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 그가 필요한 것(2)
“휴… 몸엔 이상이 없어요. 잠시 기절한 것뿐입니다.”
카일을 살피던 시안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행이에요. 정말, 만약 카일이 잘못되었다면….”
“이젠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드래곤도 죽었고 카일도 무사….”
꽈아앙-
그때였다. 호수에서 엄청난 폭음과 함께 소용돌이가 일어나더니, 그 속에서 만신창이가 된 아르미스가 솟구쳐 올랐다. 그와 동시에 호수에서부터 엄청난 한기가 쏟아져 나왔다. 화이트 드래곤 아르미스가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냉기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젠장…!”
아르미스가 쓰러져있는 카일을 한차례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북쪽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비록 마법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내외부로 심각한 타격은 피하지 못했기에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쩌엉-
소용돌이치던 호수가 그대로 얼어붙으며 주변의 기온이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빨리 피해!”
급속히 얼어붙기 시작한 호수를 멍하니 바라보는 이엘과 시안느를 향해 사하가 급히 소리치며 달려왔다.
“프로즌 템페스트(Frozen Tempest), 8서클 마법이에요. 이대로 있다간 순식간에 얼어 죽을 거예요.”
사하의 말에 시안느와 이엘이 급히 카일을 부축해 동굴로 황급히 달렸다.
“베어리!”
동굴 안으로 들어선 사하가 급히 5서클 마법 베어리로 입구를 막았다.
“쿨럭-”
그녀가 격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했다. 이미 마나와 암흑마기가 고갈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마법을 시전하며 내상을 입은 것이다.
“사하…!”
시안느가 깜짝 놀라 다가가려 했지만 사하가 급히 손을 들어 막았다.
“이럴 시간이 없어요. 서둘러요.”
사하가 비틀거리면서도 급히 일어나 여전히 쓰러져 있는 에밀을 부축해 일으켰다.
“이엘, 불을 최대한 피워야 해요. 마법으로 입구를 막았지만, 냉기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어요.”
“이곳도… 안전하지 않다는 말인가요.”
“맞아요. 그러니 일단 서둘러요.”
서하의 말에 이엘이 황급히 남아있던 땔나무를 모닥불에 모두 밀어 넣었다.
“이젠 뭘 하면 되죠.”
“옷을 벗어요.”
“네?”
“마지막은 서로의 체온으로 한기를 버티는 방법밖에는 없어요. 이미 저도 에밀도 더 이상 마법을 쓸 수 없어요.”
사하가 황급히 에밀의 옷을 벗기더니 자신 역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망설일 시간이 없어요. 지체했다간 모두 죽을 거예요.”
사하는 급히 에밀과 카일을 끌어안은 뒤 입고 있던 옷과 함께 피풍의를 머리끝까지 둘렀다.
“선택은 두 사람이 해요.”
꽈드득 쩌엉-
사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에서부터 굉음이 울려 퍼졌다. 얼어붙었던 호수가 냉기를 이기지 못하고 부서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카일을 잠시 바라보던 이엘이 결국 옷을 벗기 시작했다. 시안느 역시 이엘을 따라 옷을 벗은 뒤 그녀와 함께 카일을 끌어안고 피풍의를 덮었다.
쩌어엉-
동굴 입구 배어리 마법이 크게 흔들리며 부서질 듯 굉음을 울리더니 차가운 냉기가 동굴 안으로 스며들었다. 베어리 마법이 입구의 냉기를 막아주고는 있지만 동굴 벽면으로 스며드는 차가운 기운까지 막아줄 수는 없었다. 동굴 안은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활활 타오르며 냉기를 막아주던 모닥불도 서서히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으으….”
피풍의와 입던 옷을 겹겹이 덮어 한기를 막아내려 했지만, 살 속을 파고드는 한기에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사하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순식간에 몸이 얼어붙어 죽었을지도 몰랐다. 힘겹게 서로의 체온으로 한기를 버티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는 냉기에 그녀들도 이젠 한계에 다다랐다.
“너무 추워….”
“아가씨, 정신을 잃으면 안 됩니다.”
