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 마왕(1)
“이럴 수가!”
맹추위를 견디며 묵묵히 블랙 와이번의 뒤를 쫓아 거대한 협곡 아래로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협곡 전체를 가득 메운 거대한 나무들과 그 사이를 굽이치며 흐르는 뜨거운 수증기까지, 아이스 랜드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끼아악-
블랙 와이번이 넓은 공터 위로 사뿐히 내려서더니 곧 아공간 속으로 사라졌다.
“도대체 이곳은 어딘가?”
펠론 자작이 카일에게 달려와 물었다.
“여긴 아이언 용병대의 부단장인 마라스 대장이 발견한 열곡입니다.”
“…열곡?”
“여기 땅속 깊은 곳엔 뜨거운 용암이 흐르고 있죠. 덕분에 아이스 랜드의 맹추위에서도 식물이 자라고 지열에 데워진 뜨거운 물이 강을 이루며 흐르고 있어 열곡이라 부른다고 하더군요.”
카일의 말에 펠론 자작이 주변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겨울 정도의 제법 쌀쌀한 기온이긴 하지만 이곳이 아이스 랜드란 것을 감안한다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따스한 셈이었다.
“헌데 이곳엔 왜 온 것인가?”
처음엔 백작가를 피해 한동안 숨어지낼 곳을 찾은 게 아닐까 했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카일은 소드 마스터다. 백작가를 겁낼 이유가 없었다.
“지금 서 있는 곳,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상하다니?”
“이 넓은 침엽수림 속에 유독 이곳에만 넓은 공터가 만들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건…!”
카일의 말에 펠론 자작이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곳곳에 잘려나간 나무 밑동과 화덕을 만들었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하늘 위에서 바라본 공터의 넓이와 대략적인 화덕의 숫자만 계산해 본다면 최소 수천에서 최대 수만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단 뜻이었다.
자작이 황급히 화덕자리에서 타다 만 숯을 꺼내 살피더니 잔뜩 굳어진 얼굴로 카일을 돌아봤다.
“최소 삼 일 전 이곳에 수천에서 수만의 사람… 아니 병력이 지나갔다. 도대체 무슨 일을 계획한 것이냐!”
“열곡을 통하면 안전하게 우크하란바 산맥을 지나 제국 북부로 향하게 됩니다.”
“서, 설마… 원정대가 이곳을 지났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우린 3왕자의 원정대와 합류, 제국 북부를 직접 공격할 겁니다.”
“그게… 가능하단 말이냐?”
펠론 자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이번 계획이 성공한다면 3왕자가 왕자들 중 가장 큰 전공을 세우게 될 것이다. 어쩌면 다른 왕자들을 모두 제치고 가장 먼저 황도를 직접 공격할 수도 있을 터였다.
“지금 서 있는 이곳이면 대답은 이미 충분히 된 것 같군요.”
펠론 자작은 멀어져 가는 카일의 등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펠론 자작이 서 있는 이곳이야말로 제국 북부를 공격할 수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형님, 아무래도 우리의 생각이 틀렸나 봅니다.”
쓸쓸하게 남쪽 하늘을 바라보던 자작이 어설프게나마 수경지를 만들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와이번 나이트라면 기사들 중에서도 가장 고급인력이다. 따르는 종자와 시종들도 일반 기사들에 비해 많았기에 수경지를 건설하고 음식을 만드는 일까지 직접 하기에는 모든 것이 어설플 수밖에는 없었다.
* * *
무혈입성, 트라발트 공작이 왕성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대부분의 병력들이 사라진 뒤였다. 북적이던 도로에는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없었고, 상점들은 문까지 꼭 닫고는 점령군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국왕의 병세는 어떤가?”
“왕궁이 점령당했단 충격 때문인지 병세가 점점 악화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며칠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럼… 결국 공주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말이군. 하벨론에게선 연락이 없나?”
“없습니다. 아무래도….”
“흠… 아무리 래쇼티 백작이라도 셋을 상대하긴 어려울 텐데… 이상하군.”
공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하벨론을 비롯해 켈리와 라탄까지 함께 딸려 보낸 건 지난번 왕성에서 만난 래쇼티 백작과 기사단의 실력을 감안해서였다. 그런데도 세 사람이 역으로 당했다는 것은 백작에 버금가는 또 다른 실력자가 함께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전하!”
공작이 왕궁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다급한 목소리가 그의 발을 붙잡았다.
“무슨 일인가?”
“중부… 야토르 백작이 움직였습니다.”
넓은 포도밭에서 생산된 포도로 중저가 와인을 숙성시키는 야토르 백작가는 왕국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부유한 영지중 하나였다. 그 만큼 많은 병력과 강력한 기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드디어 공주가 마지막 패를 꺼내 들었군.”
