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 평범하게...(2)
지글지글-
새하얀 속살, 두꺼운 지방층이 달아오른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사르륵 녹아 뜨거운 숯덩이 위로 투둑 떨어져 내렸다.
치이익-
뿌연 연기를 따라 고소한 냄새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꿀꺽-
나무꼬챙이에 꽂혀 먹음직하게 익어가는 새하얀 살덩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에밀이 입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젠 먹어도 되겠지?”
주변을 살피던 에밀이 더는 참지 못하고 맛있게 익어가는 살덩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따악-
“아얏!”
조금 전까지 팔짱을 낀 채 뜨겁게 타오르는 장작불을 매섭게 노려보던 사하의 손이 에밀의 손등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쯧, 아직 안 익었어, 기다려.”
사하가 에밀을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요, 에밀. 조금만 참아요. 아직 카일과 시안느도 돌아오지 않았잖아요.”
“히잉, 배고픈데….”
사하와 이엘의 말에 에밀이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도 눈앞에서 지글거리며 맛있게 익어가는 생선구이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녀왔습니다.”
어둠 속에서 카일과 시안느가 걸어 나왔다.
“둘만… 어딜 갔다 온거야?”
“주변을 잠시 돌아봤습니다. 여긴 사방이 훤하게 트여 밤을 보내기엔 적당한 곳이 아닙니다. 마침 섬 안쪽에 제법 큰 바위 굴을 발견했으니 오늘은 그곳에서 쉬면 될 겁니다.”
카일의 말대로 이곳은 호숫가 주변 넓은 수풀지대로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피하기엔 적당하지 않았다.
“그건, 뭐예요?”
“아! 이건 부들입니다.”
카일이 등에 짊어지고 있던 단단하게 여민 부들을 바닥에 내려 놓았다.
“부들인 건 저도 알아요.”
“이건 내일 아침 먹을 겁니다.”
“…이걸 먹는다고요?”
사하가 눈을 크게 뜨고는 줄기 끝에 달린 커다란 갈색 열매를 이리지리 살폈다.
“열매를 지혈제로 쓰기는 하지만, 이건 먹는 게 아닙니다. 내일 아침은 뿌리를 이용해 만들 겁니다.”
“뿌리요?”
“네”
고개를 끄덕인 카일이 단검을 꺼내 내려 놓은 부들에서 뿌리를 따로 잘라냈다. 그리고는 미리 챙겨놓은 거친 돌을 가져왔다.
“시안느 경, 방패를 좀 주시겠습니까?”
“방패를요?”
“네, 부탁합니다.”
시안느가 불안한 표정으로 카일에게 방패를 내밀었다.
“여기 있어요.”
카일의 행동에서 어느정도 방패의 사용처를 짐작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방패를 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시안느의 방패는 카일이 직접 오크랜드에서 죽은 기사의 스피어를 녹여 최고급 합금으로 만든 방패로,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은 물건이었다. 아무리 지금은 자신의 것이 되었다고 해도 카일의 부탁을 거절하긴 힘들었다.
시안느에게서 방패를 받아든 카일은 능숙하게 안쪽에 덧댄 가죽과 검집을 분리했다. 그리곤 방패 안쪽에 거친 돌을 내려놓은 뒤 잘라놓은 부들 뿌리를 으깨기 시작했다.
그르륵, 그르륵
“저… 런!”
그 모습에 에밀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카일을 바라보았다. 기사는 무기를 생명과도 같이 생각하며 소중히 다룬다. 성기사들과 장기간 여행을 하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단순히 검을 만졌다는 이유만으로 결투가 벌어지는 기사들의 세계에서 카일은 방패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걸 도마 삼아 거친 돌로 뿌리를 으깨고 있었다. 시안느의 입장에선 당장 카일을 향해 달려들며 결투를 신청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시안느는 당황한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볼 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카일을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참지 못한 에밀이 시안느를 대신해 이엘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그냥 가만히 두고 보세요.”
이엘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카일을 바라보았지만, 그녀 역시 내심은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이엘은 저보다 많이 알고 있으니 기사들에게 무기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 거라 생각해요. 지금 카일의 행동은 분명 잘못된 거예요.”
“그럴수도, 아닐수도 있어요.”
“네?”
“에밀은 모르겠지만 카일은 뛰어난 대장장이요. 저 방패도 카일이 시안느경의 검술을 고려해 직접 만들어준거죠.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럼 방패의 주인이 카일이란 말인가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적어도 카일이 사용할 권리 정도는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 시안느도 당황은 하면서도 적극적인 만류는 못 하고 있는 거죠.”
“그래도 너무해요. 시안느경에겐 소중한 무구일 텐데.”
“맞아요. 시안느경도 여느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무구를 소중하게 생각하죠. 하지만 그보다 이상한게 있어요.”
“이상하다니요?”
이엘이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부들 뿌리를 갈고 있는 카일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카일은 검사일 뿐 아니라 대장장이예요. 시안느가 자신의 무구를 얼마나 소중히 다루는지 정말 몰랐을까요?”