점점 흐릿하게 들려오는 이엘의 숨소리와 목소리에 시안느가 급히 이엘을 흔들었지만, 이엘의 체온은 점점 더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변이 일어난 건 그때였다. 갑자기 카일의 몸에서 따스한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머릿속 드래곤 하트가 사라지면서 오러가 외부에서 침입한 냉기를 밀어내더니 열기를 발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 따듯하다.”
가장 먼저 죽은 듯 미동도 없이 누워있던 에밀과 이엘이 차가운 한기를 피해 카일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고 사하와 시안느 역시 카일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서서히 밀려오는 피로에 사르륵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순백의 대리석으로 장식된 랑브리와 전설적인 전투가 생생히 묘사된 화려한 벽화, 수백 개의 아름다운 크리스탈로 장식된 샹들리에까지….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하는 거대한 갤러리 안 수많은 귀족들과 기사들이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영애와 귀부인들의 손을 잡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갤러리 중간중간 원형 테이블 위엔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 담겨 먹음직스런 향기를 내뿜었다.
“이곳은… 그린넨 백작가의 재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군요.”
검은 코트형 정복에 특징짓나 없는 평범한 인상의 사내가 갤러리 안을 돌아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전체적으로 갤러리의 분위기는 우아하면서도 품위가 가득했다.
“백작가는 드러난 재력보다 감춰진 것이 더 많은 곳이지.”
“백작가를 선택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까?”
“하하, 재력이 필요하긴 하지만 재력 때문에 백작가를 선택한 건 아니라네. 그보단 이곳 영애가 더 마음에 들었다고 할 수 있다네.”
“백작이 소영주보다 더 총애한다고 들었습니다만 공작께서도 관심을 가질 정도면 영애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군요.”
“휴… 자식이 부족하니 어쩌겠나. 녀석의 짝이라도 잘 들이고 싶은 마음 때문이겠지?”
공작의 이마에 가는 주름이 잡혔지만, 이내 그가 고개를 흔들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삼왕자는 보이지 않는군.”
수많은 귀족들과 기사들이 서로의 파벌에 따라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어디에서도 삼왕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삼왕자는 물론 그의 파벌이라 할 수 있는 중립 귀족, 그중 가장 핵심 세력들마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왕성에 없는 건 확실한가?”
“몇 번을 확인했지만 없었습니다. 왕자의 파벌 대부분이 보름 전 병력을 이끌고 이미 떠났다고 합니다.”
“이동한 병력만도 수만인데… 병력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게 말이 되는가?”
“전쟁으로 병력들과 용병은 물론 상단의 이동도 잦았습니다. 행적을 숨기려 마음먹었다면 저희만으로는 찾아내긴 힘듭니다.”
“역시 정보의 부제인가?”
“흔적은 쫓고 있지만… 갑자기 여러 지부들이 급작스럽게 무너지며 공백이 생겨 정보체계가 무너졌습니다. 게다가 점조직으로 퍼져있는 하위조직들을 누군가 흡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워낙 은밀하게 진행된 일이라 상황을 파악했을 땐 이미 늦었습니다. 그 점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하위 점조직이라면 내부 사람이 아니라면 접근이 쉽지 않을 텐데?”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닌지라… 상대가 정보 길드인지 아니면 다른 파벌의 소행인지는 조금 더 조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지. 일은 이미 시작되었고,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으니.”
공작이 얼굴을 찌푸리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래, 기사단은 어찌 되었나?”
“이미 준비는 끝이 났습니다. 명을 내려주시면 바로 진행될 겁니다.”
“이번 일은 속도가 생명이야, 최대한 빠르고 신속하게 진행해야 하네.”
“걱정 마십시오. 그린넨 백작도 이미 발을 담갔으니 협조할 수밖에는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리고 공주의 행방은 찾았나?”
“거미들의 훼방이 심해 정확한 위치는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남쪽으로 이동한 사실만은 확인했습니다.”
“남쪽… 역시 그를 찾아간 건가?”
공작이 얼굴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오래전 지나간 일이었다. 또다시 미련 하나로 큰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계획은… 내일 출병과 동시에 시작하게.”
“알겠습니다.”
