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285화 (285/404)

285. 그가 필요한 것(1)

머리 위로 돋아난 한 쌍의 거대한 뿔, 날카로운 이빨과 피처럼 붉게 번들거리는 눈동자까지… 거대한 드래곤이 오래전 책에서나 읽었던 모습 그대로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드래곤!”

겁에 질린 이엘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다 결국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가씨!”

시안느가 급히 방패를 꺼내 겁에 질린 이엘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드래곤의 거대한 동체에 비해 한없이 초라하게만 보였다.

“카일…!”

시안느가 떨리는 목소리로 카일을 불렀다. 호위 무사로서 이엘을 지키기 위해 앞을 막아섰지만, 그녀 역시 드래곤이란 절대의 공포 앞에선 결국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카일은 그녀의 공포 어린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막대한 신성력과 충돌한 순간, 카일은 이미 정신을 잃은 뒤였다.

‘아… 안돼!’

에밀이 다급히 신성력을 걷어 들이려 했지만 엄청난 흡입력에 의해 내부에 남아있던 신성력까지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에밀이 성녀로서 막대한 양의 신성력을 품고 있다 해도 이대로라면 신성력은 물론 생명력까지 모두 빨려들고 말 것이다.

“정신 차려! 이렇게 죽을 거야?”

에밀의 귓가로 들려온 다급한 목소리. 사하가 정신을 잃어가는 에밀을 향해 급히 메시지 마법을 시전한 것이다.

꽈앙-

그와 동시에 일어난 충격, 에밀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땐 사악하고 어두운 암흑마기가 주변을 잠식하며 황금빛 기운을 막아섰다. 여신의 대리자인 성녀를 구하기 위해 마왕을 모시는 암흑 사제가 그녀를 밀어낸 것이다. 하지만 암흑마기 역시 익숙한 먹잇감인 듯, 황금빛 기운이 게걸스럽게 암흑마기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보고만 있을 거야?”

사하가 뒤로 밀려난 에밀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사하의 외침에 급히 정신을 차린 에밀이 다시 신성력을 끌어올려 황금빛 기운을 밀어냈다. 두 개의 상반된 기운이 양쪽에서 밀려들자 강대한 기운을 뿜어내던 황금빛 기운이 흔들리며 주춤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이변이 일어났다. 세 기운이 균형을 이루는 순간 공간이 왜곡되더니, 칠흑 같은 거대한 암흑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이내 사라졌다. 황금빛 기운이 점점 뒤로 밀려나며 순식간에 균형이 깨어진 것이다.

우드득-

그때였다. 정신을 잃은 카일의 몸에서 뼈가 어긋나는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황금빛 기운이 카일의 전신을 감싸며 어렵게 만들었던 옷들이 하루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부스스 부서져 내렸다.

“서… 설마!”

시안느가 깜짝 놀란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또다시 카일의 몸에서 바디체인지가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막대한 신성력과 암흑마기를 흡수하면서 카일의 내부, 황금빛 기운이 한계를 넘어서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몸이 또다시 변화를 시작하려는 것이다.

쩌어억-

순간 카일의 머릿속 황금빛 보석에 가느다란 실금이 어렸다. 막대한 기운이 유입되며 카일의 신체가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황금빛 기운을 끌어당기자 머릿속 보석이 반발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는 안 되지!”

가만히 카일의 모습을 지켜보던 드래곤의 눈이 붉게 타올랐다. 드래곤이 주변 마나를 급속도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이리 오너라!”

용언 마법, 의지만으로도 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마법이다. 카일의 몸이 둥실 떠오르며 드래곤에게로 날아들었다. 동시에 팽팽하게 대치하며 균형을 이루던 세 기운도 무너졌다.

꽝-

커다란 충격파에 사하와 에밀 두 사람이 동시에 바닥을 뒹굴며 쓰러졌다.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신성력과 암흑 마기에서 일어난 반발력이 서로를 공격해 내상을 입힌 것이다.

“커억-!”

“쿨럭쿨럭….”

거친 기침을 토한 사하와 에밀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버렸다. 시안느와 이엘이 급히 달려갔다.

“사하!”

시안느가 급히 쓰러진 사하를 안았다.

“정신을 잃은 것뿐이에요. 일단 동굴 안으로 옮겨요.”

이엘의 말에 시안느가 급히 사하를 안고 바위굴 안으로 향했다. 그 사이 이엘은 에밀에게 달려갔다. 다행히 에밀 역시 단순히 정신을 잃었을 뿐 큰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사하를 내려놓고 다시 밖으로 달려 나온 시안느가 에밀을 업은 뒤 이엘의 팔을 잡았다.

