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 다시 평범하게[完]
차르륵-
안장에 감긴 사슬이 빠르게 풀려나갔다. 빠르게 떨어지던 시카니스가 날개를 활짝 펴며 속도를 줄이는 순간 카일은 이미 붉은 구체를 향해 몸을 던진 후였다. 떨어지는 카일의 몸 주변으로 은은한 금광이 어렸다.
스각-
카일이 다가오는 수십 개의 붉은 구체를 향해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꽝-
꽈광-
수십 개의 붉은 구체가 카일의 검격에 반으로 갈라지며 폭발했지만, 카일의 신형은 폭발을 뒤로하고 더욱 빠른 속도로 아르미스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죽어라!”
카일의 검에서 생성된 금빛 오러 블레이드가 아르미스의 비늘을 갈랐다.
“크악, 빌어먹을 녀석!”
아르미스가 빠르게 몸을 털었다.
파지직-
“크윽-”
아르미스의 몸에 검을 박아넣으며 버티던 카일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르미스의 동체에서 일어난 강력한 전격이 카일을 직접 타격한 것이다. 카일이 전격을 버티지 못하고 아르미스에게서 황급히 뛰어내렸다.
차르륵-
시카니스에 의해 당겨진 카일의 신형이 하늘 위로 솟구치는 사이 시안느가 던진 강화 스피어가 아르미스의 등에 꽂혔다. 비록 카일이 던진 스피어보다는 파괴력이 떨어지지만 아르미스에게 타격을 주기엔 충분한 위력이었다.
“크악!”
아르미스가 비명을 지르며 급반전, 근접한 시카니스를 향해 직접 달려들었다.
퍼엉-
순간 아르미스의 눈앞에서 일어난 강력한 빛의 폭발,
“아악-!”
사하가 일서클 마법 라이트를 최대한 증폭시켜 아르미스의 눈앞에서 터트린 것이다. 그사이 시카니스가 빠르게 아르미스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 주변을 선회했다.
“하찮은 미물 주제에 감히!”
아르미스가 주변을 선회하며 자신을 노리는 시카니스를 보고 분노를 터트렸다. 인간이 여기까지 쫓아와 자신을 압박하며 공격할 수 있는 것도 모두 블랙 와이번, 저 녀석 때문이었다.
“놈! 죽여주마!”
아르미스의 순백의 동체가 서서히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드래곤 하트의 마나를 최대한 끌어내기 시작했다. 아르미스 역시 이곳에서 반드시 녀석들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이다.
“막아야 해요!”
사하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며 급히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파지직-
붉은 보석을 중심으로 일어난 푸른 전류가 하나로 뭉치며 작은 구체를 생성해냈다. 구체가 아르미스에게로 날아갔다.
꽝-
아르미스의 동체와 부딪힌 전격 마법이 허무하게 소멸되며 사라졌고 에밀이 시전한 빛의 칼날까지도 모두 드래곤 비늘과 합쳐진 금빛 마나의 방어력을 뚫지 못했다. 하지만 아르미스 역시 온전한 상황은 아니었다. 무리하게 마나를 끌어올리면서 겨우 안정시켜 놓은 마나가 다시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놈…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
분노의 외침과 함께 아르미스의 목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아르미스가 자신이 가진 모든 분노를 토해냈다.
쿠아아-
화이트 드래곤이 가진 극한의 한기가 거대한 입을 통해 뿜어져 나왔다.
“피해!”
시카니스가 빠르게 하늘 위로 날아오르며 아르미스의 브래스를 피해 날갯짓했지만, 근접 공격을 위해 접근한 상태였기에 완전히 피하는 건 무리인 상황이었다.
끼이익-
시카니스가 비명을 질렀다. 브레스에 스친 날개가 얼어붙기 시작한 것이다.
“안돼!”
카일이 깜짝 놀라 소리쳤지만 이미 시카니스의 동체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카일이 허리에 걸린 고리를 과감히 풀어버렸다. 이대로라면 어차피 시카니스에게 딸려가 바닥에 추락할 수밖에 없다.
“놈, 죽인다.”
카일이 아르미스를 향해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아르미스 역시 무리하게 브레스를 사용한 덕분에 카일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빠르게 떨어져 내리던 카일이 아르미스의 길게 뻗은 목을 향해 오러 블레이드가 맺힌 검을 찔러넣었다.
“크아악-!”
빠르게 떨어지는 운동 에너지와 오러 블레이드의 조합은 대단했다.