공작을 향해 고개를 숙인 사내가 천천히 물러나더니 이내 귀족들 사이로 스며들 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공작 전하!”
사내가 떠나고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공작이 고개를 들었다.
“파비눔 백작.”
파비눔 백작은 일왕자 파벌이 속한 제1원정군의 부사령관으로 일왕자를 대신해 사실상 제1원정군의 총괄 지휘관이나 다름이 없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전하!”
“하하, 자네가 날 찾아올지 몰랐군.”
“한가지 여쭐 게 있어 사색을 방해했습니다. 용서하시지요.”
“괜찮네. 그저 잠시 지나간 인연들을 떠올려 보았을 뿐이네, 그래 물어볼 것이 무엇인가?”
“전하께서 선봉군인 1군을 포기하고 남부 차단군인 3군을 자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번 원정은 공작령이 제국으로부터 습격을 받으며 시작되었다. 명분상 선봉대인 제1원정군 사령관은 트라발트 공작의 차지였고, 모든 귀족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공작이 스스로 선봉대를 일왕자에게 양보한 것은 물론 후발대라 할 수 있는 제3군 남부 차단군을 자원한 것이다.
“그것이 궁금한 것인가?”
“제1군은 원정군이란 창에서 가장 날카로운 창날과도 같은 곳입니다. 소드마스터인 공작 전하야말로 선봉장에 가장 적합한 분임을 누구나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헌데 스스로 남부 차단군을 자처하시다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남부 차단군은 중부와 남부 사이의 요새와 성들을 점령하고 남부에서 증원되는 지원군을 차단하는 역할이었다. 원정군이면서도 점령한 요새를 지키는 일종의 방어군으로 전공을 세우기 가장 어려운 부대 중 하나였다.
“맞아! 자네 말대로 선봉대는 원정군의 핵심이자 가장 큰 전공을 세울 수 있는 곳이지, 일왕자파의 지낭인 자네라면 이것이 일왕자에게 얼마나 큰 기회인지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왜 내게 그런 걸 묻는 건가?”
“전쟁이란 아무리 거창한 명분을 내 세운다고 해도 결국 누군가의 것을 빼앗고 탐하는 겁니다. 어떤 이는 전공을, 누군가는 명예를 탐합니다. 가난하거나 척박한 영지의 주인들은 전리품을 탐하기도 하지요. 헌데… 공작께서 탐하는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제3원정군은 큰 전공을 얻기 힘들었다. 물론 요새나 성을 점령하고 주변 영지를 약탈하면 상당한 전리품을 얻을 수도 있지만, 1군과 2군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한 수준이었다, 원래 제3원정군은 미약한 세력을 보유한 삼왕자에게 내정된 자리였다. 하지만 삼왕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2왕자가 맡게 되자, 그를 대신해 공작이 스스로 자처한 것이다.
“하하!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 또한 이번 전쟁으로 얻는 것이 있다네.”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글쎄? 잃었던 나의 명예라고나 할까? …하하, 그만 돌아가 파티를 즐기게. 날이 밝으면 한동안 이런 파티는 즐길 수 없을 테니 말이야.”
공작의 말에 파비눔 백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무리 명예를 중시하는 대귀족이라도 명예 하나만을 위해 엄청난 군비를 쏟아내며 전쟁을 일으키진 않는다. 더구나 파비눔 백작이 알고 있는 젊었을 적 공작의 모습은 야욕이 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십수 년의 칩거를 끝내고 고작 남부 차단군을 자처했다? 그로서는 믿기 힘든 말이었다.
‘조금 더 공작의 주변을 살폈어야 했는데….’
파비눔 백작이 크게 후회를 했지만, 내일이면 출정이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이젠 굴러가는 수레바퀴를 멈출 수가 없음을 백작도 잘 알고 있었다.
“공작 전하가 원하시는 일이… 부디 왕국을 위한 일이길 바랍니다.”
백작이 깊이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물러났다.
“파비눔 백작이라… 그래, 자네 말대로 전쟁이란 무엇인가를 빼앗고 탐하는 것이지.”
멀어져가는 백작의 뒤로 트라발트 공작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핏빛으로 붉게 물든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