“일단 동굴 안으로 피해야 합니다.”

“전… 이곳에 있겠어요.”

“아가씨!”

시안느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무것도, 카일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가 어떻게 되는지는 제 눈으로 지켜봐야겠어요.”

“하, 하지만…”

“걱정 말아요. 무모하게 드래곤에게 달려갈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냥… 지켜볼 거예요.”

이엘의 단호한 말에 잠시 망설이던 시안느가 급히 동굴로 달려들어 갔다. 그사이 황금빛 기운으로 뒤덮인 카일을 내려다보던 드래곤의 눈에 묘한 기운이 어렸다.

“대단하군. 벌써 이렇게 키워 놓다니 말이야!”

감탄을 터트린 드래곤의 앞발이 허공에 떠 있는 카일을 향했다.

“엑스트렉션(extraction)”

우웅-

드래곤의 낮은 음성에 따라 카일의 머릿속 황금빛 보석이 부르르 떨리더니 퍽하고 터지듯 작은 입자로 흩어지며 빠져나왔다. 그리곤 카일의 머리 위로 모여들며 다시 하나로 합쳐져 황금빛 투명한 보석을 만들었다.

“크하하- 이제야말로 나 화이트 드래곤 아르미스가 온전한 드래곤이 되어 이 지옥과도 같은 고통에서 벗어날수 있겠구나!”

화이트 드래곤 아르미스가 기쁨의 포효를 터트렸다.

그는 사실 드래곤이되 드래곤이 아닌 반쪽짜리 드래곤이다. 드래곤의 정신체가 레드 와이번과 합쳐지며 육신을 얻었지만, 그것 역시 온전한 부활이 아니었다. 불의 기운을 타고 난 레드 와이번에 얼음의 정수인 화이트 와이번의 정신체가 합쳐졌으니 정상적인 육체라 할 수도 없었다. 상극의 기운이 매일 같이 충돌하며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 또한 부수적인 문제일 뿐, 온전한 드래곤이 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중요한 한 가지가 필요했다.

“드래곤 하트!”

드래곤의 심장. 드래곤은 두 개의 심장이 있다. 육신을 가진 생명체의 혈액을 전신으로 옮겨주는 심장, 그리고 또 다른 심장. 강대한 용언 마법의 핵심이자 마법의 종주인 드래곤을 수천 년 살 수 있게 해주는 생명의 근원, 바로 드래곤 하트다. 아르미스는 드래곤 하트가 없다. 드래곤의 정신일망정 와이번의 육신과 결합했으니, 그에겐 하나의 심장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마법의 종주, 방대한 마법 지식을 가진 드래곤이다.

“드래곤 하트가 없다면 만든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인간, 그중에서도 마나를 집약시킨 오러를 몸속에 저장하는 기사나 용병들의 머리에 씨앗을 심는 것이었다.

아르미스는 카일의 오러를 접하는 순간 그의 오러가 혼돈의 마나와 흡사하단 사실을 인지했다. 드래곤 하트를 만드는 가장 이상적인 마나를 찾아낸 것이다.

그는 카일이 화이트 와이번의 알(드래곤의 정신체)에 오러를 밀어 넣는 순간을 노려 드래곤 하트의 정수를 카일의 머릿속에 심었다.

일정한 요건이 되면 강제적으로 주변 마나를 끌어들여 소드 마스터를 만든 후 압축된 강대한 오러를 갈취해 드래곤 하트의 씨앗을 만드는 것이다. 아르미스는 이 씨앗을 매개로 완벽한 드래곤 하트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충분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널 죽이진 않겠다.”

아르미스의 붉은 눈동자가 사악한 빛을 발하며 카일을 내려보았다. 지금 카일의 머리에서 추출한 드래곤 하트는 씨앗에 불과했다. 예상보다 크고 농밀한 마나가 집약되었지만 아직은 완전하지 못했다. 불안정한 육체를 해결하고 온전한 드래곤 하트를 얻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마나가 필요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네놈을 매개로 드래곤 하트에 혼돈의 마나를 지속적으로 주입할 수 있다면 생각보다 빠르게 완전한 드래곤이 될 수 있지.”

아르미스가 기쁨의 포효를 터트리며 카일, 정확히는 황금빛 보석, 드래곤 하트를 향해 앞발을 뻗었다.

끼아악-

그때였다. 귀청을 울리는 날카로운 괴성과 함께 하늘에서 한줄기 새카만 광선이 빛살 같은 속도로 떨어져 내리더니, 허공에 떠 있던 카일과 드래곤 하트를 낚아채 호수 위로 처박힐 듯 아슬하게 스치곤 다시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아, 안돼!”

