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 회군(1)
8서클 마법의 위력은 대단했다. 마법이 발현되고 하루 온종일 매서운 한파와 눈 폭풍이 지속되어, 잠에서 깨어난 그녀들도 한기가 물러날 때까진 꼼짝도 할 수 없는 민망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틀째가 되는 새벽녘에는 폭풍이 잦아들고 사하의 마력이 돌아오면서 한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카일도 여인들 중 체구가 가장 큰 시안느의 피풍의로 새롭게 옷을 만들어 입은 덕분에 겨우 민망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길 떠나야겠습니다.”
동굴 안에 갇혀 지낸 지 삼일이 지났다. 눈 폭풍이 잦아들기 시작하면서 카일이 동굴 밖을 나가 먹을 것을 구해오긴 했지만, 대부분의 동식물이 눈 폭풍에 얼어 죽으면서 구할 수 있는 식량이라곤 얼어 죽은 동물의 사체들뿐이라 더 이상 섬에 머물기가 힘들어 보였다. 삼왕자의 원정대도 지금쯤이면 열곡에 들어섰을 테니 서둘러 합류해야만 했다.
“그전에 작은 마을에라도 들려야 할 것 같아요. 이대로 아이스 랜드로 들어갔다간 모두 얼어 죽고 말 거예요.”
“걱정할 것 있나요? 우리에겐 살아있는 따뜻한 난로가 있는데?”
에밀이 모닥불을 뒤적이며 장난스럽게 카일을 바라보았다. 드래곤 하트가 빠져나가며 카일은 오러를 되찾았고 머릿속엔 새로운 마나 플라워가 자리를 잡았다. 카일은 이제 완벽한 소드마스터가 된 것이다. 덕분에 오러를 자유자재로 발산할 수 있게 되면서 외부의 기온변화에 따라 오러를 발산해 대처할 수 있게 되었으니 에밀의 말대로 살아있는 난로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그건 어쩔 수 없었어요.”
“맞아! 당시로선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어.”
이엘과 사하가 황급히 변명을 했다.
“전 잘못된 일이라곤 하지 않았는데요. 오히려 살려줘서 고마운걸요.”
에밀이 사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사하가 그녀의 옷을 벗기긴 했지만, 그녀가 없었다면 신성력이 바닥난 에밀은 아마도 확실하게 얼어 죽었을 것이다.
“그야… 누구라도 그때 상황이라면 그랬을 거야!”
사하가 당연하다는 듯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런 칭찬은 그녀에겐 익숙하지가 않았다.
“아니, 에밀의 말이 맞아요. 사하가 아니었다면 모두 죽고 말았을 거예요. 고마워요. 사하.”
이엘 역시 사하에게 고개를 숙였다.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사하의 말을 따른 덕분에 목숨을 건진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고마워 할 건 없어요.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서로 온기를 나누며 함께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제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의 은인이죠.”
사하가 은은한 미소로 그녀들을 하나씩 돌아봤다. 카일이 보기엔 어쩐지 어제 이후 서로가 부쩍 친해진 것 같아 보였다.
“그래도 카일이 없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그건 그래요. 몸에서 발산된 열기 덕분에 살 수 있었어요.”
이엘의 말에 그녀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카일에게로 향했다. 갑작스럽게 열기가 발산되었다는 건 카일의 몸에서 사라졌던 오러가 다시 돌아왔다는 뜻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휴… 역시 여러분들은 속일 수가 없군요.”
카일이 고개를 저으며 손을 들어 올리자 은은한 황금빛 오러가 서서히 손을 잠식하더니 이내 찬란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고작 손바닥을 둘러싼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분명 오러 블레이드가 확실했다. 하지만 그녀들이 놀란 건 따로 있었다.
“금빛 오러?”
카일이 가진 원래의 오러도 청백색으로 특이했지만, 금빛 오러의 등장은 더욱더 특이하다 할 수 있었다.
“아마도 드래곤 하트로 인해 오러의 특성이 약간 변화한 것 같지만… 일반적인 오러와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카일의 말에 사하가 유심히 카일의 손에 솟아난 금빛 오러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카일의 오러에서 독특한 어떤 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카일, 부탁이 있어요.”
사하가 진지하게 카일을 바라보았다.
“말씀하시죠. 암흑기사가 되라는 말만 아니면 최대한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런 건 아니니 걱정 말아요. 대신 나중에, 당신에게 한 가지 중요한 부탁을 할 거예요. 그때 꼭 당신이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어떤 부탁인진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꼭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사하가 카일을 향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사하와 함께 있는 동안 보았던 가장 밝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럼 언제 떠날 생각인가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가죠.”
“네?”
에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폭풍이 잦아들긴 했지만, 아직 밖은 상당히 춥습니다. 내일이면 폭풍이 조금 더 가라앉을 테니 하루만 기다려보죠.”
카일의 말에 사하가 고개를 저었다.
“물론 내일은 오늘보단 폭풍이 줄어들겠지만 큰 차이는 느끼지 못할 거예요. 지금 출발하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아 보여요.”
“저야 괜찮지만, 비행을 하게 되면 상당한 추위를 견뎌내야 합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괜찮아요. 우리에겐 인간 난로가 있잖아요”
에밀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에밀, 지금은 중요한 대화 중입니다. 장난할 때가 아니에요.”
“응? 장난이 아닌데요? 원래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턴 쉽다고 대주교가 말해줬는걸요. 이미 한번 카일을 안아 봤으니 두 번째는 더 쉽지 않겠어요?”