“야토르 백작이 움직였다면 다른 영지들까지 움직일 겁니다. 서둘러 백작을 막아야 합니다.”
“오히려 잘됐다. 어차피 백작이 멈추는 곳에 공주가 있을 테니 이번 기회에 공주까지 함께 정리할 수 있겠군.”
트라발트 공작이 아쉬운 듯 왕궁을 잠시 바라보더니 몸을 돌렸다. 지금 중요한 건 껍데기만 남은 왕궁이 아니라 백작과 공주를 먼저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 * *
“이제 당신만 남았군.”
“네… 놈이! 감히!”
붉은 피로 물든 대전,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앞을 막아섰던 힘없는 늙은 시녀의 목을 날려버리고, 아이젠 공작이 황제의 목을 향해 검을 들이밀었다.
“참 오랫동안 기다렸소.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말이오.”
“이런다고 황제의 자리에 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어림도 없는 소리!”
황제가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지만, 아이젠 공작의 얼굴엔 오히려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황제의 모습이 그저 멸문 앞에 놓인 카데인 황가의 마지막 발악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미 황실에 존재하는 모든 황족들은 죽였고 남은 사람은 이제 황제 당신뿐이오. 사실상 카데인 황실은 이제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란 소리지.”
“어림없는 소리! 황실에 남은 황족만이 황실의 전부라 생각하는 것이냐?”
“숨겨둔… 황족이 남아있단 뜻이냐!”
황제의 말에 아이젠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카데인 황실의 황족이 남아있다면 아이젠 공작이 황제에 오르는 데 두고두고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미 황궁을 점령하고 황족들을 몰살시킨 아이젠 공작에게 물러날 길은 없었다.
“흥, 상관없다. 나타나는 족족 죽여줄 테니 말이야.”
아이젠 공작이 살기 어린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꽝-
그때 굳게 닫혔던 문이 거칠게 열리며 검은 복면을 쓴 사내가 황급히 달려와 부복했다.
“대전 안으로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했다.”
공작이 부복한 사내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시급을 다투는 긴급한 일이라… 용서하십시오.”
사내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냐!”
공작이 분노를 가라앉히고 사내를 보며 물었다.
“지금… 북부가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북부가 공격을 받다니! 누구에게 공격을 받고 있단 말이냐!”
“크로노스 왕국 3왕자가 이끄는 원정군입니다. 대략 이만을 상회하는 병력이라고 합니다.”
복면 사내의 말에 아이젠 공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트라발트 공작과 아이젠 공작은 서로의 반란을 성공시키기 위해 비밀리에 협정을 맺었다. 트라발트 공작이 일왕자, 이왕자의 진군 방향과 계획을 아이젠 공작에게 넘겨 그들의 원정군들을 전멸시키려 했다면, 아이젠 공작은 원정군을 함정으로 몰아 몰살시킨다는 명목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북부의 병력까지 모두 빼내 원정군을 상대하게 했다. 물론 이들이 살아서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희박했다. 두 공작의 목적은 이곳에서 정적이 될 모두를 한꺼번에 말살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계획에도 없던 3왕자의 군대가 북부에 나타났다. 고작 이만에 불과한 병력이지만, 문제는 북부에 남은 병력이라고는 고작 영지를 지키는 늙은 영지병들이 전부라는 것이었다. 이들로는 남하하는 원정군을 잡아둘 방법이 없었다.
“빌어먹을… 배신이다.”
아이젠 공작이 분노한 듯 소리쳤다. 트라발트 공작에게 전달받은 어떤 정보에도 북부에 대한 공격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공작이 과감하게 북부는 물론 황실 인근 병력을 모두 빼낼 수 있었던 것이다.
“형님,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베인 자작이 황급히 공작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이젠 공작이 황궁을 점령하기 위해 동원한 병력은 일만. 이 병력으로 황성 외곽수비군을 기습해 각계격파한 뒤 황궁을 점령한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황궁 근위대의 격렬한 저항에 공작군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피해를 입으면서 남은 병력이라고는 이제 이천도 되지 않았다. 그들도 대부분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부상자였기에 북쪽에서 밀려오는 원정군을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어떻게 점령한 황궁인데….”
공작이 비통한 얼굴로 피로 물든 대전을 바라보았다.
“큭큭, 네놈도 별수 없구나!”
“뭐…!”
“힘 앞에 도망치는 겁쟁이! 네놈은 절대 황제가 될 수 없다. 적어도 황제라면! 어떠한 위협이 닥쳐도 황제로서 당당하게 맞서야 한다. 네놈처럼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진 않는단 말이다.”
황제의 외침에 아이젠 공작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황제에게서 쏟아지는 고결한 위압감에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황제의 옆구리로 날카로운 칼날이 파고들었다.
