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287화 (287/404)

287. 가계

“더 이상 접근은 불가합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펠론 자작이 눈앞의 광경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록 트루 공국이 북부 아이스 랜드와 접해 있긴 하지만 지금껏 죽음의 호수 전체가 얼어붙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호수 중앙엔 아직도 눈 폭풍이 끊임없이 회오리치며 외부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었다.

“목격자의 말로는 어제 오후, 거대한 괴수가 호수 괴물과 사투를 벌이다 북쪽으로 날아갔고, 눈 폭풍은 그 이후 갑자기 일어났다고 합니다.”

“괴수?”

죽음의 호수에 사는 괴물은 이미 트루 공국은 물론 타 왕국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어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었지만, 괴수의 등장은 달랐다. 호수 괴물은 호수라는 공간을 떠나지 않지만 날개를 가진 괴수는 언제 어느 때 남하해 백작령을 위협할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정확하진 않지만… 와이번의 동체에서 두 개의 뿔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뿔?”

“그렇습니다. 하지만 목격자가 어린 소년이라고 합니다. 눈 폭풍을 피해 정신없이 산길을 도망치다 겨우 살았다고 했으니 믿을 만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흠… 결국 섬 수색은 폭풍이 잦아들 때까지 뒤로 미룰 수밖에는 없단 말이군.”

펠론 자작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난 며칠간 골드 와이번은 물론 레드 와이번이 착륙했을 만한 모든 곳을 조사했지만, 어디에서도 영애나 카일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제 남은 곳은 호수 중앙에 자리한 섬이다. 만약 섬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다면 펠론 자작으로서도 더 이상 이니엘을 찾을 방법이 없었다.

“폭풍이 사라질 때까진 당분간 이곳에 머물겠다. 기사들도 그동안 고생했으니 쉴 수 있게 해주고.”

“알겠습니다.”

“단, 언제 다시 추적을 시작할지 모르니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되네.”

“명심하겠습니다.”

부관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나자 펠론 자작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접근이 어려울 정도로 차갑고 거센 눈 폭풍에 얼어붙었던 호수마저 냉기를 버티지 못하고 거칠게 부서졌다가 다시 얼어붙기를 반복하여 호수 위로 거대한 빙산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만큼 지금 호수 중심에서 일어난 거대한 눈 폭풍의 위력이 살인적이란 뜻이었다. 만약 이니엘이 호수 중앙 섬에 있다면 그녀의 생사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제발, 살아있어라!”

펠론 자작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지금 내뱉은 독백이 조카의 생사를 걱정하는 순수한 마음 때문인지 아니면 가문을 위해 이니엘의 희생이 필요해서인지, 자작 스스로도 이젠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 * *

타다닥-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앞, 수정을 정교하게 깎아 만든 안경을 쓰고 작은 책자를 천천히 읽어가던 노인이 손을 뻗었다.

항상 즐기던 따스한 린넨차를 마시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찻잔을 잡으려던 노인의 손이 중간에 뚝 멈췄다.

“누군가?”

“접니다.”

“츠란 아니냐? 네가 어찌 이곳에 들어온 것이냐?”

노인이 의아한 얼굴로 츠란을 바라보았다. 츠란은 언젠가 카일이 귀족원을 방문했을 때 안내를 맡았던 행정관으로 노인과도 제법 친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행정관이다. 노인의 허락없이는 귀족원 안으로 한 발짝도 들어올 수 없는 신분이란 뜻이었다.

“죄송합니다만 빌리어스 공작 전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츠란의 말에 노인, 빌리어스 공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이 빌리어스 공작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그중 츠란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네놈, 정체가 무엇이냐!”

“죄송합니다만 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공작께서 협조해 주신다면 고통 없이 죽여는 드리지요.”

츠란이 미소를 지으며 공작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왕실 가계도의 봉인을 풀어 주십시오.”

“네놈! 설마… 그놈이 보낸 것이냐!”

“죄송합니다만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공작께선 그저 봉인만 풀어주시면 됩니다.”

