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 드래곤
“휴! 잠시 나가 주시겠습니까?”
한참 동안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카일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네?”
“이렇게 계속 벌거벗은 채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 알겠어요.”
시안느와 이엘이 카일의 시선을 피해 황급히 동굴을 빠져나갔다. 그녀들이 나간 입구를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던 카일이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내뱉으며 몸을 가렸던 피풍의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피풍의는 특별히 질긴 오크 가죽에 기름을 잔뜩 먹인 뒤 한참을 두들겨 얇으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으로 만든 것이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카일이 피풍의를 들어 올렸다. 피풍의는 거구인 그의 신체에 맞게 넓고 길게 만들어졌다. 바디체인지가 일어나며 키는 물론 체구까지도 슬림하게 줄어든 덕분에 이젠 몸 전체를 감싸고도 남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카일은 우선 단검으로 피풍의를 가늘고 길게 잘라내 가죽끈을 넉넉히 만들었다. 그리고는 중앙을 머리가 들어갈 수 있게 둥글게 도려낸 뒤, 반으로 접어 팔이 들어갈 부분만 제외하고 양옆을 가죽끈으로 기웠다. 마치 커다란 포댓자루 같은, 엉성하지만 나름 튼튼한 옷이 완성되었다. 카일은 옷을 입은 후 마지막으로 꼬아놓은 가죽끈을 허리에 묶어 고정시켰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군.”
나름 만족스런 표정으로 옷을 매만진 카일이 바위 굴을 벗어났다.
“카일?”
이엘이 밖으로 나온 카일을 불렀다.
“어떻습니까?”
카일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고작 단검 하나와 피풍의 만으로 만들다 보니 조잡한 수준에 불과했지만 현 상황에서 만들 수 있는 최선이기도 했다.
“음… 엉성하긴 하지만 나름 괜찮아 보이네요.”
이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행이군요. 헌데 시안느가 보이지 않는군요.”
“시안느 경은 두 사람을 찾으려 숲으로 갔어요.”
이엘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머릿속에 자리한 황금빛 보석의 정체를 물어볼 사람은 사하와 에밀뿐이었다.
“몸은 괜찮나요?”
“몸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바디체인지를 겪어서인지 이전보다 몸도 가볍고 힘도 세졌습니다.”
카일이 바닥에서 주먹만 한 단단한 돌을 주워들어 가볍게 힘을 주었다.
꽈드득-
돌이 바스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천부적으로 타고난 힘과 신체적인 능력이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오러를 제외하고 신체적 능력만으로도 중급 엑스퍼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대단하군요.”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었지만, 바디체인지를 겪은 이상 신체적으론 완성된 소드마스터이니까요.”
카일이 손을 가볍게 털어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여기선 언제 떠날 건가요?”
“이곳에서 적어도 사흘 정도는 더 머물 생각입니다. 지금쯤이면 원정대가 북부 마파린 후작령에 모여들었을 겁니다.”
“그렇군요.”
이엘이 씁쓸한 표정으로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파린 후작가를 피해 남부로 도망을 치던 이엘이 이젠 가문의 추적대를 피해 직접 마파린 후작가를 찾아가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걱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카일의 물음에 이엘이 고개를 저었다.
“솔직하게… 괜찮지는 않아요. 불과 얼마 전까지 후작을 피해 도망을 치던 저예요. 분명, 후작가 사람 중 저와 시안느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어쩌면 가문을 압박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절 잡으려 할거예요.”
이엘은 그린넨 백작의 딸이다. 아무리 이엘이 가문을 등지고 떠났다고 해도 백작은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다. 설령 그린넨 백작이 그녀를 포기한다고 해도 마파린 후작의 수완과 능력이라면 그녀를 철저히 이용해 백작가를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언 용병대는 삼왕자에게 고용된 사람입니다. 원정을 포기할 생각이 아니라면 저와의 충돌은 원치 않을 겁니다.”
“하지만… 삼왕자가 끝까지 우릴 도와줄까요? 제국원정은 삼왕자에게도 반드시 성공적으로 끝나야 하는 일이잖아요. 어쩌면 카일도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어요.”
“삼왕자는 절대 저와 용병대를 포기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랬다간 그도 심각한 타격을 입을 테니까요. 그리고 아무리 후작이라도 제 사람을 건드린다면 절대 가만두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카일… 고마워요.”
이엘이 붉어진 눈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
숲 안쪽에서 누군가 빠르게 달려 나와 카일의 품에 안겼다.
“에밀…?”
카일이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의 품 안에 안긴 에밀을 바라보았다.
“카일,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신께서도 당신을 많이 걱정하셨어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아직 여신께선 당신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 제 몸 안엔 더 이상 신성력이 없습니다만?”
카일이 에밀을 살며시 밀어내며 말했다. 이제 카일의 몸 안엔 신성력뿐 아니라 암흑마기까지 모두 사라졌다. 더 이상 에밀이 카일에게 집착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성기사는 단순히 신성력의 유무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죠. 단지 하나의 조건일 뿐이에요. 그리고 이미 한번 신성력을 몸 안에 품었다면 다시 품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예요.”
“맞아요. 저도 아직은 당신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숲에서 걸어 나온 사하가 들고 에밀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이것까지 내팽개치고 달려오면 어쩌자는 거야!”
사하가 들고 있던 작은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갈대를 정성스럽게 엮어 만든 것으로, 한두 번 만들어본 솜씨가 아니었다.
