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 마왕(3)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요?”
에밀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반드시 성공할 거예요.”
사하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마왕의 소환만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사하는 그동안 소망했던 저주 같은 맹약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마왕을 소환하려면 언니의 피도 필요해요.”
사하의 말에 시안느가 앞으로 걸어 나와 그녀의 옆에 섰다.
“얼마든지.”
“고마워요.”
사하가 붉은 수정이 박힌 지팡이로 바닥을 살며시 두들겼다. 순간 지팡이를 중심으로 시작된 검은 기운이 넓게 퍼져나가며 육망성을 이루는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그럼 시작할게요.”
사하와 시안느가 단검을 뽑아 팔을 그었다. 새빨간 피가 하얀 팔목을 따라 마법진 위로 점점이 떨어져 내렸다.
웅웅-
낮은 진동과 함께 마법진 위로 떨어진 피가 마치 생명을 가진 듯 진을 따라 흐르며 구름 같은 암흑마기를 토해냈다.
“지금… 이에요.”
사하가 힘겹게 외쳤다. 끊임없이 피를 요구하는 마법진으로 인해 사하는 물론 시안느의 얼굴까지 창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카일이 황급히 마법진 안으로 금빛 오러를 밀어 넣었다.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암흑마기 사이로 옅은 금빛 기운이 어렸다. 암흑마기의 자리를 금빛 오러가 서서히 잠식하기 시작했다.
“에밀!”
카일이 에밀을 불렀다. 에밀은 눈앞에서 소용돌이치는 암흑마기를 보며 망설이고 있었다. 성녀로서 마왕소환에 참여한다는 사실에 그녀는 정신적으로 크나큰 괴리감을 겪고 있었다.
“성녀인 제가… 마왕소환에 참여하다니… 전, 전 할 수 없어요.”
에밀이 뒤로 주춤 물러나려 하자 이엘이 그녀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당신이 소환에 참여하지 않아도 마왕을 소환될 거예요.”
이엘의 말에 에밀이 당황스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신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저들은 모두 여기서 죽을 거예요.”
에밀이 고개를 들어 마법진을 사이에 두고 사투를 벌이는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하와 시안느는 이미 상당량의 피를 흘려 얼굴 위로 창백하다 못해 푸른 빛이 흘렀고 카일 역시 암흑마기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카일의 금빛 오러는 혼돈의 오러, 상충하는 두 기운의 반발을 줄여줄 뿐 억제하지 않았다. 더불어 터널 생성에 부족한 에너지를 보충해 사하와 시안느의 생명력 고갈을 막아주는 역할이었다. 정작 마기를 억제하고 소환되는 마왕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은 바로 신성력이었다.
“만약 이대로 에밀이 떠난다면 사하와 시안느 뿐 아니라 카일까지 모두 희생될 거예요. 그리고 우린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강력한 마왕을 눈앞에 마주하게 될 테지요. 에밀, 당신은 그런 마왕을 막을 자신이 있나요?”
“그건….”
“마왕의 소환을 막는 것이 성녀의 사명이란 건 알아요. 하지만 만약 소환을 막을 수 없다면, 마왕의 힘을 억제시키는 것 역시 성녀의 사명이라 생각해요. 에밀, 사하가 당신을 몇 번이나 구했단 사실을 알 거예요. 단순히 선과 악, 여신과 마왕을 섬기는 사제로 서로를 바라보았다면 사하는 당신을 구하지 못했을 거예요.”
“이엘의 말이 맞아요. 사하가 절 그저 여신을 섬기는 성녀로만 보았다면… 그녀가 절 구해주진 않았겠죠.”
에밀이 마기에 휩싸인 마법진을 향해 들고 있던 지팡이를 내밀었다.
“여신이여….”
에밀의 낮은 기도에 화답하듯 새하얀 지팡이 주변으로 순백의 기운이 일렁이며 마법진 안으로 흘러들었다.
“으윽-”
에밀이 낮은 신음을 토했다. 마기와 신성력이 서로 충돌하며 일어난 반발력이 고스란히 에밀에게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곧 금빛 기운이 일어나 부드럽게 신성력을 감싸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마법진 위로 회색빛 거대한 터널이 만들어졌다. 일전에 스치듯 보았던 터널보다 몇 배는 더 크고 넓었다.
저벅저벅
터널 안에서 들려온 낮은 발자국 소리. 곧 사악하고 광폭한 기운의 존재가 천천히 터널 안을 빠져나왔다.
카일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검청색 비늘이 빼곡하게 뒤덮은 거대한 동채, 푸른 입술 사이로 드러난 날카롭고 섬뜩한 이빨과 날렵하고 뾰족한 귀, 머리 위로 솟아난 거대한 두 개의 뿔, 그리고 언젠가 보았던 붉은 광망이 줄기차게 뿜어져 나오는 눈동자까지. 터널 안에서 나타난 존재는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크르르-”
입술 사이로 나직하게 울리는 음울한 으르렁거림에 소드 마스터인 카일도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만큼 마왕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소름끼치도록 강렬했다.
“큭큭, 재밌군. 이렇게 중간계로 강제 소환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야.”
