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283화 (283/404)

283. 출정(4)

“우린 이대로 북쪽으로 진군, 우크하란바 산맥을 지나 제국 북부를 직공할 겁니다.”

“지금… 뭐라고 하신 겁니까? 우크… 하란바를 넘겠다는 겁니까?”

우크하란바는 트루 공국 북쪽에 위치한 거대 산맥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은 산들이 마치 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장벽 같다고 해서 ‘창의 장벽’이란 뜻의 고대어 우크하란바라 불렸다.

“그렇습니다.”

“이런… 미친!”

케시언 백작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중립 귀족, 그중 가장 끝자리에 자리한 폴론 남작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하위 귀족인 폴론 남작이 고위 귀족인 케시언 백작에게 욕설을 내뱉으며 모욕을 주었건만 이를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모두 크게놀랐다는 뜻이었다.

“케시언 백작, 자네 그곳이 어떤 곳인 줄 알고 그런 소릴 하는 건가?”

“물론입니다.”

“아니, 그냥 험악하고 험준한 산맥이라면, 어쩌면 그대의 의견을 들어 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곳은 혹한의 대지 아이스 랜드를 남북으로 가르는 거대한 장벽이란 말이네! 산맥으로 진입하는 자체가 자살 행위란 말이야!”

바이센 백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뭐라?”

“창의 장벽을 지나갈 방법이 있습니다. 단지 지금껏 아무도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케시언 백작의 눈동자에 확신이 떠오르자 바이센 백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자네의 말 한마디만 믿고 소중한 병력을 죽음의 땅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이센 백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폴론 남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는 남부에 영지를 가진 영주로 이번에 인접 영지 세 곳과 동맹을 맺고 병력과 기사를 지원받았다. 총 3천의 병사들과 엑스퍼트급 기사 20명. 중부나 서부에 위치한 부유한 자작령에 버금갈 정도로 많은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 가난한 남부 영지의 사정을 고려한다면, 그가 이끌고 온 병력에 자신은 물론 세 영지의 운명이 걸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내 말만 믿고 무작정 병력을 밀어 넣어선 안 되겠지.”

케시언 백작이 폴론 남작을 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서 바이센 백작은 지금껏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마파린 후작께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에 동조하고 계신 줄은 몰랐군요.”

바이센 백작의 말에 귀족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마파린 후작에게로 향했다. 그는 북부를 책임지는 대영주로서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아이스 랜드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케시언 백작의 말도 안 되는 주장에 시종일관 무심한 듯 아무 말도 없이 회의를 지켜볼 뿐이었다. 병력의 규모와 작위로만 본다면 케시언 백작의 주장을 가장 먼저 반대해야 할 사람은 후작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는 건 후작 역시 이 작전에 대해 알고 있거나….

“아니, 오히려 케시언 백작을 설득하신 분이 후작이셨습니까?”

“하하하! 백작께서 케시언 백작과 비교하실 만큼 절 그리 높게 생각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만, 아쉽게도 틀리셨습니다. 이번 작전은 온전히 케시언 백작의 생각이었고, 전 그저 참신한 백작의 작전이 마음에 들었을 뿐입니다.”

마파린 후작이 웃으며 습관처럼 인장 반지를 쓰다듬었다.

“후작께선 우리가 우크하란바를 넘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불가능한 일이었다면 여러 귀족분들께 북부를 개방할 이유도 없었겠죠.”

마파린 후작의 말에 바이센 백작뿐 아니라 중립 귀족들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어렸다. 마파린 후작은 삼왕자를 지지하지 않는다. 아니, 왕위 다툼 자체에 큰 관심이 없는 그저 방관자란 사실은 이곳에 자리한 귀족들 모두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삼왕자를 도와 참전을 선택한 것은 어디까지나 북부, 아니 자신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었다. 즉 케시언 백작의 작전이 전혀 불가능하지 않을뿐더러 후작의 욕심을 자극할 정도로 성공확률이 높은 작전이란 뜻이었다.

“정말 우크하란바를 넘을 수만 있다면…!”

비록 작은 중얼거림에 불과했지만, 이곳에 모인 귀족들의 마음을 흔들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 우리가 제국의 영토를 원해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아니지 않나?”

