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 출정(1)
“오랜만이오. 후작!”
두툼한 순백의 털가죽으로 온몸을 감싼 왜소한 체구의 젊은 사내가 백마를 타고 거침없이 북부의 맹주 마파린 후작에게 다가갔다.
“허허, 그러게 말입니다. 삼왕자님을 뵈온 지도 벌써 2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후작이 환하게 웃음 지으며 삼왕자 제르노의 말고삐를 직접 잡고는 반갑게 맞이했다.
“자네도 오랜만이군, 케시언 백작.”
후작이 왕자의 뒤를 따라온 백작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후작 각하.”
캐시언 백작이 말에서 내린 뒤 마파린 후작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후작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자네의 이번 작전은 흥미롭고 획기적이었네.”
“모두 후작께서 계시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하, 그런가? 그러고 보니 이번 계획에 중추적인 역할을 할 용병대가 아직 도착 전이라 들었는데… 사실인가?”
온화하던 마파린 후작의 눈이 먹이를 노리는 사냥 매처럼 매섭게 변해 케시언 백작을 노려보았다. 이번 작전을 입안하면서 후작과 백작이 가장 많이 충돌한 부분이 바로 백작이 끌어들인 하급용병대인 마라스 용병대, 지금은 새롭게 변모를 시작한 아이언 용병대였다. 제이콥 용병대와 통합을 하며 전력이 상승했다고는 하지만 후작이 보기엔 별반 달라진 것 없는 하급용병대 무리일 뿐이었다. 이미 최정예 병사들과 기사들이 완벽하게 진형을 갖춘 상황에서 굳이 전역한 병사들로 이루어진 용병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앞으로 있을 전투에서의 지휘권을 놓고 후작과 백작 사이에 벌어지는 일종의 주도권 싸움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곧 도착할 거란 연통을 받았으니 걱정 마십시오.”
“곧? 고작 용병 따위가 왕자님보다 늦는단 말인가?”
후작의 말에 백작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자신이 계획한 작전은 은밀함이 생명이라 참전 용병들은 물론 귀족들까지도 최대한 분산시켜 은밀하게 이동 중이었다. 때문에 집결 날짜까지 충분한 여유를 주었고, 삼왕자 역시 신분을 최대한 감추고 최대한 은밀하게 이동하고자 오히려 집결 날짜보다 일찍 도착했다. 이 사실은 후작 역시 잘 알고 있음에도 공개된 장소에서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그건….”
케시언 백작이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후작을 노려보았다. 여기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순간 주도권은 후작에게 넘어가고 말 것이다.
“왜 말이 없는 건가? 마라스 용병대는 자네가 직접 선택한, 이번 원정에 아주 중요한 용병대가 아닌가? 그런 자들이라면 당연히 왕자님보다 먼저 도착해야 하는 것 아닌가?”
후작이 케시언 백작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귀족들이 삼왕자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고 해서 모두가 삼왕자를 따르는 사람들은 아니다. 왕실 근위 기사단장인 래쇼트 백작과 그가 충성을 바치는 이사벨라 공주에 대한 믿음이 삼왕자에 대한 지지로 나타난 것뿐이었다.
그래서 이번 작전도 삼왕자파에서도 극소수만이 알 정도로 비밀리에 진행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후작의 뜻에 따라 논쟁이 시작되면 어쩔 수 없이 이번 작전 전반에 대한 계획이 드러날 수밖에는 없었다.
그럴 경우 충성심이 떨어지는 중립 귀족들이 먼저 지지를 철회하고 병력을 돌려 떠나갈 수도 있었다. 그만큼 이번 작전이 어렵고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마파린 후작은 바로 이점을 파고들어 백작, 아니 정확히는 삼왕자에게 항복을 받아내려 하는 것이다.
“하하하!”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을 망설이는 케시언 백작을 대신해, 삼왕자가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며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마파린 후작을 바라보았다.
“이런, 이제 보니 후작이 뭔가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군.”
“착… 각이라니요?”
“마라스… 아니 이젠 아이언 용병대라고 했던가? 아무튼 그들은 그저 그런 단순한 용병대가 아니네.”
“허허, 제가 알기론 마라스, 아니 아이언 용병대는 일부 실력 있는 용병들이 섞이긴 했지만, 주축이 전역 병사들로 이루어진 하급용병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왕자께서 감쌀만한 용병대가 아니지요.”
“아이언 용병대에 대해 제법 자세히 알고 있군.”
“케시언 백작이 워낙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한번 알아보았습니다.”
“그럼, 그곳에 단장이 누군지도 알고 있겠군.”
“왕자님!”