아르미스의 목이 길게 갈라지며 붉은 피가 쏟아져 내렸다. 아르미스가 고통에 찬 비명을 토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수직으로 길게 목을 갈라냈지만 아르미스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카일을 붙잡기까지 했다.
“으아악!”
사방에서 조여오는 압력에 카일이 비명을 질렀다.
“이놈! 드디어 잡았다.”
아르미스가 광망이 흐르는 눈으로 카일을 내려다보았다. 분노한 마음으로 당장이라도 녀석을 터트려 죽이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아르미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건 바로 카일이었다. 녀석을 통해 부상을 치료하고 다른 드래곤들을 부활시켜야만 했다.
“크르르, 네놈을 평생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마!”
아르미스가 앞발에 잡혀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카일을 보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블랙 와이번은 얼어붙은 날개로 죽음의 호수에 추락했고 카일까지 자신의 손에 붙잡힌 이상,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을 터였다.
“생각 같아선 모두 죽여버리고 싶지만… 잠시 미루기로 하지…!”
아르미스가 죽음의 호수 중앙 섬 위로 올라서는 블랙 와이번과 일행들을 돌아보며 아쉬운 듯 말했다. 이미 브레스까지 토해내며 남은 기력을 모두 쏟아냈기에 더는 저들을 상대할 기력이 없었다. 심지어 레어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끼악-
하늘 위에서 들려온 기성에 아르미스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저런… 미친!”
하늘 위, 골드 와이번 한 마리가 아르미스를 향해 화살처럼 떨어져 내렸다. 방어를 도외시한, 사실상 자살 공격이나 다름없었다.
“아, 안돼!”
아르미스가 급히 몸을 틀어 떨어 져내리는 골드 와이번을 피하려 했지만 와이번 중 가장 빠르다고 알려진 비행체를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 골드 와이번은 그대로 아르미스와 충돌했다.
끼아악-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른 골드 와이번과 함께, 아르미스가 호수 위로 추락했다. 아르미스의 앞발에 붙잡혀있던 카일 역시 물속으로 떨어졌다.
“카일 님!”
세인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블랙 와이번이 드래곤을 추적하기 위해 떠났단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세인이 급히 뒤를 쫓았다가, 붙잡힌 카일을 보고는 와이번을 몰아 몸통 박치기를 시도한 것이다.
물속으로 가라앉는 카일을 겨우 붙잡은 세인이 황급히 카일을 붙잡아 섬으로 향했다.
푸화악-
그때였다. 물속에서 아르미스가 솟구쳐 올라 자신을 붙잡고 늘어진 골드 와이번을 처참하게 물어뜯었다.
꽈드득-
끼아악-
뼈가 으스러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골드 와이번의 날개가 반 이상 뜯겨져 나가더니 끌려들어간 몸뚱이가 호수 위로 처참하게 내팽개쳐졌다.
“감히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아르미스가 분노한 눈으로 기절한 카일과 그를 힘겹게 끌어당기는 세인을 노려보았다. 아르미스가 그들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서는 순간,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아르미스를 덮쳤다. 조금 전 날개가 급속히 얼어붙으며 반 이상 떨어져 나간 시카니스였다.
“끈질긴 녀석! 크아악-”
아르미스가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목을 물고 늘어진 시카니스를 떨어뜨리려 했지만 그럴수록 시카니스의 이빨이 더욱 깊숙이 아르미스의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카일로 인해 목이 길게 잘려 나간 뒤라 아르미스에게 가중된 고통은 더욱 심했다.
“크아악- 이 녀석이…!”
아르미스가 시카니스의 반쯤 남은 날개마저 뜯어내려는 듯 강하게 물어뜯고 흔들었다. 동시에 시카니스도 아르미스를 호수 안쪽으로 끌어당기며 더욱 강하게 목덜미를 물었다.
“크아악-!”
아르미스가 호수 속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아르미스의 거대한 동체는 시카니스의 힘과 무게에 밀려 호수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카일… 그동안 즐거웠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시카니스의 음성에 기절했던 카일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시카니스!”
카일이 급히 주변을 살폈지만 보이는 것은 거칠게 요동치는 호수뿐이었다.
“카일! 괜찮아요?”
카일의 외침에 호수를 바라보고 있던 여인들이 급히 카일에게 달려왔다.
“시카니스는 어떻게 됐습니까?”
“드래곤을 끌고… 호수 속으로 사라졌어요.”
잠시 망설이던 이엘이 요동치는 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안돼!”