“흥! 어림도 없는 소리! 내 비록 힘없는 늙은이에 불과하나 왕실에 죄를 지을 생각 따윈 없다.”

“하하, 스스로 봉인을 풀지 않겠다면 어쩌겠습니까? 공작을 죽여 그 피로 봉인을 풀 수밖에 없군요.”

츠란의 말에 빌리어스 공작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왕실 가계도를 열어볼 유일한 방법은 빌리어스 공작위를 가진 자신과 자신이 지정한 후계자의 피뿐이었다. 상대는 이미 그런 사실까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스르릉-

“이제 그만 죽어주셔야겠습니다.”

츠란이 검을 뽑아 빌리어스 공작을 향해 거침없이 찔러 들어갔다.

차앙-

순간, 구석진 어둠 속에서 일어난 날카로운 기운이 츠란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콰앙-

츠란이 황급히 뒤로 두 걸음 물러나 얼굴을 찌푸리며 잘려나간 옷자락을 내려보았다.

“기사 투벨, 아직 돌아가지 않았군요.”

츠란의 말에 어둠 속에서 대검을 든 기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귀족원, 정확히는 빌리어스 공작의 호위기사 투벨이었다.

“공작 전하! 아무래도 몸을 피하셔야겠습니다.”

투벨이 긴장한 얼굴로 츠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전 투벨이 전력을 다해 기습적으로 날린 검격을 츠란은 조금의 상처도 입지 않고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즉, 자신보다 월등한 실력의 소유자란 뜻이었다.

“자네도 막아낼 수 없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얼마나 버틸 수 있겠나?”

“최선을 다하겠지만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할 겁니다.”

“그럼… 아주 잠시만 버텨주게.”

빌리어스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미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네. 그러니 이 늙은이의 목숨은 조금 더 효율적인 일에 쓰는 것이 맞지 않겠나?”

공작이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헌데 그가 향하는 곳은 문이 아닌 서재 안쪽 커다란 황금 동판이 자리한 곳이었다.

“설마!”

츠란이 황급히 공작을 향해 달려가려 했지만 투벨이 츠란의 앞을 막아서며 검을 횡으로 그었다.

푸른 오러가 물결처럼 다가오자 츠란이 급히 뒤로 물러나 검을 내려그었다.

꽈앙-

검격에 뒤로 밀려난 츠란을 따라 투벨이 맹렬하게 검을 휘두르며 따라붙었다. 그사이 황금 동판에 다가선 빌리어스 공작이 망설임 없이 작은 커팅 나이프로 손바닥을 그었다.

투두둑-

손바닥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이 황금동판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문양의 마법진 위로 떨어져 내렸다.

우웅-

작은 진동과 함께 핏방울이 마법진 중심으로 모여들며 구름같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애틀린 폰 빌리어스, 맹약의 주인, 용건을 말하라-

“크악-!”

고통스런 비명 소리에 고개를 공작이 고개를 돌리자 투벨의 등을 뚫고 삐죽이 솟아난 푸른 검이 한눈에 들어왔다.

“빌어먹을… 놔!”

츠란이 자신의 팔을 부여잡은 투벨을 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손에 든 검까지 버리곤 더욱 강하게 츠란의 팔을 붙잡고 늘어질 뿐이었다. 그 모습을 비통하게 바라보던 공작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외쳤다.

“나 애틀린 폰 빌리어스, 맹약의 주인, 나의 작위와 권리를 승계하다.”

“안돼!”

츠란이 빌리어스 공작의 외침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대로 빌리어스 공작의 작위와 권리가 다른 이에게 계승되면 상황은 복잡해지고, 그동안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질 수 있었다.

“젠장!”

츠란이 투벨의 복부를 관통한 검을 두손으로 부여잡았다. 그도 투벨을 죽이지 않는 이상 빌리어스 공작을 막을 수 없음을 인정한 것이다. 츠란이 복부를 관통한 검을 횡으로 밀었다. 아무리 투벨이 두 손으로 팔을 부여잡았다고 해도 횡으로 밀려 나가는 검까지는 막지 못했다.

