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 회군(2)
“촌장님 되십니까?”
주변을 한차례 둘러본 카일이 지팡이를 짚고 선 노인에게 다가가 정중히 물었다.
“그, 그렇습니다. 제, 제가 바로 이곳 마고 마을의 촌장입니다만….”
“여기 가죽공방이 있습니까?”
“공방이라면….”
“보시다시피 사정이 있어 입고 있던 옷을 잃어서 말입니다.”
카일의 행색과 함께 함께 온 여인들을 유심히 살피던 촌장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어렸다. 일단 상대에게서 적대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엔 가죽공방이 없습니다. 잡화점이 하나가 있긴 하지만 그곳에서도 가죽 물건은 취급하지 않습지요.”
촌장이 카일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럼 마을 사람들에게 부탁하면 어떻겠습니까?”
“예?”
촌장이 당황한 듯 되물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 제법 가죽을 잘 다루는 것 같더군요. 어떻습니까? 만들어 놓은 가죽옷을 파십시오. 대가는 충분히 치르겠습니다.”
카일의 말에 촌장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이곳이… 사냥꾼 마을이란 걸 아셨나 보군요.”
“집집마다 널려있는 짐승 가죽이 보이는데 모를 수야 없지요.”
“그것도… 그렇군요.”
마을을 한차례 돌아보던 촌장이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휴, 그렇습니다. 이곳은 오랜 세월 외부의 간섭을 피해 모여든 사람들이 사냥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곳이라 제법 가죽을 잘 다루긴 합니다. 하지만 쉽게 거래를 하겠다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골드를 주겠다는데도 싫다는 말인가요?”
“이곳은 공국에서도 가장 북쪽에 자리한 오지마을이라 상단도 찾지 않는 곳입니다. 생필품 대부분도 인접 마을간 물물교환으로 얻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 곳에서 골드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황금을 지불하신다고 해도 응하는 사람들이 없을 겁니다.”
촌장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곳 마고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도 침엽수림을 수일 동안 걸어야 했고 영주성은 그보다 훨씬 멀고 험한 길을 수십 일은 가야 할 정도라 화폐를 통한 거래가 익숙지 않았다.
“제가 대가로 내어줄 건 골드가 아닙니다.”
“그럼…?”
카일이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커다란 가죽 자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쿵-
가죽 자루를 내려놓으며 울리는 묵직한 충격음에 촌장이 놀란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가볍게만 보았던 자루가 예상 밖으로 대단히 무거웠던 데다가, 그런 자루를 카일이 아무렇지 않게 다루니 놀란 것이다. 하지만 촌장이 정말 놀란 건 이어진 카일의 말 때문이었다.
“밀가루입니다.”
“밀… 가루! 지금 이 자루에 담긴 게 전부 밀가루란 말입니까?”
“그냥 밀가루가 아닌, 귀족들이나 먹는 최상급 밀가루입니다.”
카일이 자루를 열어 눈처럼 새하얀 밀가루를 보였다. 최상급 밀가루는 밀기울이 포함되지 않은 배유, 가장 흰 알맹이만 재분해 만든 것이다.
“이… 렇게 귀한걸.”
이곳은 아이스 랜드와 인접한 얼어붙은 땅이다. 농사를 짓기 어려운 이곳에서 곡물, 그것도 눈처럼 새하얀 밀가루를 얻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어떻습니까? 거래를 하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해야죠. 당연히 할 겁니다.”
“저희가 필요한 건 따뜻한 털가죽 옷과 육포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반드시 구해 드리겠습니다. 여기가 바로 마을 회관입니다. 잠시 안에서 기다리시면 필요하신 것들을 찾아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 신세를 지겠습니다.”
카일이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펠론 자작과 기사들을 대수롭지 않게 돌아보더니 느긋하게 촌장의 뒤를 따라 회관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자작님!”
“잠시… 놓아두게.”
사라져가는 카일과 밝은 얼굴 그 뒤를 따르는 이니엘을 펠론 자작이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펠론 자작과 기사들은 카일이 촌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부터 마을 중앙 공터에 내려 그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쉽게 두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한 건 그들과 동행한 마법사 사하와 성녀 에밀 때문도 있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자신을 태연하게 응시하던 이니엘의 시선 때문이었다.
