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294화 (294/404)

294. 천년의 복수

“…살리만더!”

사하의 나직한 목소리에 이엘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설마, 저 노인이 정령사란 말인가요?”

“맞아요. 불의 최상급 정령 살리만더를 자유롭게 다루는 걸 보니 정령사가 분명해요.”

쾅쾅쾅-

트라발트 공작과 살리만더의 전투는 공격을 피해 정령사를 죽이려는 공작과 정령사를 보호하며 공작을 태워 죽이려는 정령의 쫓고 쫓기는 싸움이었다. 오러 블레이드라면 최상급 정령이라도 역소환시켜 정령사에게 타격을 줄 수 있지만 검사 역시 그에 따른 반발을 감당해야 하기에 정령을 직접 공격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공작도 인내에 한계를 느꼈는지 그의 검 위로 노을빛 오러 블레이드가 형성되었다.

“이젠, 끝이다.”

공작의 검이 앞을 막아선 살리만더를 베어버렸다.

크앙-

강력한 오러 블레이드에 살리만더가 고통스런 비명을 토하며 스르륵 사라졌다.

“커억!”

노인이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고 공작의 입술 사이로 가는 핏물이 흘러내렸다.

“이젠 정말 끝이다. 다신 살아서 돌아오지 마라!”

트라발트 공작이 검을 높게 들어 올렸다. 하지만 노인은 그런 공작을 보면서 오히려 환하게 웃었다.

“공작과 함께라면… 오히려 영광이라고 할 수가 있지.”

노인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공작의 다리를 덥석 붙잡으며 소리쳤다.

“지금이다!”

노인의 말에 깜짝 놀란 공작이 뒤를 돌아보았다.

타앙-

퍼억-

라이플에서 뿜어져 나온 총탄이 정확히 공작의 목을 관통했다. 머리를 노렸지만, 공작이 갑자기 몸을 틀면서 운 좋게 총탄이 목을 관통한 것이다.

“커억-”

공작이 목에서 올라오는 핏물과 고통에 놀라 비틀거리면서도 지금의 현실을 믿을 수 없는지 필사적으로 목을 틀어막았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고해도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된 총탄을 막아낼 방법은 없었다.

철컥-

이엘이 탄환을 장전하며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당신이 그랬죠. 비겁해도, 결국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질 거라고. 맞아요. 당신은 힘없는 어린 여인의 손에 죽어간 비겁한 소드 마스터이자 반역자로 역사에 기록될 거예요.”

타앙-

퍼억-

라이플에서 발사된 또 다른 총탄이 공작의 가슴에 박혔다. 공작이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의 강인한 육체와 정신력은 아직 그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공작이 무서운 집념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노인이 공작의 팔을 잡았다.

“클클, 자네의 지금 모습, 너무 추하지 않나? 지난날 당당하던 웨일즈의 모습은 어디로 간 건가?”

노인의 말에 공작이 고개를 돌려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미 총탄이 관통되며 소리를 잃었지만 그의 눈엔 여전히 분노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내 체념한 듯, 공작이 고개를 떨궜다.

“그래, 이만하면 자네는 할 만큼 했으니 이젠 편안하게 나와 같이 가세나.”

노인이 고개를 들어 이엘을 돌아봤다.

“카일을 잘 돌봐주게.”

“…카일을 아시나요.”

“하하, 아주 어릴 적 멀리서 한 번 본 적이 있지.”

노인이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공작의 팔을 잡았다.

“잠깐!”

화르륵-

이엘이 급히 노인을 불렀지만, 노인의 몸에서 일어난 불길이 순식간에 노인과 공작을 뒤덮으며 뜨겁게 타올랐다.

쿠앙-

그때였다. 엄청난 폭발과 함께 분지 전체가 흔들렸다.

“이엘! 서둘러요.”

사하가 급히 이엘을 불렀다. 마왕과 드래곤의 전투가 격화되면서 분지 전체가 급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엘은 황급히 달려가 시카니스에 올랐다. 기절한 시안느와 카일은 이미 시카니스 위에 단단히 묶여있었다.

“마법 무구, 이건 언제 배운 거예요?”

사하가 이엘의 손에 들린 라이플을 보며 물었다.

“그냥, 카일이 사용하는 걸 몇 번 본 것 뿐이에요.”