“커어억-!”

츠란의 검이 투벨의 복부를 횡으로 가르고 나오자 투벨도 더이상 버티지 못하곤 바닥에 쓰러졌다.

“지독한….”

바닥을 꿈틀거리면서도 자신의 다리를 부여잡으려는 투벨의 모습에 츠란이 얼굴을 찌푸리며 투벨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빌리어스 공작을 찾았을 땐, 이미 마지막 절차만이 남아있었다.

-대상을 말하라!-

“이런!”

츠란이 황급히 검을 뽑아 빌리어스 공작을 향해 던졌다.

“카일 폰 커억…!”

공작이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온 검을 보며 고통스런 비명을 토해내곤 황금 동판 위로 쓰러졌다.

“지독한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감히 대업을 막겠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

츠란이 투덜거리며 황금 동판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동판을 확인하고 숨겨진 왕위 계승자들만 파악해 전달하면 자신의 역할은 끝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빌리어스.”

-승계 대상 확인, 맹약에 따라 애틀린 폰 빌러어스의 모든 권한은 카일 폰 빌리어스에게 이양되었음을 알린다.-

“아, 안돼!”

츠란이 황급히 달려와 동판 위에 쓰러진 공작을 밀어냈지만 이미 동판 위로 드러나 있던 왕실 가계는 물론 구름같이 피어난 기운도 마법진으로 스며들듯 사라져버린 뒤였다.

“이런… 제기랄!”

츠란이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쓰러진 빌리어스 공작을 바라보며 분통을 터트렸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빌리어스 공작가를 물려받은 카일이란 자를 찾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빌리어스 공작가는 실체가 없는, 그야말로 이름뿐인 공작가다. 그는 평생 혼인을 하지 않았고 가문을 만들지 않았다. 그러니 새로운 빌리어스 공작이 누구인지 츠란도 알 길이 없었다.

“잠깐… 카일? 어디선가 들어본 말인데?”

츠란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뿐이었다. 하루에도 수명에서 수십 명의 귀족들이 츠란을 스치듯 지나간다. 그런 그가 몇 달 전 귀족원까지 안내한 카일이란 존재를 기억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설령 기억을 한다 해도 당장 카일을 찾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지금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8서클 마법에 갇혀 꼼짝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흐읍….”

카일은 꿈을 꾸었다. 거대한 나무 아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은 그에게 어디선가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얀 백사 한 마리가 다가와 몸을 휘감으며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살결을 스치는 차갑지만 부드럽고 매끈한 비늘의 감촉에 카일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헌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분홍빛 뱀이 누워있는 그의 팔을 타고 올라와 부드럽게 목을 휘감으며 차가운 숨결을 내뱉었다. 뒤이어 푸른 청사와 새카만 흑사까지 나타나 마치 당연하다는 듯 그의 몸을 휘감아 오더니 네 마리의 뱀이 어느새 서로 얽히고설키며 카일의 몸을 꼼짝할 수 없게 옥죄어 왔다.

“사… 살려줘…!”

카일이 힘겹게 소리를 지르며 팔을 뻗어보려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을 옭아맨 뱀들은 더욱더 강하게 그를 조여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후우-”

가슴이 답답해 숨을 내뱉었다.

‘이건 꿈이다. 잠에서 깨어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카일은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지금 유일하게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곳이 머리였기 때문이었다. 의지가 강하게 일어나자 자연스럽게 정신이 맑아지며 깊은 잠에서 그를 끄집어냈다.

“헉!”

겨우 잠에서 깨어난 카일이 몸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가슴과 팔을 강하게 짓누르는 힘에 여전히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우웅….”

그때였다.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르던 무언가에서 들려온 작은 목소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는 싸늘한 기운에 남아있던 졸음까지 완전히 날려버린 카일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지금 어떤 일이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지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이게… 뭐야!”

카일이 자신을 끌어안고 잠든 네 여인을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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