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 회군(3)
깡-
“크아악-”
“죽어라!”
“밀어내란 말이다.”
“반드시 이곳만은 사수해야 한다.”
일왕자의 거처인 사자궁 앞.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백여 명의 살수들이 이왕자의 거처인 백합궁으로 쳐들어온 건 오늘 새벽, 나이 어린 윈저 왕자를 품에 안은 호위 기사가 다급히 일왕자의 거처인 사자궁으로 피신한 시각이었다. 비록 일왕자와 이왕자가 왕위를 두고 다투곤 있지만, 아치 왕자와 나이 어린 윈저 왕자의 사이는 제법 친했기에 호위기사가 망설이지 않고 그를 찾아간 것이다. 하지만 살수들이 노리는 건 단지 윈저 왕자만이 아니었다. 윈저 왕자뿐 아니라 왕성에 머물고 있는 국왕을 제외한 모든 왕족을 죽이는 것이 이번 침입의 목적이었다. 그들은 앞을 막아선 모두를 거침없이 죽이며 사자궁으로 몰려들었다.
창-
“왕자님! 안 됩니다.”
붉은 레더아머에 어깨와 가슴을 방어하는 화려한 금속제 보호갑을 입은 아치 왕자의 앞을, 호위 기사들이 막았다.
“이대로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
“저희들이 목숨을 다해 막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치 왕자가 손을 들었다.
“이미 내궁까지 적들이 밀려왔다. 이대로 너희들의 희생은 지켜보며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다.”
“하지만….”
“큭큭, 용기가 대단하군.”
그때였다. 내궁 안쪽에서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거구의 사내 둘이 붉은 피가 흐르는 검을 들고선 천천히 걸어 나왔다.
“네놈들이 어떻게….”
“아! 비밀통로에서 기다리기 지루해서 한번 나와 봤다네!”
“설마… 윈저와 두 공주를…!”
“큭큭, 걱정 말라고. 곧 같은 곳으로 보내줄테니 말이야!”
사내가 검을 들어 아치 왕자를 가리키자 소름끼치는 살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왕자를 옥죄어 왔다.
* * *
“큰일 났어요.”
마차밖에서 들려온 다급한 음성에 이사벨라가 의아한 얼굴로 작은 창을 열었다.
“무슨 일이죠?”
“왕실이… 습격당했다고 합니다.”
“그게… 지금 무슨 말이죠? 왕실이 습격당하다니…!”
“일단의 살수들이 왕실을 습격, 왕자는 물론 어린 공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죽였다고 해요. 아무래도 웨일스, 그 개자식이 반란을 일으킨 것 같아요.”
“말도 안 돼! 공작은 분명 제국원정에 나섰다고…!”
“왕자들이 제국원정을 떠난 사이 중간에 회군했다고 해요. 지금 동부를 지나 왕성을 향해 곧장 달려가고 있지만… 이미 원정을 떠나며 병력들이 빠져나간 상황이라 당장 놈을 막을 만한 병력이 없어요.”
“…이, 이럴 수가!”
“그리고… 아무래도 빌리어스 공작께서… 돌아가신 것 같아요.”
“공작께서… 아…!”
“괜찮습니까?”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이사벨라를 보일이 황급히 붙잡았다. 지난 한 달간 모든 일을 잊고 샤론 마을에서 보일과의 추억을 되새기던 동안 세상은 급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모르… 겠어요. 이제 정말 어디로 가야 할지….”
“공주님, 앞쪽에 일단의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헌데 규모가… 상당합니다!”
래쇼티 백작의 말에 이사벨라가 마차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수십 대의 마차가 긴 행렬을 이루어 빠르게 남하하고 있었다.
“저건?”
“아는 사람들입니까?”
백작의 물음에 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일론 상단입니다. 제법 오래 거래한 곳입니다. 하지만 저 정도로 큰 규모로는 움직이지는 않는데… 이상하군요.”
보일이 선두에서 다가오는 토일 지부장을 보며 말했다. 토일 역시 일단의 기사단이 앞을 막아서자 잔뜩 긴장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전 아일론 상단의 토일이라 합니다.”