카일이 급히 호수 속으로 달려가려 몸을 일으켰지만 중상을 입어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비틀거리면서도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 카일의 팔을 세인이 황급히 붙잡았다.
“이미 늦었어요.”
“하지만…!”
카일이 점점 잠잠해져 가는 호수를 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쩔 수 없었어요. 시카니스는 카일을 구하려 스스로 자신을 희생한 거예요.”
“이런 모습은 시카니스도 분명 실망할 거예요.”
카일의 옆으로 다가온 이엘과 시안느가 그를 위로했다. 하지만….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어쩌면 시카니스도 실패했을지 몰라요.”
잠잠해진 호수를 말없이 바라보던 사하와 에밀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순간 갑자기 호수가 부글거리며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호수 밑바닥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올라오고 있어요.”
사하의 외침에 모두들 창백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 끝이다. 카일은 이미 아르미스에게 붙잡혀 전신의 뼈가 부러졌다. 에밀의 신성력으로 겨우 붙여 놓았지만, 최소 몇 달간은 꼼짝없이 누워있어야만 했다. 세인의 와이번 역시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아공간석으로 사라진 이후였다. 더구나 이곳은 섬, 고립된 지형으로 도망칠 곳도 없었다.
“여기까지인가 보군요.”
사하가 카일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혼자였다면 정말 무서웠을 거예요.”
에밀이 사하의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 섬, 우리와 인연이 깊은가 봐요. 결국 다시 이곳으로 함께 돌아왔잖아요.”
시안느가 사하의 팔을 살며시 껴안았다.
“맞아요. 여긴 나름 추억이 있잖아요. 평범한 삶을 즐기려 했지만 정말 평범하지 못했죠. 만약 여기서 살아남으면 정말 평범하게 지내봐요, 우리.”
“좋아요.”
“얼마든지.”
모두들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화이트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누구도 이곳에서 살아 돌아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푸화아악-
호수가 갈라졌다. 거대한 존재가 호수를 뛰쳐나왔다. 칠흑같이 어두운 비늘, 거대한 날개와 가슴 사이로 돋아난 작은 앞발, 이마와 머리 양쪽에 돋아난 거대한 세 개의 뿔, 그리고 이글거리는 푸른 눈까지, 호수 속에서 몸을 드러낸 존재는 순백의 아름다운 비늘을 자랑하던 화이트 드래곤이 아니라 블랙 드래곤이었다.
“시… 카니스!”
카일은 이글거리는 푸른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블랙 드래곤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봤다.
“도대체… 어떻게!”
-운이 좋았다. 내가 물어뜯었던 곳이 바로 드래곤 하트가 있던 곳이었다-
블랙 와이번은 애초 드래곤의 부활을 목적으로 만들어졌기에, 시카니스가 드래곤 하트를 차지하자 곧장 진화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 문제가 남아있었다. 와이번일 때의 시카니스와 드래곤이 된 시카니스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시카니스…!”
-걱정 마라! 난 드래곤의 기억은 가지고 있지 않다. 내가 가진 것은 오직 와이번으로서의 기억뿐이다.-
“아…!”
카일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천년 전 드래곤의 기억이 없다면 굳이 인간과 적대적인 관계를 취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드래곤이 된 이상 너와의 맹약은 이것으로 끝이다.-
“시카니스….”
-드래곤이 되었으니 드래곤으로서의 자아를 찾을 것이다.-
“좋은 생각이다. 맞아! 드래곤이 되었으니 이젠 그에 맞는, 중간계의 수호자가 되어야겠지, 시카니스, 새롭게 태어난 걸 축하한다.”
- 이해해주니 고맙군. 너 역시 새로운 동반자를 만나길 기원하마, 잘 있거라.-
시카니스가 서서히 날개를 움직여 하늘 위로 떠오르더니 이내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죽음의 호수 위로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이젠… 정말 끝이군요.”
카일이 사라진 시카니스를 보며 아쉬운 듯 말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 또 다른 시작이 우릴 찾아올 거예요.”
세인이 카일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그럼… 약속대로 이번엔 아주 평범하게 지내봐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말이에요.”
“전, 찬성!”
“저도 좋아요.”
“모두 좋아하는 것 같으니… 그럼 뭐부터 시작하죠?”
이엘의 말에 그녀들의 시선이 일제히 카일을 향했다.
“배고파요.”
“맞아요. 먹을 걸 줘요.”
“이제 지쳐서 움직일 기운도 없어요.”
하나둘 바닥에 주저앉아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 처럼 카일을 바라보았다.
“…하, 하하하.”
카일이 어색하게 웃으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