자신의 가장 강력한 견제 세력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물론 이와는 정반대의 인물도 있었다. 트라발트 공작과 혼인동맹을 맺으며 사실상 반란에 참여한 동부 그린넨 백작은 트라발트 공작의 실각을 재빨리 파악하곤 서둘러 3왕자에게 접근, 강력한 조력자로 등극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그린넨 백작가는 엄청난 재물을 왕자에게 바쳐야 했지만, 반란자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었다.

“만약… 이엘과 공작의 아들을 혼인시켰다면…!”

그린넨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랬다면 백작가는 지금쯤 반역자로 낙인찍혀 사방에서 몰려든 토벌대로 인해 멸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래…. 녀석은 찾았느냐?”

점점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그린넨 백작이 펠론 자작에게 물었다.

“벌써 넉 달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여공작께서도 카일… 소영주를 찾기 위해 사람을 풀었지만,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드래곤을 쫓았다고 하던데… 혹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닌지 모르겠군.”

“소영주는 소드마스터입니다. 마왕과의 전투로 중상을 입은 드래곤이 소드마스터인 카일 경을 죽이긴 힘들 겁니다.”

“허허, 그 녀석이 이사벨라 여공작의 아들이었다니, 진작 알았다면… 그린넨 백작가가 이렇게 무너지진 않았을 텐데….”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이엘과 카일이 함께 있으니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이엘 그 녀석, 너도 알겠지만, 한번 결정을 내리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녀석이다. 절대 가문… 날 용서하진 않을 거다.”

백작의 침울한 얼굴에 펠론 자작 역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꽈앙-

그때였다. 집무실 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리며 중년의 사내가 다급히 들어왔다.

“페일로, 이게 무슨 짓이냐!”

그린넨 백작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페일로는 그린넨 백작의 사촌 동생으로 백작가가 운영하는 상단 전반을 책임지고 있었다.

“크, 큰일 났습니다!”

“설마 이엘을 찾은 것이냐?”

“그게 아닙니다. 태, 태양의 눈물이 암흑시장 경매에 나타났습니다.”

“비밀 금고에 있어야 할 보석이 암흑시장에 나타나다니 무슨, 말도 안 돼….!”

그린넥 백작과 펠론 자작이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녀석입니다.”

“허허, 감히 태양의 눈물을 털어가다니…!”

“태양의 눈물의 비밀이 밝혀지면 국왕도 저희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어쩔 수 없지, 비밀리에 경매에 참여하도록,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매입해야만 하네.”

“알겠습니다. 반드시 되찾아오겠습니다.”

“…가서 녀석을 만나보게.”

“반드시 이니엘을 데려오겠습니다.”

펠론 자작의 말에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개입해서는 안 돼. 잘 달래보고, 어렵다면 거처만이라도 알아 오게, 녀석을 설득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야.”

“알겠습니다.”

펠론 자작이 페일로를 이끌고 황급히 집무실을 빠져나와 곧장 암흑시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때쯤엔 이미 카일을 비롯한 여인들은 커다란 마차에 올라 서부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이 죽음의 호수를 벗어난 건 10일 전이었다. 시카니스가 사라지면서 카일과 여인들은 섬에 고립되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고 만 것이다. 세인의 와이번이 무사히 아공간에 있긴 했지만, 드래곤과의 전투로 큰 부상을 당하면서 완치 때까진 소환이 어려웠다. 꼼짝없이 섬에서 함께 생활할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단 며칠이지만 이미 섬에서 생활한 덕분에 적응이 그리 어렵진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평범한 넉 달이란 시간이 지나고 섬을 빠져나왔을 땐,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3왕자가 새롭게 국왕이 되었고 제국은 지독한 내전에서 허우적거라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일은 여공작의 탄생과 함께 카일 자신의 모든 기반이라 할 수 있는 크리센트 숲이 공작령에 귀속되었단 사실이었다. 더불어 아이언 용병대 역시 공작가, 정확히는 소영주 직속 기사단으로 개편되어 지금도 열심히 자신을 찾고 있었다. 카일이 사라진 사이 카일의 의사도 반영되지 못하고 모든 것이 공작령에 귀속되고 만 것이다.

“떠나야겠습니다.”

카일이 단호하게 말했다.

“좋아요.”

이엘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갈 생각인가요?”

“이번엔 서부로 가볼까 합니다.”

“서부?”

“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습니다. 가능하면 맨피스 왕국까지도 가보고 싶군요.”

“음…. 그럼 골드가 제법 많이 필요하겠는걸?”

“사하가 도와주면 걱정할 것 없어요.”

이엘이 품 안 깊숙이 넣어둔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아! 기억나요. 가문에서 가져온 보석!”

“맞아요. 이걸 되팔 생각이에요.”

짝-

사하가 재밌다는 듯 손바닥을 치며 웃었다. 언제나 우울함을 한편에 감춰두고 있던 사하는 이제 오랜 굴레를 벗어던진 덕분인지 단 몇 달 만에 한층 밝고 아름다워져 있었다.

“맞다. 가문에 되팔기로 했지요.”