“그야… 당연히 알았겠죠.”
“그런데도 왜 카일은 시안느의 방패를 저렇게 거칠게 사용하는 걸까요?”
“그럼 이엘의 생각은 카일이 저러는 이유가 따로 있을 거란 말인가요?”
“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겠죠.”
이엘이 에밀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결국 모른다는 말이잖아요.”
“맞아요. 제가 카일의 생각을 어떻게 알겠어요.”
이엘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사이 가져온 부들뿌리를 전부 갈아낸 카일이 방패 안에 물을 가득 채워 갈아놓은 뿌리와 충분히 섞었다. 그러자 맑았던 물이 순식간에 희뿌연 색으로 변했다. 카일은 물속에서 풀어진 섬유질만 따로 건져내 버렸다.
“이제 이렇게 가만히 놓아두면 바닥에 전분이 가라앉을 겁니다. 그럼 내일 아침엔 전분을 반죽해 구워 먹을 수 있죠.”
카일이 아무렇지 않게 물이 가득 담긴 방패를 쓰러지지 않도록 한쪽에 밀어낸 뒤 모닥불 위로 손을 내밀었다.
“내가 알기론 블랙 와이번 안장에 밀가루가 가득 담긴 자루가 있었어요. 그걸 먹으면 편할 텐데 굳이 아껴둔 이유가 있나요?”
사하의 말대로 시카니스의 안장엔 일반인은 들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밀가루가 가득 든 가죽주머니가 매달려있었다. 터그 형제들까지 모두 갈대 습지에 숨어있을 생각에 넉넉히 챙겨온 걸 그대로 들고 온 것이다.
“처음엔 갈대숲에서 잠시 몸을 피한 뒤 안전해지면 곧장 북부로 올라갈 생각이었습니다. 식량은 그때를 대비해 가지고 있었던 거죠.”
“좋은 생각이에요. 마파린 후작의 성격이라면 백작가의 병력이 북부로 진입하는 걸 절대 용인할 수 없을 테니까요. 아니 어쩌면 이번 기회에 펠론 자작을 제거하려 들지도 모르겠죠.”
“맞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런 사태로 인해 계획이 어그러 졌죠. 거기에 군식구까지 붙었고.”
카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사하와 에밀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의 등장으로 카일의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다. 병사들과 기사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성을 빠져나온 카일과는 달리, 저들은 성벽을 파괴하고 다수의 병사들과 기사들을 죽인 뒤 갈대 습지로 도망친 덕분에 도문트 용병대와 펠론 자작을 충돌시켜 자작의 관심을 돌리려던 카일의 계획이 절반밖엔 성공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에일 영지로 더 많은 기사단과 와이번 나이트들을 불러들이는 계기를 만들어 버렸으니 사실상 실패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흠,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안장에 담긴 밀가루 양은 상당했어요. 우리 다섯이 이곳에서 한동안 지내며 먹어도 충분할 정도로 말이죠.”
“맞습니다. 상당한 양이죠. 하지만 밀가루는 따로 중요하게 쓸 데가 있습니다.”
“어디에…?”
사하가 의아한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지만 카일은 더 이상 대답하기 싫은지 사하의 시선을 피하더니 이번엔 부들에서 줄기만 따로 불리해 세심하게 다듬기 시작했다.
“그건 또 어디에 쓰려고요?”
에밀이 카일의 옆으로 살금 다가와 물었다.
“부들대가 약해 보여도 바짝 마른 줄기는 제법 단단해 쓸 데가 많죠.”
카일은 능숙하게 부들대를 다듬더니 이번엔 줄기 한쪽끝을 빗각으로 잘라냈다. 그리고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단검 위에 송진 가루를 올려 불 위에 녹여 바른 뒤 오므려, 마치 연필심을 깎아 놓은 듯 뾰족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숲에서 주워온 깃털을 반으로 갈라 부들잎을 꼰 끈으로 단단히 고정해 완성했다.
“지금… 화살을 만든건가요?”
이엘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카일이 화살을 만드는 모습은 지난번 절벽 위에서도 보았기에 이상할 건 없었지만, 나무도 아닌 부들대로, 더구나 화살촉도 없이 화살을 만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말했다시피 부들대가 아래쪽은 제법 단단해서 화살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화살 끝부분에도 송진을 채웠 단단히 굳혔으니 작은 동물이나 새 정도는 사냥할 수 있을 겁니다.”
곧게 뻗은 부들은 전생에 보았던 부들보다 크기도 컸고 목질도 단단해 화살을 만들어도 썩 나쁘지 않았다.
“화살이야 어떻게 만들었다고 해도 활은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설마 나무라도 잘라 만들 생각인가요?”
사하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활이야 항상가지고 다닙니다만?”
카일이 허리에 차고 있던 활을 풀어냈다. 검은 가죽 벨트로 오인할 만큼 특이한 재질로 이루어져 있어 백작가의 기사들도 미처 알아채지 못해 지금껏 카일의 허리에 감겨있었던 것이다.