케시언 백작이 깜짝 놀라 왕자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걱정 말라는 듯 백작을 향해 손을 저었다.
“흠… 죄송합니다. 단장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더군요.”
후작이 삼왕자와 백작의 표정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아이언 용병대에 대한 조사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는 그저 그런 하급용병대. 중급 용병대인 제이콥 용병대와 합쳐지며 제법 전력이 상승했지만, 그뿐이었다. 마파린 후작에게는 여전히 전역 병사들로 구성된 하급용병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두 용병대가 통합되면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용병이 단장이 되었다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 정체에 대해선 그다지 드러난 것이 없었다.
“아마도 그렇겠지.”
“왕자께서 관심을 가지실 정도면 단장이란 자가 아주 대단한 자인가 봅니다.”
“하하, 물론 대단하지! 아마 자네도 그자의 정체를 안다면 상당히 놀라게 될 거야.”
“왕자님의 말을 들으니 그자에 대해 더욱 궁금해지는군요. 아마도 여기 있는 여러 귀족들도 궁금해할 겁니다.”
마파린 후작이 왕자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사교계에서도 제법 이름이 알려진 용병들이 있긴 하지만 왕자가 직접 언급할 정도로 신분이 높거나 귀족들을 놀라게 할만한 대단한 자는 없었다. 더구나 상대는 고작해야 하급용병대의 단장, 왕자가 아무리 그를 치켜세워준다고 해도 후작은 얼마든지 왕자와 함께 상대를 시궁창에 처박아줄 자신이 있었다.
“궁금한가 보군.”
“물론이지요. 얼마나 대단한 자인지 아주 궁금합니다.”
“흠… 자네가 생각하기에 그리 대단한 자가 아닐 수도 있으니 걱정이군.”
“판단은 제가 하지요.”
자신을 놀리는 듯한 왕자의 말에 후작의 얼굴이 굳어지며 자연스럽게 말투도 싸늘해졌다.
“허허, 이거 후작이 화가 단단히 났나 보군. 좋아! 그럼 녀석의 정체를 알려주지, 그는….”
삼왕자가 후작을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 조카라네.”
“조… 카? 설마 아치 왕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치는 일왕자의 아들로 현 국왕의 손자였다. 보통 국왕의 3대 자손까지 왕자나 공주의 칭호를 붙일 수 있어 모두 그를 아치 왕자라 불렀다. 현 왕실에서 삼왕자 제르노가 조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일왕자 소생의 아치 왕자와 두 명의 공주, 그리고 이왕자의 소생인 윈저 왕자가 유일했다. 나이 어린 윈저 왕자와 두 공주를 제외한다면 원정에 참전할 수 있는 왕자는 올해 19살이 된 아치 왕자뿐이었다.
“이런, 아무리 내가 멍청하다 해도 설마 아치를 데려왔겠나! 더구나 녀석은 날 아주 싫어한다네.”
“하지만 왕실에는 왕자님께서 조카라 부를 만한 분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네, 왕실 안엔 없지. 하지만 왕실 밖에는 한 분이 계시지 않는가?”
삼왕자의 말에 마파린 후작의 두 눈이 더없이 커졌다.
“서, 설마! 고, 공주님께서…!”
“하하하! 그것 보라지, 자네도 놀랄 만한 대단한 자라 하지 않았나!”
삼왕자가 크게 웃었지만, 이곳에 자리한 귀족들은 감히 웃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삼왕자를 지지했던 귀족들이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사벨라 공주에게 자식이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가 삼왕자를 도와 참전한다는 사실은 더 놀라운 소식이었다.
“왕자님.”
웅성거리는 귀족들 사이로 노귀족이 천천히 걸어 나와 고개를 숙였다.
“바이센 백작, 말하시오.”
바이센 백작은 비록 영지는 없지만, 귀족들 중 나이가 많을 뿐 아니라 높은 작위를 가진, 사실상 중립 귀족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이언 용병대의 단장이 정말 이사벨라 공주님의 소생이 확실하십니까?”
“그렇소, 그는 올해 성년이 되어 정식으로 귀족원에 스퍼더 가문의 후계자로 등록되었을 뿐 아니라 왕실 가계에도 이름이 올랐소. 그러니 그는 의심할 여지 없는 내 조카가 분명합니다.”
삼왕자의 말에 또다시 귀족들의 수군거림이 커졌다. 왕실의 가계에 이름이 올랐다는 뜻은 그가 이사벨라 공주의 피를 이었으며 이는 곳 왕위계승권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왕위 계승서열 6위, 현 왕실의 모든 사내들이 죽을 경우 왕실을 떠난 장녀 이사벨라를 대신해 왕위를 물려받을 권한이 있다는 뜻이었다. 더불어 래쇼트 백작에 이어 후계자까지 직접 삼왕자에게 보냈다는 건 삼왕자에 대한 이사벨라 공주의 믿음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왕자님. 이후 아이언 용병대의 단장과 만남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와의 만남은 조금 미뤄야 할 것 같군. 그는 중히 만나야 할 분이 있어 합류가 잠시 지체될 것 같다네.”