“일단 기사들을 보내 녀석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회관을 포위하게.”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흩어지는 사이 촌장이 직접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카일이 부탁한 물건들을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잡기 어려운 동물들의 귀한 가죽이었다.
“대단히 좋은 가죽이군요.”
“숲속에 아이스 베어라는 덩치가 작은 곰이 서식하고 있습지요. 털이 부드럽고 가죽이 질겨 제법 값을 잘 쳐주는 녀석입니다.”
“굳이 귀한 가죽까지 내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추위를 막아줄 따뜻한 털가죽이면 충분합니다.”
“거래란 원래 공정하고 공평해야 하는 겁니다. 아이스 베어가 제법 영리한 놈이라 잡기는 어렵지만, 또 잡으려 하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밀가루는 다르죠.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이니 부족하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것이 저희가 드릴 수 있는 최선입니다.”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육포가 든 주머니입니다. 보름치 정도, 넉넉히 넣었으니 충분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카일이 정중히 고개를 숙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휴, 감사라니,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귀한 밀가루를 얻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마을 사람들이 오랜만에 하얀 밀빵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나저나, 밖에 있는 기사단… 좋은 뜻으로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포댓자루 같은 옷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카일이 회관을 벗어나 천천히 마을 중앙 공터를 서성이는 펠론 자작에게로 향했다.
“오랜만이라고 해야 합니까?”
“글쎄? 나와 달리 자넨 내가 반갑지 않을 것 같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 지금 자작님을 만나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카일의 진한 미소에 자작의 얼굴이 잠시 굳어지며 자연스럽게 성녀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성녀께서 이곳에 계실 줄은 몰랐군요. 혹 성녀께서 카일 경의 독을 해독하신 겁니까?”
성녀는 여신의 대리인으로 막강한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카일의 독을 해독했다면 카일을 제압하고 이니엘을 데려가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더구나 상대는 블랙 와이번의 오너, 이니엘을 데리고 도주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쉽지만 카일 님이 중독된 독은 신성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답니다.”
에밀의 말에 펠론 자작의 얼굴에 안도감이 어렸다. 아무리 다수의 중급 기사들이 추격대에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상급 엑스퍼트인 카일을 상대하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펠론 자작이 잠시 카일을 지나 그의 뒤에 담담히 서 있는 이엘과 시안느에게로 향했다.
“너에게 제안을 하겠다.”
“말씀하세요.”
“나와 함께 돌아가자. 그럼 카일은 이곳에서 놓아주마.”
“그럴 수는 없어요. 전 가문에 조금의 미련도 없답니다.”
“네가 아무리 부정하고, 도망치려 해도 넌 결국 그린넨 백작가의 사람이다. 정말 가문의 위기를 그냥 지켜볼 생각이냐?”
자작이 이엘을 향해 소리쳤다.
“재밌는 말씀이세요. 하지만 전 백작가의 사람이었음을 부정하진 않아요. 그럼 자작께 한 가지 묻겠어요. 그럼 이번 위기를 자초한 아버님과 자작께선 어떤 책임을 지실 거죠?”
“그건…!”
이엘의 물음에 펠론 자작이 당황한 얼굴로 이엘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엘이 이런 질문을 던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가주와 자작께서… 아니 가문이 절 배신했기 때문 아닌가요? 잘못은 가주와 자작께서 하시곤 또다시 모든 책임은 제게 넘기시는군요. 제가 그런 결정을 따를 것 같나요?”
“모두 너와 가문을 위한 일이었다.”
“비겁한 변명은 그만두세요. 절 위했다면 적어도 절 이용하지는 말았어야죠.”
“그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만두세요. 이런 대화는 이미 무의미하니까요. 그리고 분명 말씀드리겠어요. 전 절대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아요.”
“그렇다면 카일 경도 함께 데려갈 수밖에는 없다. 정녕 그것을 원하는 것이냐?”
“조금 전 사과를 하셔놓고, 이젠 협박까지 하시는군요.”
“…가문을 위한 일이다. 용서하거라.”
“곧 후회하실 거예요.”
자작을 노려보던 이엘이 고개를 흔들며 카일을 바라보았다.
“부탁해요.”
“걱정 마십시오. 약속은 반드시 지킵니다.”
카일이 천천히 자작을 향해 걸어갔다.