“네. 도와줄 수 있나요?”

“이런 재미난 일에 빠질 수는 없죠. 뭘 도와주면 될까요?”

“보석을 암흑상단 경매에 부치고 싶어요.”

“경매? 그러다가 다른 곳에서 매입하려 들면 곤란하지 않나요?”

“상관없어요. 어차피 그린넨 백작가만 참여한 가짜 경매니까요. 상단을 책임진 패일로 남작이 암흑상단의 경매에 자주 참여한다고 들었어요. 그를 이용하면 경매 소식이 쉽게 백작가에 전해질 거라 생각해요.”

“흠. 그럼 주인공을 빛내줄 적당한 조연도 필요하겠군요.”

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 정돈 얼마든지 할 수 있죠.”

사하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모든 계획을 사하의 암흑상단에 맡긴 채 카일과 여인들은 커다란 마차를 타고 서부로 향했다. 마차를 타고 느릿하게 이동하는 그들은 늦은 저녁 무렵 작은 공터에 도착했다.

“실례합니다.”

마차에서 내린 늙은 마부가 작은 모닥불을 피운 채 앉아있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손님께서 이곳에서 야영을 하려 하는데, 불 좀 얻을 수 있겠습니까요?”

늙은 마부의 말에 사내가 고개를 들어 마차에서 내린 여인들과 덩치 큰 젊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귀족들같은데, 이런 외진 곳까진 어쩐 일입니까?”

“글쎄요. 저 같은 늙은 마부가 그런 걸 어찌 알겠습니까? 그저 제법 두둑한 골드를 주기에 서부 영지까지 가는 것뿐이지요.”

“서부 영지? 꽤 먼 곳이군.”

“저야 어린 귀족들의 이탈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부가 불이 붙은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돌아가고 얼마 뒤, 여인들의 밝고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와 사내의 기분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다.

“안녕하십니까?”

고개를 푹 숙인 채 가만히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던 사내에게 카일이 다가갔다.

카일의 사람들 모두가 공작령에 합류한 것은 아니다. 단 한 곳, 정보조직을 이끄는 바일 만이 유일하게 카일을 기다리며 술 창고를 지키고 있었다. 덕분에 이사벨라 여공작의 붉은 거미들의 시선을 피해 서부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흠… 무슨 일인가?”

사내가 고개를 들어 카일을 바라보며 물었다.

“혼자 계신 것 같은데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제법 술이 잘 익어 맛이 좋답니다.”

카일이 사내의 대답도 듣지 않고 모닥불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술병을 내밀었다.

“독특한… 술병이군.”

사내가 술병을 이리저리 살폈다.

“술병이 독특한 만큼 술맛도 독특할 겁니다.”

카일이 히죽 웃으며 들고 있던 커다란 술병을 기울였다. 그 모습에 굳어있던 사내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카일이 건넨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크윽-”

사내가 얼굴을 찌푸렸다가 이내 놀란 얼굴로 술병을 내려보았다. 목 안으로 넘어가며 뜨거운 기운과 함께 은은한 과일 향이 훅 밀려 올라왔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좋은 위스키였다.

“어떻습니까? 제법 좋은 술 아닙니까?”

“이런 술은… 처음이군.”

“당연하죠, 아직 판매가 시작된 건 아니니까요.”

카일이 웃으며 술병을 기울였다.

“판매?”

“작은 술 창고를 가지고 있거든요.”

카일이 웃으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헌데…. 어디까지 가십니까?”

“딱히 정한 곳이 없소, 그저 조카를 죽인 원수를 찾고 있을 뿐.”

“원수? 그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까?”

“넉 달 전 그를 본 사람이 있다고 들었지만,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른다오.”

“그렇군요. 그럼 지금은 어디로 가는 겁니까?”

“글쎄? 서부로 한번 가볼까 생각 중이라네.”

사내의 말에 카일이 환하게 웃었다.

“잘됐군요. 저희와 함께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자네들과 말인가?”

“네.”

“자넨, 날 잘 모르지 않나?”

“그거야 여행을 하면서 서로 알아가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런 조건 없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온 카일의 모습에 사내는 닫혔던 마음의 문이 조금 열리는 걸 느꼈다.

“…자네들이 불편하지 않다면, 난 괜찮네.”

“좋습니다. 그럼 함께 가는 겁니다.”

“좋네.”

“그럼 통성명이나 할까요? 전 카일이라 합니다. 용병이죠.”

“용병? 귀족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잠시 귀족이었던 적도 있지만, 전 용병이 좋습니다.”

“그런가?”

사내가 피식 웃었다. 그 역시 얼마 전 귀족에서 용병이 되어 왕국을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난 베인이라 하네, 나 역시 용병이라네.”

“용병? 전 수행을 나온 기사라 생각했습니다.”

“나 역시 얼마 전까진 한 가문의 기사로 있긴 했지.”

“하하! 그러셨군요.”

카일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베인 님.”

“나야말로 잘 부탁하네, 카일.”

서로 두 손을 맞잡은 카일과 베인이 서로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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