마파린 후작이 귀족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곳에 모인 귀족들 대부분이 오랜 세월 조상들이 지키고 가꾼 영지를 보유한 영주들이었다. 다들 영토나 전투에서의 전공보다는 전쟁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될 전리품, 사실상 약탈에 목적을 두고 참전한 것이었다. 케시언 백작의 작전대로 우크하란바를 안전하게 넘을 수만 있다면 제국 북부 영지 전체를 점령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제국 북부 역시 혹한의 땅 아이스 랜드와 인접한 척박하고 영세한 영지라고는 해도 귀족들의 영지가 있는 이상 점령 후 엄청난 전리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더불어 어쩌면 이번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가장 큰 전공을 세울지도 몰랐다. 아무리 전투보다는 전리품이나 약탈에 목적이 있다고 해도 결국 귀족인 이상 전공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후작께선 정말 이번 작전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바이센 백작이 후작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나보단 이번 작전을 계획한 케시언 백작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 어떻겠나?”

후작의 말에 바이센 백작을 비롯한 귀족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케시언 백작에게로 향했다.

“백작 다시 한번 설명을 부탁해도 되겠나?”

바이센 백작이 정중하게 부탁했다.

“물론입니다.”

케시언 백작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작전의 생명은 은밀하게 아이스 랜드를 통해 제국 북부로 진입, 전속으로 남하하여 북부의 관문 아그렌 성을 함락하는 겁니다.”

아그렌 성은 북부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으로 험준한 아그렌 협곡을 막아 건설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케시언 백작의 말대로 이곳을 점령할 수만 있다면 북부로 진입할 방법은 제국 동부를 돌아가거나 험준하고 가파른 아그렌 산을 넘어가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작전에 대해선 큰 의견은 없네. 단지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어떻게 우크하란바를 넘어 갈지 뿐이네.”

바이센 백작의 물음에 백작이 한쪽 구석에 자리한 마라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귀족 회의에 용병이 참석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건 저보다 여기 마라스 부단장에게 들어보는 것이 좋겠군요.”

“마라스라면 아이언 용병대의 부단장이란 자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케시언 백작이 마라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언 용병대의 부단장, 마라스 입니다.”

마라스가 절도있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귀족 회의 중입니다. 용병에게 발언권을 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폴론 남작의 맞은편, 서부 귀족인 도튼 남작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하자 케시언 백작을 대신해 마파린 후작이 입을 열었다.

“이번엔 잠시 예외를 두었으면 하는데, 어떻게들 생각하나?”

“이자의 이야기가 아무래도 창의 장벽과 관련된 이야기일 것 같으니 이번은 예외로 넘어가지요.”

마파린 후작에 이어 바이센 백작까지 나서자 도튼 남작도 더 이상은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

“두 분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도튼 남작이 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 앉았다.

“마라스라고 했나? 이제 더 이상 자네의 발언권에 대해 문제 삼지 않기로 했으니 말해보게.”

“감사합니다.”

마라스가 다시 한번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말을 이었다.

“우크하란바는 험준하고 가파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거대 산맥입니다.”

“그곳에 가본 적이 있나?”

“물론입니다. 저와 부하들은 아이언 용병대와 통합되기 전 십수 년 동안 아이스 랜드를 전전하며 아이스 트롤을 사냥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보다 아이스 랜드에 대해 잘 알고 있겠군.”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묻겠네. 여기 캐시언 백작의 말대로 대병을 이끌고 우크하란바를 넘어가는 것이 가능하겠나?”

바이센 남작의 말에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마라스에게 집중되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우크하란바 산맥을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불… 가능하다…?”

마라스의 말에 바이센 백작이 실망스러운 얼굴로 케시언 백작과 후작을 바라보았지만 그들의 얼굴엔 오히려 진한 미소가 어렸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이스 랜드를 통해 제국 북부를 공격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조금 전, 산맥을 넘을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헌데 제국 북부를 공격할 수 있다니… 지금 귀족들을 상대로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중립 귀족 중 하나인 카스크 자작이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추궁했다.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크하란바는 험준하고 가파른 산맥이 길게 이어진 그야말로 창의 장벽입니다. 그런 곳을 혹한을 뚫고 넘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산맥을 가로질러 안전하게 지나갈 수는 있습니다.”