이엘이 라이플을 매만지며 말했다. 처음 사용하는 마법 무구지만 탄환이 발사될 때의 반동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쿠웅-

거대란 충격음에 그녀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분지 아래로 향했다. 둘은 가만히 뿌연 먼지가 사라지길 기다렸다.

“이럴 수가…!”

사하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놀라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먼지가 가라앉으며 드러난 것은 충격적이게도 화이트 드래곤 아르미스의 발아래 마왕이 짓눌려있는 광경이었다.

“크아악!”

아르미스가 기쁨의 포효를 터트렸다. 드디어 천년의 복수를 하고 만 것이다. 비록 온전하지 못한 상태로 소환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럼 어떤가. 지금 그의 발아래 마왕이란 존재가 꿈틀거리고 있으니 그것으로 족했다.

“크르륵- 마왕, 이제 끝을 봐야겠구나!”

“이것이 끝이라 생각지 마라! 난 다시 찾아올 것이다.”

“얼마든지! 오는 족족 부숴주마!”

아르미스의 앞발 위로 금빛 기운이 어렸다. 카일의 오러와 다르면서도 비슷한 기운이었다. 마왕과의 전투에서 아르미스가 깨달은 것은 마법보다 순수한 마나의 결정체가 마왕에게 더 치명적이고 위력적이란 사실이었다.

퍼엉-

그때였다. 분지를 가로지르는 강 속에서 거대한 창이 튀어나와 하늘 높이 솟아오르더니 곧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화이트 드래곤 아르미스가 자리한 곳이었다.

“크하하, 역시 전투란 마지막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군!”

마왕이 아르미스의 품 안으로 파고들더니 그대로 떨어지는 창을 향해 날아올랐다

“이런… 미친!”

“저 창에 맞으면 네 녀석도 무사하진 못하겠지.”

마왕의 말에 아르미스가 황급히 마왕을 떼어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꽈드득

높이 솟았다 떨어진 창이 아르미스의 등을 관통해 마왕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두 거체가 곧장 바닥으로 추락했다.

쿠웅-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추락한 마왕과 드래곤. 곧 마왕의 신체에서 엄청난 암흑마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거대한 소용돌이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끝인가?”

시카니스가 아르미스의 주변을 맴돌다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섰다.

“죽은 것 같아요.”

사하가 천천히 드래곤에게로 다가갔다. 마법사에게 있어 최고의 마법 재료는 누가 뭐라고 해도 드래곤의 사체, 그중에서도 드래곤 하트였다. 더구나 드래곤 하트는 죽는 순간부터 대기 중으로 빠르게 흩어지기에 서둘러 채취해야만 했다. 하지만….

“크아악-”

사하가 아르미스에게 다가서자 죽은 듯 누워있던 아르미스가 벌떡 일어나 사정없이 앞발을 내리쳤다.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섬전같이 달려온 존재가 사하를 밀어냈다.

꽝-

바닥을 뒹굴며 아르미스의 공격에서 겨우 벗어난 사하가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이미 아르미스가 하늘 위로 날아오른 뒤였다. 워낙 심각한 중상을 입은 뒤라 서둘러 레어로 돌아가 치료를 해야만 했다.

“아아!”

사하가 자신을 밀어낸 존재, 흑기사에게 황급히 달려갔다. 아무리 흑기사의 갑주가 대단해도, 그가 아무리 강대한 암흑마기를 소유한 소드 마스터라고해도 드래곤의 앞발에 짓눌리고 살아남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입고 있던 갑주가 완전히 찌그러져 있었고 얼굴 전체를 가렸던 투구도 산산조각나 사라진 뒤였다.

“아… 아버지.”

사하가 흑기사 하린에게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조, 조금만, 조금만 참아요. 성녀라면, 그녀라면 아버질 살릴 수 있을 거예요.”

사하가 급히 에밀을 부르며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그런 사하를 하린이 붙잡았다.

“소용… 없다. 너도… 잘 알 거다. 불가능한 일임을.”

하린은 암흑기사, 몸 안 기운이 신성력과는 상극이었다.

“그럼… 시안느, 언니를 데려올게요. 항상… 언니를 그리워하셨잖아요.”

사하의 말에 하린이 고개를 저으며 사하의 팔을 잡았다.

“미안하다. 사하, 그동안 이 한마디만은 꼭… 하고 싶었다.”

“아버지….”