“사하가 만들었어요.”
카일의 시선에 에밀이 웃으며 말했다.
“이걸… 말입니까?”
“어릴 때 어머니에게 배웠다고 그랬어요. 지금 입고 있는 옷들도 모두 직접 만들었고요.”
카일은 사하가 가진 의외의 모습에 놀란 얼굴을 했다. 손재주가 뛰어난 것도 놀라웠지만 사실상 적이라 할 수 있는 에밀과 붙어 다니며 친분을 쌓아가는 모습이 더 놀라웠다.
“왜 그렇게 보는 거죠?”
깨끗하게 손질된 이름 모를 날짐승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내던 사하가 카일을 바라보며 물었다.
“조금 전…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은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예요. 암흑마기가 있든 없든 마왕은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란 뜻이에요.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사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다듬어진 나무꼬챙이에 잘라놓은 고깃덩어리를 꽂아 넣었다.
“휴… 두 사람 다 왜 그렇게 저에게 집착하는 겁니까?”
카일이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잘못 알고 있군요.”
“네?”
“저와 에밀이 당신에게 집착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신과 마왕이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거죠. 저흰 그저 그들의 대리자일 뿐이에요.”
사하의 말에 에밀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왜 그들에게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거죠?”
“왜 벗어나야 하나요?”
에밀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사하는 달랐다.
“제가 해보지 않았을 것 같은가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영혼과 이어진 맹약은 마왕이 허락하지 않는 이상 철회되지 않아요. 방법은 하나. 당신을 암흑기사로 만들거나, 아니면 맹약에 따라 마왕을 중간계로 소환하는 것뿐이죠.”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카일이 고개를 들어 사하와 에밀을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두 사람에게 기회를 주죠.”
“기회… 라니요?”
“지금 제 머릿속엔 누군가 심어놓은 황금빛 보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에게 이걸 제거할 기회를 주겠습니다.”
카일의 말에 사하와 에밀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머리에 자리한 황금빛 보석을 제거해 달라 했지만 두 사람이 사용할 기운은 신성력과 암흑마기다. 황금빛 보석이 성공적으로 제거되는 순간 암흑마기든 신성력이든 그대로 물러나지 않고 머릿속을 장악, 카일을 구속하려 들것이다.
“머리를 내맡긴다는 것이 무슨 뜻인 줄 아니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희들에게 머릴 맡기겠다는 건가요?”
“어차피 황금빛 보석 역시 누군가 심어놓은 기운입니다. 이걸 제거하지 않으면 어차피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건 마찬가지 일 겁니다. 그럴 바에야 안면이 있는 두 사람이 조금 더 낫지 않겠습니까?”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사하가 에밀을 돌아보았다.
“먼저 해요.”
“제가… 요?”
에밀이 의아한 얼굴로 사하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성공한다면 사하에겐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되나요?”
“마음 바뀌기 전에 먼저 해요.”
사하의 말에 에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지팡이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팡이는 신성력을 좀 더 편하고 빠르게 사용하기 위한 매개일 뿐 정말 중요한 건 따로 있죠.”
에밀이 긴 나무 막대기로 커다란 마법진을 그려나갔다. 마법사들이 각종 시약이나 마나석을 사용해 마법진을 그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신중하게 마법진을 그린 에밀이 카일을 불렀다.
“신성 마법진이에요. 이곳에 앉아요.”
에밀이 마법진 중앙을 가리켰다.
“걱정 말아요. 아프진 않을 테니…”
에밀이 두 손을 모은 뒤 작게 속삭이며 눈을 감았다.
“여신이여.”
에밀이 작은 목소리로 기도를 올리는 순간 밝은 순백의 기운이 마법진에서부터 일어나 에밀에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할 거예요.”
에밀의 손이 카일의 머리 위로 올라가자 막대한 신성력이 카일의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와 왔다. 순간 황금빛 보석에서도 이에 저항을 하듯 황금빛 기운이 뿜어져 나와 신성력과 충돌했다.
꽈아앙-
머릿속에서 일어난 충격에 카일의 몸이 높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에밀의 입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안돼! …아악!”
카일의 몸에서 일어난 황금빛 기운이 신성력을 흡수하며 에밀의 몸 안에 담겨있는 신성력까지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이런!”
에밀의 비명에 사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큰일 났다.”
“무슨 일이죠?”
이엘 역시 상황이 이상하게 변하고 있음을 느꼈는지 사하를 향해 물었다.
“황금빛 기운이 신성력을 잡아먹기 시작했어. 저대로 두면 에밀은 죽고 말 거야!”
사하가 황급히 단검을 꺼내 팔을 그었다.
“무슨 짓이야!”
시안느가 깜짝 놀라 사하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사하가 급히 손을 들어 막았다.
“다가오지 마! 언니까지 빨려들 수 있어!”
사하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피가 흐르는 손을 바닥에 대고 낮게 중얼거렸다. 순간 사하의 피가 스스로 움직이며 복잡하고 거대한 마법진을 그렸다.
“당신의 힘이 필요해요.”
직후 마법진이 핏빛으로 물들며 검은 마기가 폭발적으로 일어나 신성력을 게걸스럽게 잡아먹던 황금빛 기운과 부딪혔다.
꽈앙-
엄청난 폭발, 그와 동시에 거대한 그림자가 하늘을 덮었다.
“크하하, 정말 흥미로운 광경이군. 신성력에 암흑마기라니…!”
“드… 래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