눈앞에서 드래곤 하트와 카일을 놓친 아르미스가 하늘 높이 날아오른 블랙 와이번 시카니스를 보며 분노를 쏟아냈다.

“크아악- 이놈!”

아르미스가 급히 하늘을 날아 시카니스의 뒤를 쫓았다. 시카니스보다도 배는 커 보이는 육중한 크기의 동체와 그보다 더 넓고 긴 날개를 가진 아르미스의 속도는 와이번 중 가장 빠르다고 알려진 골드 와이번 보다도 월등히 빨라 곧 잡힐 것만 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이 버리지 같은 것, 네놈을 잡아 갈기갈기 찢어 놓겠다.”

아르미스 주변으로 마나가 요동치더니 커다란 불덩이 수십 개가 생성돼 시카니스를 향해 일제히 날아들었다.

꽝-

꽝광-

시카니스가 빠르게 좌우로 움직이며 폭발을 피했지만 그 여파로 속도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르미스 역시 시카니스를 죽이는 것보다 속도를 줄여 사로잡는 것이 목표였다.

“이놈! 잡았다.”

아르미스의 날카로운 앞발이 날개를 부여잡으려는 순간, 시카니스가 갑자기 날개를 접곤 아래로 추락하듯 떨어져 내렸다. 바닥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호수, 시카니스가 호수에 추락한다면 자칫 드래곤 하트까지 잃을 수 있었다.

“비, 빌어먹을!”

아르미스가 시카니스를 따라 날개를 접으며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드래곤 하트는 돌려주마. 가져가라!’

시카니스의 목소리가 아르미스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시카니스가 날개를 활짝 펼치더니 바람을 안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곤 단단하게 쥐고 있던 드래곤 하트를 호수 위로 떨어트렸다.

“안돼!”

아르미스에겐 더 이상 시간이 없다. 상극의 기운이 지속적으로 부딪혀 지금도 동체가 급격히 붕괴되고 있었다. 마나를 끌어모아 힘겹게 막고는 있지만 드래곤 하트를 새롭게 만들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하늘로 떠오르며 스치듯 지나는 시카니스를 뒤로하고 아르미스가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호수 위로 떨어져 내리는 드래곤 하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멈춰-!”

호수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 드래곤 하트가 멈췄다. 아르미스는 황급히 앞발을 뻗어 드래곤 하트를 낚아채고는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리고는 광망이 흐르는 붉은 눈동자로 하늘 위, 시카니스를 바라보았다.

드래곤 하트를 확보한 이상 블랙 와이번을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카일이란 존재가 아깝긴 하지만 내부에서 폭발하는 분노를 이대로 참을 수만은 없었다.

“죽여버리겠다.”

아르미스의 몸에서 광폭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대기의 마나뿐 아니라 드래곤 하트의 기운까지 뽑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하늘 위를 날던 시카니스는 그런 아르미스를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여유롭게 말까지 걸었다.

‘드래곤이라더니 멍청하군.’

푸화아악-

시카니스의 말이 끝나는 순간 호수 속에서 뛰어오른 거대한 드레이크가 아르미스의 거대한 날개를 덥석 물어 당겼다.

“크아악- 이 미개한 놈들이!”

아르미스가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드레이크를 떨어트리려 했지만, 드레이크는 오히려 더욱 강하게 아르미스를 호수 속으로 끌어당겼다.

파지직-

아르미스의 앞발에 방전하는 금빛 기운이 어렸다. 드레이크를 떨어트리려 뇌전 마법을 시전한 것이다.

“이놈! 죽어라!”

푸화아악-

아르미스의 앞발이 드레이크의 머리를 가격하려는 순간 거대한 물보라가 일며 또 한 마리의 드레이크가 뛰어올라 아르미스의 어깨를 물었다.

“크아악-!”

아르미스가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몸을 동체를 흔들었지만, 드레이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르미스를 옥죄며 호수 속으로 끌어당겼다.

까드득-

아르미스의 동체가 호수 속으로 반쯤 잠겨 들자 이젠 사방에서 드레이크들이 나타나 아르미스를 물속으로 끌어당겼다.

“아, 안돼!”

마지막 발악을 하듯 몸부림을 치던 아르미스가 결국 심연의 호수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시카니스가 섬을 향해 날아가 기절한 카일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카일!”

이엘과 시안느가 황급히 달려와 죽은 듯 누워있는 카일을 끌어안았다.

‘그를 부탁한다.’

시카니스가 잠시 카일을 내려보다가 다시 하늘 위로 날아오르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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