마왕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펴며 말했다. 느껴지는 힘의 총량이 본체에서보다 현저하게 떨어져 있었다. 터널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저항이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는 뜻이었다.
“녀석, 제법 머리를 썼군.”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진 사하를 내려다본 마왕이 고개를 돌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자신을 경계하는 에밀을 응시했다.
“레아의 딸이여, 겁먹을 필요 없다. 너 따윌 해칠 생각은 없으니.”
마왕이 에밀을 무시하듯 고개를 돌려 이번엔 카일을 바라보았다.
“큭큭, 카일. 이런 식으로 만나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직접 볼 수 있어 나쁘진 않구나.”
마왕의 붉은 눈에서 일어난 강렬한 빛이 마치 뇌를 잠식하듯 파고들자 그 기운에 대항해 일어난 금빛 오러가 부드럽게 뇌를 감싸며 붉은 기운의 침입을 차단했다. 드래곤 하트로 인해 민감해진 오러가 스스로 뇌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머릿속에서 일어나다 보니 카일은 중심을 잡기 어려울 정도의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을 느꼈다.
스르릉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던 카일이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빈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스각-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금빛 오러 블레이드에 잘려 나가며 머릿속을 파고들던 기운이 자연스럽게 사라져버렸다.
“매혹을 검으로 잘라내다니, 역시 아깝군.”
마왕의 붉은 눈동자가 아쉬운 듯 카일을 내려다보았다. 만약 힘을 잃지 않았다면, 어쩌면 카일을 구속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왕은 미련을 떨쳐버리려는 듯 고개를 털며 몸을 돌렸다.
“내 상대가 오고 있으니 이만 가봐야겠군.”
하늘 위를 선회하던 화이트 드래곤 아르미스가 강렬한 암흑마기에 반응하며 마왕을 노려보았다.
“마왕! 우리가 당신을 부른 이유를 알고 있나?”
카일의 물음에 마왕의 입술이 비틀어지며 묘한 웃음을 흘렸다.
“신성력이 있는 곳에 여신이 있듯 암흑마기가 있는 곳에 나 마왕이 있다. 너희들의 목적은 이미 알고 있다.”
“헌데… 왜 우릴 죽이지 않는 거지?”
“왜…!”
마왕이 카일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죽일 거라 생각하지? 왜… 마왕이라면 반드시 대륙을 피로 물들이고 세상을 파괴할 거라 생각하는 것인가?”
“그건… 당신이 마왕이기 때문이다.”
카일의 말에 마왕이 고개를 저었다.
“마왕은 마계의 왕을 뜻할 뿐 파멸자는 아니다. 마왕이란 그저 여신과 다른 길을 걷는 또 다른 신, 여신이 인간의 믿음에서 비롯되었다면 마왕은 끝없는 투쟁으로서 존재한다. 내가 너희의 소환에 응한 것 역시 드래곤이란 강대한 존재와의 전투를 원했기 때문이지.”
마왕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아르미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강자와의 전투는 언제나 즐거운 법이거든.”
“헌데… 왜 인간들은 마왕 당신을 파멸자로 보는 건가?”
“큭큭, 그 이유는… 곧 알려주마!”
마왕의 웃음소리와 함께 화이트 드래곤 아르미스가 바닥으로 내려섰다.
쿠웅-
“오랜만이군, 아르미스. 천년만이군.”
“빌어먹을 인간 녀석들, 또다시 마왕을 소환하다니…!”
아르미스가 광망이 흐르는 붉은 눈으로 카일을 노려보았다. 이제야말로 대륙, 중간계의 암적인 존재, 인간을 박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왕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 상황에 처한 것이다. 분노한 표정로 마왕을 유심히 살피던 아르미스의 얼굴에 의혹이 어렸다. 눈앞 마왕의 모습이 오래전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땐 더 광폭했고, 더 사악한 기운을 뿜었다.
“쿡, 이제 보니 인간들이 수작을 부렸나 보군.”
아르미스의 시선이 바닥에 주저앉아 오돌오돌 떨고 있는 에밀에게로 향했다. 마왕을 소환하는 자리에 신성력을 품은 성녀가 함께하고 있었다. 마왕이 온전하게 소환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었다.
“마왕이 인간들의 수작에 놀아나다니… 덕분에 천년의 복수를 할 수 있겠군.”
아르미스의 앞발 사이로 푸른 기운이 어렸다.
“힘이 약해졌다고 해도, 드래곤 한 마리 정도 사냥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
갑자기 온몸을 뒤덮은 비늘이 움직이더니, 마왕의 등 뒤로 거대한 한 쌍의 날개가 만들어졌다. 마왕이 빠르게 하늘 위로 솟구쳤다.
“놓칠 것 같으냐!”
아르미스가 마왕을 따라 곧장 날아오르며 마법을 난사했다.
마왕을 따라 하늘 위로 날아오르던 아르미스의 동체가 금빛으로 물들더니 수십 개의 차가운 얼음 창이 떠올랐다.
“죽어라!”