“그… 건!”
에밀의 말에 그녀들이 서로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처럼 말하긴 했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에밀의 말처럼 처음도 아니고, 지난번처럼 속옷만 입고 벌거벗은 카일을 껴안는 것도 아니니 부담도 훨씬 줄었다.
“좋아요.”
사하가 용감하게 찬성을 외쳤다.
“전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시안느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다들… 그렇다면 따르겠어요.”
“좋아요. 다들 이견이 없는 것 같으니 그럼 각자 자리를 배치해 볼까요?”
“좋아요.”
그러더니 자신들끼리 순식간에 자리 배치까지 마쳐버렸다.
그리고 지금 카일은 그녀들에게 둘러싸여 하늘을 날고 있었다.
-꼬리가 붙었다.-
시카니스의 갑작스런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카일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죠?”
이엘이 굳어진 카일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꼬리가 붙었습니다. 20여 기의 와이번이 따라붙었습니다.”
“설마…!”
이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20기의 와이번들이라면 정체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백작가의 추적대가 우릴 쫓아온 것 같군요.”
“…어쩌죠? 아이스 랜드를 거쳐 가려면 반드시 마을에 들렸다 가야 할 텐데…”
“어쩔 수 없죠. 꼬리를 달고 갈 수는 없으니 이쯤에서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카일의 말에 순간 이엘의 몸이 굳었다. 아무리 가문을 떠났다지만 가문의 사람들이 카일의 손에 죽는 모습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걱정 마십시오. 제압만 할 뿐 죽이진 않을 겁니다.”
카일이 이엘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위로했다.
-제법 큰 마을이다.-
“잘됐군, 내려가자!”
카일의 말에 시카니스가 천천히 하강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펠론 자작이 굳은 얼굴로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는 거대한 블랙 와이번을 바라보았다.
폭풍이 잦아들자마자 호수 중앙으로 향했던 펠론 자작은 하늘로 빠르게 솟구치는 거대한 블랙 와이번에 깜짝 놀랐다. 설마 이곳에서 전설적인 블랙 와이번의 존재를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블랙 와이번이 하강을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전방에 위치한 마을에 착륙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영애는 되찾아야 한다. 모두 놈을 쫓아라!”
“알겠습니다.”
펠론 자작의 명에 스무 기에 달하는 와이번들이 일제히 하강을 시작했다. 수십 마리의 와이번들이 갑자기 마을 상공에 나타나자 혼비백산한 마을 사람들이 황급히 집안으로 달려가 몸을 피했고 일부 자경 대원들이 창과 활을 들고 나타나 잔뜩 긴장한 채 하늘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아무리 용감한 사내라도 거대한 와이번 수십 마리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키아악-
가장 앞서 거대한 블랙 와이번이 마을 광장에 착륙하더니, 아름다운 미녀들과 어설프게 엮은 포댓자루를 뒤집어쓴 건장한 사내가 바닥에 내려섰다.
* * *
꽝-
단단한 자단목으로 만든 서탁이 공작의 손에 산산히 부서져 나갔다.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트라발트 공작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실패? 지금 실패라 했나?”
“설마 빌리어스 공작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빌어먹을 변명을 집어치워!”
“송구합니다.”
검은 정복의 사내가 깊이 고개를 숙였지만 공작의 얼굴은 여전히 분노에 휩싸여있었다. 사내 역시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알고 있기에 공작의 처분을 기다릴 수 밖에는 없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인가?”
고개를 숙인 사내를 보며 얼굴을 찌푸린 트라발트 공작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원정대는 어찌 되었나?”
“이미 강을 건너 진군을 시작했습니다.”
“이미 계획이 시작된 이상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 이젠 오명을 뒤집어쓰더라도 내 것을 되찾아야겠다.”
공작이 굳은 얼굴로 가신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금일, 제3군은 회군하여 왕성을 점령할 것이다.”
“충! 명을 따르겠습니다.”
가신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드디어 고대하던 순간이 그들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린넨 백작에게 내 뜻을 전해라!”
“백작이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이미 아군병력이 모두 백작령이 진입했다. 그가 내 뜻을 거절하면 그만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알겠습니다. 백작에게 뜻을 전달하겠습니다.”
“하벨론!”
공작의 부름에 거구의 사내가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대는 남부로 가야겠다.”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하벨론의 물음에 잠시 얼굴을 찌푸린 공작이 결국 무겁게 입을 열었다.
“분란의 소지는 애당초 남겨둘 수 없다. 이제 왕국엔 크로노스 왕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명심하겠습니다.”
“켈린과 라탄을 데리고 가라!”
“저 혼자만으로 충분합니다.”
“방심하지 마라! 그들 중 쉬운 상대는 없다. 자만은 패배의 지름길이다.”
트라발트 공작의 굳은 목소리에 하벨론이 급히 무릎을 꿇었다.
“송구합니다.”
“가라! 가서… 죽여라!”
“명!”
하벨론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가신들 중 가장 후미에 앉아있던 켈린과 라탄 역시 일어나 공작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인 뒤 하벨론을 따라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제3군이 말머리를 돌려 성도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이미 서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주들이 제국원정에 참전하면서 왕도로 향하는 공작의 병력을 막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이 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크로노스 왕국의 병력들과 서부 제국군과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서서히 전선이 고착되기 시작했다. 이때 그동안 숨을 죽이던 아이젠 공작가의 병력이 드디어 출병했다. 병력이 모두 빠져나간 황도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