푸욱-
“…베인 자작”
“송구합니다, 폐하! 더 이상 형님이 흔들리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큭큭, 멍청한 형보단… 그래도 아우가 낫군. 하지만 자네도 명심하게, 사냥개는… 언제나 주인의 손에… 죽는다는 걸….”
털썩-
황제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제국 황제의 죽음으로선 비참한 모습이었다.
“가셔야 합니다.”
베인 자작이 쓰러진 황제를 멍하니 바라보는 아이젠 공작의 팔을 잡았다.
“베인… 해줘야 할 일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배신자를… 처단해다오.”
공작의 말에 베인 자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소드 마스터 입니다.”
“너라면… 가능할 거라 믿는다.”
공작의 말에 베인 자작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떠나겠습니다.”
“부탁… 하마.”
아이젠 공작이 베인 자작의 팔을 밀어내며 천천히 몸을 돌려 대전을 빠져나갔다.
* * *
카일과 펠론 자작의 와이번 나이트들이 원정군과 합류한 후 본격적으로 북부 영지를 공격할 무렵이었다. 적게는 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으로 나누어진 원정군이 거침없이 북부 영지를 공략하며 파죽지세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낙후된 북부 영지의 특성 때문인지 병력의 숫자도 적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정예병력도 대부분 빠져나간 뒤라 원정군을 막을 병력은 전무했다. 그나마 원정군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건 사람에서부터 가축, 작은 쇠붙이까지 남김없이 휩쓸고 있는 귀족들과 용병들의 행태였다.
“말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은 약탈보단 황궁을 공격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펠론 자작이 불길에 휩싸인 마을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귀족들은 마을을 점령하는 족족 사람들을 끌어내고 필요한 귀중품을 찾아낸 뒤 마을을 불태웠다. 사람들에게 돌아갈 곳이 없음을 명확히 인식시켜 반발을 줄이려는 것이다.
“아니, 지금은 이대로 놓아두는 것이 좋습니다.”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카일이 고개를 돌렸다.
“케시언 백작님.”
“자네가 도착했단 말을 듣고는 급히 달려왔다네. 블랙 와이번이라니… 아주 화려한 등장이었다네. 그리고… 펠론 자작도 함께 왔군요.”
“3년이 훌쩍 지난 것 같습니다. 백작님.”
“…그런 것 같군, 헌데 동부에 있어야 할 자네가 이곳엔 어쩐 일인가?”
“사정이 있어 마일론 남작과 동행을 했습니다.”
“사정이 있다니 깊이 묻지는 않겠지만 자넬 원정대에 받아들이려면 왕자 전하와 마파린 후작의 동의가 필요하다네.”
“걱정 마십시오. 전 전공을 탐하려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냥, 마일론 남작과 동행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동행이라면… 알겠네, 전하와 후작께 말씀드리겠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황궁으로 진군하지 않는 이유가 있는 겁니까? 단순히 약탈이 목적이라고 보기엔 지금 귀족들의 행태는 너무 과합니다. 이건 마치 북부 영지를 초토화시켜 모든 것을 없애려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히 보았네. 우린 이곳 북부 영지를 초토화시켜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만들 생각이라네.”
“그런….”
“북부 영지를 그대로 남겨 놓았다간 제국이 우리가 했던 것처럼 열곡을 통해 왕국을 공격할 수 있으니 완충지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네. 사람이 없다면 영지도 존재할 수 없으니 말이야.”
“덤으로 전리품을 옮길 인력도 확보할 수 있겠죠.”
“정확하네, 게다가 진군속도가 너무 빠른 것 역시 이러는 이유 중 하나라네,”
“진군이 빠른 것도 문제가 되는 겁니까?”
“우리에겐 후속지원군이 없고 부대가 잘게 나뉘어 있어 진군속도가 각기 다르다네, 이런 때에 기습이라도 당하면 각개격파를 당할 수 있으니 후방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초토화시키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지.”
“그러다가 영주들이 결사 항전을 벌이면 문제가 심각해지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소문이 났을 때의 이야기지. 영주들이 이 사실을 알고 났을 땐 이미 영지가 기습당한 뒤라 가만히 당할 수밖에 없을 거야.”
케시언 백작의 말을 들으며 향한 곳은 커다란 통나무를 쌓아 튼튼하게 만든 커다란 저택이었다.
“무슨 남작이 살던 저택이라고 하던데, 제법 잘 만든 곳이라 지금은 왕자께서 거처로 쓰고 계시다네.”
케시언 백작의 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선 순간 수많은 시선이 카일에게로 향했다.
“분위기가 고작 용병대 대장을 만나기 위한 곳은 아닌 것 같군요.”
“미안하네, 어쩔 수 없이 자네에 대해 밝힐 수밖에는 없었네.”
케시언 백작이 귀족들을 돌아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