팔짱을 낀 채 공중에 떠 있는 마왕을 향해, 한기를 내뿜는 수십 개의 얼음 창이 날아들었다. 하나하나가 4서클 마법인 아이스 스피어였지만 드래곤의 강대한 마력과 용언 마법 덕분에 그 힘만은 5서클에 육박했다. 빠르게 치솟는 얼음 창을 가만히 내려보던 마왕의 동체에서 검은 기류가 뭉클 피어오르더니 머리통만 한 검은 구체가 마왕의 손바닥 위로 모여들었다.
“그럼 얼마나 강해졌는지… 볼까?”
마침내, 마왕이 손을 털어내듯 검은 구체를 아르미스에게 날렸다.
꽈앙-
강한 충격음과 함께 수십 개의 얼음 창이 검은 구체와 부딪혔다. 산산이 부서진 얼음 파편이 아르미스를 향해 곧장 떨어져 내렸다.
“이런…!”
갑자기 자신의 눈앞으로 빠르게 날아드는 검은 구체에 놀란 아르미스가 급히 거대한 몸을 비틀었다. 아슬하게 아르미스를 스치듯 지나쳐간 검은 구체가 크레센트 숲 외곽 분지 아래 대기 중이던 트라발트 공작군의 머리로 떨어져 내렸다.
꽈아앙-
엄청난 폭발과 이어진 충격파에 분지 전체가 무너질 듯 흔들리며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이럴 수가…!”
숨막힐 듯 뿌연 먼지가 옅어지며 드러난 광경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만의 공작군이 진을 치고있던 크레센트 숲 중앙엔 마치 커다란 운석에 직격당한 듯 거대한 크레이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게… 마왕의 힘이란… 말인가?”
에밀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볍게 날린 일격에 숲 절반과 수만의 생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만약 마왕이 온전한 힘을 가지고 터널을 통과했다면…!
에밀이 생각만 해도 끔찍한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길… 서둘러… 벗어나야 해요.”
겨우 정신을 차린 사하가 카일을 돌아보며 말했다. 에밀이 서둘러 사하와 시안느를 치료한 덕분에 두 사람 모두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마왕과 드래곤의 전투는 모든 것을 파멸시킬 정도로 엄청나다고 했어요. 이곳에 있다간 우리도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꽈앙-
거대한 폭발과 함께 분지를 둘러싼 산봉우리 하나가 아르미스의 마법에 무너져 내렸다.
“이런!”
카일이 다급히 시카니스를 불렀다.
끼아악-
허공을 선회하던 블랙 와이번이 분지 위로 내려앉았다.
쉬익-
강맹하고 날카로운 기운이 날아들었다. 카일이 황급히 돌아서며 갑작스럽게 날아든 기운을 검으로 쳐냈다.
꽈아앙-
검을 타고 밀려오는 강맹한 오러에 카일의 몸이 주르륵 밀려나 바닥에 처박혔다.
“블랙 와이번, 제국에서 사라졌던 녀석이 이곳에 있었군.”
끼아악-
블랙 와이번 시카니스가 카일의 앞을 막아서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트라발트… 공작!”
이엘의 얼굴이 굳어졌다. 공작의 모습은 언젠가 그린넨 백작을 따라 공작령을 방문했을 당시 모습 그대로였다.
“누군가 했더니 이니엘 영애였군.”
트라발트 공작이 블랙 와이번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이게 무슨 짓이죠? 공작이란 자가 비겁하게 등을 노리다니! 그러고도 일국의 공작이라 할수 있나요?”
“크하하,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모든 것은 승자의 기록이다. 설령 비겁한들 이기면 그뿐 아닌가? 덤으로 블랙 와이번까지 얻을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공작의 말에 이엘의 얼굴이 굳어졌다. 설마 트라발트 공작의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올 줄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제… 전리품을 수거해볼까?”
트라발트 공작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드래곤으로 인해 대부분의 병력을 잃었지만 블랙 와이번만 얻을 수 있다면 그다지 손해라 생각하지 않았다. 공작가의 역량이라면 얼마든지 잃었던 병력을 만회하고 왕국을 점령할 수 있었다.
크앙-
그때 붉은 기운에 휩싸인 거대한 괴수가 공작을 공격했다. 트라발트 공작이 깜짝 놀라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가 서 있던 자리 위로 거대한 발톱이 휩쓸고 지나며 뜨거운 불길이 길게 이어졌다.
“영감! 이게 무슨 짓이지!”
공작이 옷에 달라붙은 불꽃을 털어내며 천천히 다가오는 장대한 체구의 노인을 노려보았다. 그는 이사벨라 왕녀의 영지, 스파더 남작령의 집사였다.
“클클, 조금 전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비겁한들 이기면 그뿐이라고 말이야!”
쿨럭쿨럭-
노인이 거칠게 기침을 내뱉으며 다가왔다. 그의 몸 여기저기엔 격한 전투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지독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그 몸으로 아직 죽지 않고 쫓아오다니….”
“큭큭, 내 자네를 놓아두고 쉽게 죽을 수는 없지 않나!”
노인이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붉은 괴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 그럼 아이들은 놓아두고 우리끼리 다시 시작해 볼까?”
노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붉은 괴물의 몸에서 엄청난 불길이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