“이제… 가서 드래곤을 죽여라… 지금이 아니면… 녀석을… 죽… 일….”

“하, 하지만….”

“가… 라… 어서….”

하린이 사하의 팔을 놓아주었다.

“가라….”

하린이 마지막 말을 남기곤 입을 굳게 다물었다.

“흑….”

사하가 하린의 팔을 가지런히 모으고 천천히 뒤로 물러나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시카니스를 향해 달려갔다.

그사이 정신을 차린 카일과 시안느가 사하를 돌아보았다.

“서둘러 드래곤을 쫓아야 해요.”

“이엘에게서 상황은 들었습니다만…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어서… 가요. 지체했다간 드래곤을 놓칠 거예요.”

사하의 재촉에 카일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가겠습니다.”

카일의 명에 따라 시카니스가 다시 창공으로 날아올라 아르미스가 사라진 북쪽 하늘로 향했다.

“크르륵-”

아르미스가 고통을 참으며 연달아 마법을 시전해 급히 피를 막았지만, 상태는 최악이었다. 서둘러 안전한 레어로 돌아가 마나를 안정시키고 부상을 치료해야만 했다.

하지만….

위잉-

하늘 위 금빛으로 발광하는 스피어 한 자루가 아르미스를 향해 빛의 광선처럼 내려꽂혔다.

“젠장! 그레이트 실드!”

아르미스가 급히 마법을 시전해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의 스피어를 막았다.

꽈지직-

엄청난 속도로 내려꽂힌 스피어가 그레이트 실드를 파괴하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불안정한 마나로 인해 마법이 약해진 것도 있지만 빛의 스피어와 카일의 오러 블레이드가 그만큼 강력했단 뜻이었다.

“크악!”

아르미스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하늘 위를 선회하는 블랙 와이번을 노려보았다. 빠르게 날아들며 상승고도에서 뿌리는 스피어의 위력은 드래곤 비늘을 파괴할 정도로 강력하기에 서둘러 고도를 높여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육중한 체구에 마나까지 불안정한 아르미스로서는 쉽게 블랙 와이번의 공격 범위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위잉-

또다시 들려온 낮은 진동에 아르미스가 당황하지 않고 마법을 펼쳤다.

“파이어 볼”

아르미스가 펼친 마법은 3서클 하위 마법인 파이어 볼, 하지만 드래곤이 펼친 마법이 보통 마법일 리 없었다. 아르미스 주변으로 수십 개의 파이어 볼이 떠올라 일제히 스피어를 향해 날아들었다.

꽝-

꽈광-

꽝-

스피어에 관통당한 파이어 볼이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빠르게 내려꽂히던 스피어의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더니 이내 실드 밖으로 모조리 튕겨 나갔다. 상승고도에서 떨어지는 스피어의 운동 에너지를 파이어 볼의 연쇄 폭발로 상쇄시킨 것이다.

“반응 장갑인가?”

실드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스피어를 보며 카일이 중얼거렸다. 마치 반응 장갑을 폭파하여 대전차 미사일을 방어하는 모습과도 비슷해 보였다.

“어쩌죠? 저런 식으로 방어하면 스피어 공격은 더 이상 소용이 없어요.”

“방법이 없다면, 직접 만들어야겠죠.

스피어 공격은 상승고도에서 떨어지는 스피어의 운동 에너지와 마법이 결합된 원거리 공격이다. 마법 사정거리 밖에서 드래곤의 비늘을 뚫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지만, 이 방법이 막힌 이상 이제는 접근전만이 유일했다.

철컥-

카일이 안장에 달린 사슬을 허리에 걸었다.

“라이플,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에요.”

이엘이 카일이 내민 라이플을 받아들어 능숙하게 탄환을 장전했다. 그가 기절해 있는 동안 이엘이 라이플로 트라발트 공작을 죽였단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카일이 허리에서 검을 뽑아 들며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네 여인을 돌아보았다. 어쩌면 이번 전투가 이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전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착찹한 기분이 들었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럼 시작… 하겠습니다.”

카일이 시카니스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부탁한다.”

-최선을 다하마, 꽉 잡아라-

시카니스가 곧장 날개를 접으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이놈들 드디어 오는구나!”

아르미스가 자신을 향해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리는 블랙 와이번을 노려보았다. 곧 아르미스의 주변으로 수십 개의 붉은 구체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일제히 떨어져 내리는 블랙 와이번을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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