“토일 지부장!”
보일의 외침에 토일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보일 님!”
“오랜만이군, 마티슨 님은 잘 계시나?”
“마티슨 님과 단주님은 2왕자를 따라 전쟁 상인으로 동행하셨습니다.”
토일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큰돈을 만질 수 있어, 많은 상인들이 이번 원정에 전쟁 상인으로 참여했다.
“상단을 당분간 제게 맡기셨습니다만 갑자기 왕실이 습격당하고 트라발트 공작이 동부 그린넨 백작가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키면서 왕실을 떠나 피난을 가는 중입니다.”
“피난? 이 행렬 전부가 피난을 가는 거란 말인가?”
“일부는 그렇고 일부는 아닙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여기 일부는 마일론가의 장원 사람입니다. 우린 그들을 따라 마일론가로 향하는 중입니다.”
토일의 말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힐튼 남작이 급히 달려 나왔다.
“지금 뭐라고 했나? 마일론가라고 했나?”
“네, 그러고 보니 남작님께서 마일론이란 성을 쓰셨군요.”
“설마… 장원이란 곳이 그럼….”
“네, 카일 님께서 만드신 장원입니다. 3왕자의 제안을 받아들여 원정에 참전하는 대신 받은 곳입니다.”
“카… 카일이 원정에 참전했단 말인가요”
이사벨라가 깜짝 놀라 묻자 토일이 당황한 얼굴로 보일의 옆에 선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 그건 저보단 여기 코퍼 용병대장에게 물어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토일이 옆에선 코퍼를 가리켰다. 코퍼는 대장장이 가족들과 왕성에 마련된 아이언 용병대의 저택에서 휴식을 취하다 갑작스런 토일 지부장의 말을 듣고 급히 크래센트로 향하던 중이었다.
“3왕자의 원정군은 마파린 후작령에서 집결한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마파린 후작령? 3왕자가 왜 갑자기 그것에…?”
“자세한 계획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제국에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작전이라 들었습니다. 성공만 한다면 3왕자가 차기 국왕으로 확정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위험한 계획이란 말이군.”
보일이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걱정할 것 없습니다.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라도 녀석에겐 위기를 벗어날 든든한 조력자가 있으니 말입니다.”
“조력자? 아! 그렇구만. 카일에겐 그 녀석이 있었어!”
“그 녀석이라니요?”
“아! 그 녀석은 다름이 아니라….”
깡-
힐튼 남작이 급히 검을 뽑아 이사벨라에게 날아든 단검을 쳐냈다.
“공주님을 보호해라!”
래쇼티 백작이 깜짝 놀라 황급히 기사들에게 명을 내린 뒤 단검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거구 사내 하벨론을 선두로 켈린과 라탄이 서 있었다.
“이놈! 감히 공주님을 시해하려 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스르릉-
래쇼티 백작이 검을 뽑아 들곤 곧장 하벨론에게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꽈앙-
엄청난 폭음와 함께 두 사람이 각각 두 걸음씩 물러났다.
“역시 래쇼티 백작이군.”
“쓸데없는 말이 많군.”
백작이 다시 달려들며 맹렬하게 검을 휘둘렀다
창-
깡깡-
그 사이 켈린과 라탄이 두 사람을 지나쳐 이사벨라에게 천천히 다가서자 보일이 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나섰다.
“보일….”
“걱정할 것 없습니다. 녀석의 실력은 제가 보장하지요.”
힐튼 남작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일을 바라보는 이사벨라를 위로했다.
“녀석은 내가 맞겠다.”
“큭큭, 그럼 영감은 내 차지군. 할 수 없지. 덤으로 공주까지 내가 처리하면 되겠어.”
라탄이 보일과 격렬하게 검을 부딪치는 켈린을 뒤로하고 힐튼 남작에게 다가갔다.
“단검을 막아낸 솜씨가 보통이 아니던데… 어때, 영감 나와 어울려보겠소?”
“허허, 내가 그리 우습게 보였나 보군. 그래, 어디 들어와 보게.”