“만나야… 알겠습니다. 만나야 할 분이 있다면 당연히 저희 귀족들이 기다려야지요.”
바이센 백작이 왕자의 말을 곧장 알아듣고는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왕자가 존칭을 쓸 정도의 사람이라면 왕실과 대귀족을 제외하면 이사벨라 공주밖에는 없기 때문이었다. 바이센 백작이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물러나는 모습에 삼왕자 제르노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어렸다. 평소라면 온갖 이유와 잔소리로 자신의 뜻을 관찰시켰을 바이센 백작이 이사벨라 공주 본인도 아닌 그녀의 아들과 만나기 위해 스스로 기다림을 자처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삼왕자가 바이센 백작에게 진정한 충성을 받을 수 있었다면 이번 원정과 같은 무리한 작전을 계획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이언… 용병대의 단장이 공주님의 피를 이었다면, 저 역시 한번 만나고 싶군요.”
“그야 함께 원정을 떠날 테니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지 않겠나! 하하”
“그렇군요. 함께 원정을 떠난다면 말이지요.”
후작이 의혹이 가득한 눈빛으로 왕자를 살폈다. 왕자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닌지 살피기 위해서였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왕자가 귀족, 특히 자신의 지지기반인 중립 귀족들을 상대로 거짓을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라도 거짓이 드러난다면 지지기반 자체가 붕괴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영주님.”
그때 마파린 후작에게 기사 하나가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서문에서 일단의 병력이 나타났다는 전령이 왔습니다.”
“서문? 서부 귀족들이 벌써 도착했단 말인가?”
이번 원정엔 맨피스 왕국과 국경을 마주한 서부 귀족 대부분이 참전을 포기했지만, 삼왕자와 마파린 후작의 설득에 일부 병력은 보내기로 하였다. 물론 대부분이 작은 영지의 기사나 영지병, 그리고 용병들이겠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는 전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부에서 출발한 병력이 벌써 도착했을 리는 없었다. 3백이란 숫자 역시 처음 약속한 병력보다 한참이나 부족했다.
“아닙니다. 귀족이 아니라 용병대입니다. 그런데… 용병 대부분이… 최소 소드 유저… 라고합니다.”
“뭐라… 소드 유저? 3백 전부가 말인가?”
마파린 후작이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 그렇습니다. 해서 수문장이 급히 전령을 보내왔습니다.”
최소 3백의 소드 유저, 현재 마파린 후작 가문이 순수하게 보유한 기사단과 예비기사단을 전부 합한 숫자에 버금가는 전력이었다.
물론 기사단에 비해 실질적인 무력은 떨어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전투가 벌어진다면 후작가로서도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할 만큼 대단한 전력이었다.
“음… 어디서 온 용병대라고 하던가?”
“남부 마일론 가문의 장원 크래센트에 거점을 둔 아이언 용병대라고 합니다.”
“아… 이언 용병대?”
“그렇습니다. 대략 2백여 명 이상이 c급 용병 패, 30여 명은 B급, 그리고 그중 한 명은 상급을 뜻하는 A급 용병 패를 소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상급 엑스퍼트, 그자가 제이콥이란 자겠군.”
“그렇습니다. 제이콥과 마라스가 부단장으로 용병들을 이끌고 왔다고 합니다.”
“흠…”
기사의 말에 후작이 잠시 망설이자 케시언 백작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들여보내 주시지요.”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전역 병사 출신의 하급용병들이 한순간 소드 유저로 변했소. 그들이 정말 아이언 용병대라 믿을 수 있는 것이요?”
“그들의 신분을 확인하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습니다. 휘하에 있는 용병 중 제이콥과 마라스의 얼굴을 알고 있는 자가 있습니다. 그를 보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는 일이지요.”
“흠….”
케시언 백작의 말에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기가 죽어있던 백작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만약 지금 나타난 용병대가 정말 아이언 용병대가 맞다면 한순간 후작가와 삼왕자파의 전력 균형추가 비슷해지고 그것은 곧 케시언 백작의 말에 그만큼 힘이 생긴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아이언 용병대의 합류를 막을 수도 없었다.
“좋소, 케시언 백작이 그들의 신분을 보장해준다면 통행을 허락하겠소.”
“감사합니다.”
케시언 백작이 후작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