“활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군.”
사하가 카일의 손에 들린 단궁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암흑 상단의 주인인 사하이기에 카일의 손에 들린 단궁이 보통 물건이 아님을 한눈에 안 것이다.
“저기… 물어볼 게 있어요.”
그때 에밀이 망설이며 살며시 손을 들었다.
“네, 망설이지 말고 물어보십시요.”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에밀을 보며 카일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이건 먹어도 되지 않나요?”
에밀이 노릇하게 익은 생선살을 가리키며 울상을 지었다.
카일이 돌아오고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어느새 꼬챙이에 꽂아 두었던 생선 살이 바짝 익어 이젠 타기 직전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 * *
“없습니다.”
“이곳도 아니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펠론 자작의 얼굴엔 당혹스러움이 번졌다. 갈대 배가 발견된 다음 날 펠론 자작은 와이번을 타고 강을 거슬러 북쪽으로 날아갔다. 투르 공국까지는 배를 타고 구불구불한 강을 거슬러 올라야 하기에 보름이란 시간이 필요하지만, 와이번을 타고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곧장 투르 공국으로 향한다면 반나절이면 공국의 영역에 접어들 수 있었다. 자작은 카일과 이엘을 태운 밀수선이 되돌아간 수로를 따라야 했기에 낮게 저공 하며 강을 따라 북상해야만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금방 찾을 거라 생각한 밀수선은 흔적조차 없었고 결국 투르 공국령 안까지 들어와 국경과 가장 가까운 마을부터 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벌써 이틀 전, 인근 마을 다섯 곳을 뒤지며 북상하고는 있지만 어디서도 카일과 이니엘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지?”
펠론자작이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차근차근 지나온 행적을 돌이켜 보았다.
“설마… 아직 갈대숲을 벗어나지 않은 건가?”
엄청난 넓이를 자랑하는 갈대 숲이라면 사람이 숨기에 좋을 듯 보이지만, 대부분은 습지였고, 사람이 머물만한 모래톱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도 수색은 계속 이루어지고 있으니 두사람을 찾았다면 벌써 연락이 왔을 것이다.
“그럼, 결국 밀수배가 유일한 탈출로인데… 어떻게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질 수 있는 거지?”
아무리 능숙하고 노련한 밀수꾼이라도 결국 배를 타고 북상하면 와이번 나이트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 어떠한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건 결국 다른 방법을 이용해 이곳을 벗어났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이곳을 빠져 나갔냐는 것이다.
“설마… 제국으로?”
펠론 자작이 곧 고개를 흔들었다. 제국 역시 전쟁을 대비해 국경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있었다. 아무리 담이 큰 밀수꾼이라도 이런 상황이라면 몸을 사리게 마련이다. 설령 무사히 국경을 넘어 제국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첩자로 오인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자작이 아는 한 카일이나 이엘 모두 그런 무모한 선택을 했을 리 없었다.
“허허, 참! 설마 에일 영지의 기사단처럼 땅으로 꺼졌단 말인가?”
사라진 기사단의 흔적은 펠론 자작의 짐작대로 땅속에서 일부 찾았지만, 시체는 결국 찾지 못했다. 누군가 이미 파내간 뒤였다. 그렇다고 아예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당시 그곳에서 두 번의 전투가 있었음을 알아낸 것이다.
“잠깐… 땅?”
고심하던 펠론자작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주변이 모두 습지와 강이라 당연히 물을 통해 빠져나갔을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도주할 방법이 꼭 물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설마… 와이번과 맹약을 맺었단 말인가?”
만약 카일이 와이번과 맹약을 맺었다면 지금 상황은 너무도 쉽게 이해가 가능했다.
“사라진 사람은 모두 다섯. 성녀, 흑기사와 동행한 마법사, 시안느와 이니엘, 그리고 카일.”
총 다섯 명이다. 이들 모두가 함께 있을 수도 있지만,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흑기사와 성기사의 사이만 보아도 서로가 적대적인 관계임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최소 네명이 함께 움직였다면 필요한 와이번은 두 마리. 만약 카일이 레드 와이번의 주인이라면 한 마리만으로도 충분히 모두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카일은 상급 엑스퍼트였다. 얼마든지 레드 와이번과 맹약을 맺고도 남을 만한 실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더구나 그는 스파더 가문의 인장을 사용했다. 스파더 가문의 주인이라면 레드 와이번을 구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 만은 아닐 것이다. 아공간석 역시 백작가로 들어오기 전 누군가에게 맡겼다가 탈출이 후 받았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건 이미 오러가 사라진 카일이 어떻게 와이번을 불러냈는지였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우린 정말 큰 실수를 한건지도 모르겠군.”
상급 엑스파트에 레드 와이번의 오너라면 소드 마스터만큼 막강한 전력이다. 만약 정말 카일이 오러를 되찾아 와이번을 불러냈다면 백작가로서는 정말 심각한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