“먼저 들어오는 건 어때? 내가 검을 뽑으면 영감은 검을 휘두를 시간도 없을 텐데 말이야.”
“정말인가?”
“물론이다.”
“좋네.”
“그럼 시작하지.”
힐튼 남작의 검이 뽑혀 나왔다. 느리지도,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았지만 눈부신 오러는 라탄의 가슴을 길게 베어내고 지나갔다.
“크악!”
라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길게 가슴을 가르고 지나가는 힐튼 남작의 검을 바라보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최상급에 오른 힐튼 남작을 보며 자만했던 라탄의 어이없는 최후였다.
“이제 보니 쓰레기였군.”
힐튼 남작이 바닥에 쓰러진 라탄을 뒤로하고 팽팽하게 검격을 교환하는 보일과 켈린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자 힐튼 남작을 견제하던 켈린의 손발이 갑자기 어지러워졌다.
푸욱-
보일의 검이 켈린의 복부를 관통했다. 켈린이 힐튼 남작을 노려보며 바닥에 쓰러졌다. 두 사람 모두 비슷한 실력을 가졌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여러 상급 엑스퍼트와 대련을 해본 켈린었다. 그러나 조금 더 유리한 그 상황에서, 켈린이 힐튼 남작의 살기에 허점을 노출하는 실수를 범하고 만 것이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
“크아악!”
고통스런 비명과 함께 팔이 잘린 하벨론이 바닥에 쓰러졌다. 래쇼티 백작 역시 여기저기에 난 상처들로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공작이 보낸 것인가?”
“죽여라! 난 절대… 커억!”
하벨론의 외침에 래쇼티 백작의 검이 그의 목을 관통했다.
“어차피 네놈에게 궁금한 건 없었다.”
백작이 차갑게 노려보며 검을 털어냈다.
“공작이 공주를 노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안전하게 머물 곳이 필요한 것 같군요.”
보일의 말에 힐튼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디가 좋겠느냐?”
“되도록 안전하면서도 공작이 찾기 어려운 곳이 좋겠군요.”
“방어하기도 좋아야 할 겁니다. 어쩌면 공작과 전투를 벌여야 할지 모르니까요.”
“그런 곳이라면… 흠.”
“뭘 걱정하는 겁니까?”
어느새 보일의 옆으로 다가온 토일이 물었다.
“무슨… 말이오?”
“마침 아주 적당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어딜 말하는 것이요?”
“당연히 카일 님의 장원인 크레센트로 가야죠.”
“크레센트….”
“일단 아는 사람이 많지 않고, 거대한 분지형으로 방어하기에도 아주 이상적인 곳이지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여기서 반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죠.”
토일의 설명에 래쇼티 백작은 물론 보일과 힐튼 남작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힐튼 남작과 보일 모두 공주의 안전도 중요했지만 카일이 만들어 놓은 장원 역시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 * *
쿠아악-
거대한 공동 안, 드래곤 하트를 몸 안에 이식한 순간부터 벌써 십여 일이 지났지만 아르미스의 동체는 아직도 끊임없이 요동치며 대기 중 마나를 급격히 끌어당기고 있었다.
쩌어억-
그때 갑자기 아르미스의 등이 쩌억 갈라지며 새하얀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드래곤이 낡은 허물을 벗고 모습을 드러냈다.
“아아! 드디어 완벽한 드래곤이 되었다.”
아르미스가 온몸에 흐르는 엄청난 마나에 고양된 듯 소리쳤다. 완벽한 드래곤 하트를 얻으려면 적어도 수십 년은 필요할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드래곤 하트를 몸 안에 심는 순간 그것이 불균형을 이르던 불의 정수를 흡수해 몸집을 키우더니, 나중엔 주변 마나를 흡수해 스스로 최적의 드래곤 하트로 진화, 덕분에 아르미스는 벌써 탈피까지 이루었다. 마치 생명을 가진 듯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카일의 독특한 오러 성질 덕분이었다.
“녀석을 잡아야 한다. 녀석만 잡으면 드래곤 일족을 부활시키는 것도 꿈만은 아니다.”
아르미스의 붉은 눈이 탐욕스럽게 번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