“마법사와 성녀를 믿는 모양인데… 쉽진 않을 거다.”
“쓸데없는 걱정이군요.”
피식 웃음을 지은 카일의 신형이 흐릿한 잔영을 남기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헉!”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카일의 모습에 당황한 기사가 황급히 검을 찔러넣자 카일이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검면을 밖으로 밀어낸 뒤 안쪽으로 파고들어 멱살을 움켜잡았다.
“죽이진 않겠다.”
카일의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하늘 위로 높이 떠 올랐던 기사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꽈앙-
“크억-”
고통스런 비명과 함께 기사의 움직임이 멈췄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한 것이다.
스르릉-
“놈이 사라졌다. 찾아!”
자작이 급히 소리치며 검을 뽑아 들곤 주변을 살폈다.
“크아악! 내 팔!”
또다시 비명. 조금 전 있었던 곳과는 반대 방향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바닥에 쓰러진 사내의 팔이 비정상적으로 뒤틀어져 있었다.
“빌어먹을, 포위 간격을 좁히고 두 명씩 조를 이뤄 대항해! 허점을 주지 말란 말이다!”
펠론 자작이 고함을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두 명이 모이면 두 명을, 세 명이 모여들면 셋모두의 팔이나 다리를 꺾어 놓거나 아예 기절시켜 버렸다.
“괴, 괴물같은놈!”
자작이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무려 20여 명이 넘는 기사들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지만 죽은 사람 하나 없이 사지가 멀쩡하게 붙어있었다. 단 한번도 무기를 뽑아 들지 않았다는 말이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계속 따라오겠습니까?”
“날 죽이기 전까진 절대 포기할 수 없다.”
펠론 자작이 카일을 노려보며 소리쳤지만, 감히 공격하진 못했다. 기사단 전체가 괴멸적 타격을 입은 이상 자신이 아무리 공격을 한다 해도 상대할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하지만 경고하겠습니다. 지금이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걸 말입니다.”
“돌아갈 수 없다.”
“좋습니다.”
펠론 자작의 단호함에 카일이 피식 웃었다.
“에밀! 치료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카일의 말에 에밀이 환하게 웃으며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여신이여-”
에밀의 기도에 환한 빛이 쏟아져 나와 기사들의 부러진 팔다리를 말끔하게 치료했다. 아직 전투는 불가능하지만 움직이는 데는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부상이 치료되자 기사들이 하나둘 일어나 펠론 자작의 뒤로 모여들었다.
“…정말 오러를 잃은 건가?”
“제가 오러를 쓴 것 같습니까?”
카일의 물음에 자작이 고개를 저었다. 분명 카일의 움직임 어디에도 오러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전 오러를 사용하지 않은 건 맞습니다.”
“역시 아직 독을 해독하지 못했단 말이군.”
“그건 아닙니다. 잃었던 오러는 이미 되찾았습니다. 다만, 절 시험해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시… 험?”
“변화된 육체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말입니다.”
“변화…! 설마.”
카일의 말에 깜짝 놀란 펠론 자작이 당황한 얼굴로 주춤 물러났지만 카일은 오히려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리곤….
스르릉-
카일이 검을 뽑았다.
“명심하십시오. 이미 돌아갈 기회는 사라졌습니다. 만약 허락 없이 기수를 돌리는 자가 있다면….
우웅-
카일의 검이 진동하며 황금빛 오러가 검신을 장악하고 막강한 기운을 뿌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완벽한 황금빛 오러 블레이드가 만들어졌다.
“반드시 죽일 겁니다.”
카일의 말에 펠론 자작은 물론 기사들의 얼굴까지 창백하게 변했다. 한 달전까지만 해도 상급 엑스퍼트에 불과했던 자가 어느새 지고한 경지에 올라 자신들을 협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펠론 자작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엘에게로 향했다. 그래, 녀석의 선택이 옳았다. 그때 끝까지 백작을 말렸다면, 그랬다면 어쩌면 지금쯤 공작가에 버금가는 힘과 권력을 누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알겠다… 절대, 허락없이 기수를 돌리지는 않겠다.”
펠론 자작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오러를 걷어들였다.
“그럼 출발해 볼까요.”
카일이 하늘을 올려보자 거대한 블랙 와이번이 하늘을 선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