“가로… 지른다?”

바이센 백작이 의문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오래전 아이스 트롤을 쫓던 중 우크하란바 북쪽에서 독특한 지형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곳인지 설명해 주겠나?”

“우크하란바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균열이 있습니다.”

“균… 열?”

“그렇습니다. 균열 안쪽에 뜨거운 온천이 강을 이루며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죠. 덕분에 혹한의 대지인 아이스 랜드에서도 유일하게 나무와 식물이 자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 곳이 정말 있단 말인가?”

바이센 백작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얼굴로 물었다.

“사실이네. 나 역시 케시언 백작을 통해 그곳을 직접 확인했네!”

마파린 후작의 말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심각하게 굳어있던 귀족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열곡의 존재가 확인되었을 뿐 아니라 나무와 식물이 자랄 정도라면 기온 역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네.”

후작의 말에 다시 회의장 안은 조용히 가라앉았다.

“열곡이 확인되었다고 하지 없잖습니까? 그런데 문제… 라니요?”

“열곡은 분명 존재하네. 하지만 문제는 열곡의 시작점은 아이스 랜드 초입에서도 5일은 족히 가야만 도착할 수 있는 거리네.”

“아이스 랜드의 혹한을 적어도 5일은 견뎌야 한다는 말이군요.”

“정확하네. 단 5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말게. 아이스 랜드의 혹한을 하루라도 방심하면 죽음에 이를 수 있으니 말이야!”

“그럼에도 후작께서는 참전을 마다하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하하! 난 북부 대영주라네. 혹한이 두렵다고 도망쳤다면 마파린 후작가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네. 하지만 자네들은 우리와 다르니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게. 만약 참전을 선택한다면 나 역시 그대들에게 아낌없이 도움을 주겠네.”

후작의 말에 바이센 백작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제 대충 상황이 정리된 것 같으니 이만 휴식을 취하게. 출정 일은 케시언 백작이 알려줄 거야.”

마파린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북부 귀족들과 함께 서부 귀족들까지 모두 회의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미 북부와 서부 귀족들에게선 참전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보였다.

“자네는 항상 어려운 선택을 만들어 주는군.”

바이센 백작이 케시언 백작을 돌아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없네. 어려운 선택이긴 하지만 열곡을 찾아낸 자네의 노력도 인정해 줘야겠지.”

“오래된 고문서에서 뜨거운 강이 흐르는 알지 않는 협곡에 대한 이야기를 발견했지만, 정확한 위치는 몰랐습니다. 여기 마라스 부대장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찾아내지 못했을 겁니다.”

케시언 백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어찌해야 할지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군.”

“그전에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가?”

“출병은… 앞으로 삼일 뒤 새벽입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모든 결정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너무 촉박한 것 아닌가? 지금 병사들이 가진 방한 물품만으론 아이스 랜드에 들어서는 건 무리야!”

“방한용품은 후작께서 저렴하게 내어주실 겁니다. 비용 역시 전쟁이 끝난 이후 정산하셔도 무방할 겁니다.”

“허허, 후작이 아무래도 이번 기회를 빌어 단단히 한몫 챙기려 하는 모양이군.”

“죄송합니다. 이번 일은 은밀함이 생명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이지.”

고개를 흔든 바이센 백작이 자리에 앉아 좌중을 돌아보았다.

“어떤가? 이번 원정에 참여할 생각 없는 자는 조용히 손을 들어 주겠나?”

백작의 말에 고민을 거듭하던 귀족들이 이내 바이센 백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미 돌아가기엔 늦은 것 같습니다.”

“참전하겠습니다.”

“여기서 돌아갔다간 웃음거리밖에는 되지 않을 겁니다.”

중립 귀족들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내심, 제국 북부 영지를 털어 얻게 될 전리품을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좋네! 이번 원정은 참전하는 것으로 하지. 그전에 마라스 부대장? 아무래도 아이스 랜드에 익숙한 자네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떤가, 도와줄 수 있겠나?”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하하, 고맙군.”

바이센이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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