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 사라지다(7)
“사라졌습니다.”
어두운 서재 안. 새하얀 도자기 찻잔 속 따뜻한 차 한 모금을 마시려던 사내의 손이 뚝 멈췄다.
“사라졌다?”
“그렇습니다.”
“어느 쪽인가?”
“두 곳 모두입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온 탁한 목소리에 출렁이는 그림자 사이로 드러난 깡마른 사내의 왜소한 얼굴이 찌푸려졌다.
“쿨럭쿨럭….”
사내가 격한 기침을 토하더니 급히 차 한 모금을 마시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단주, 괜찮으십니까?”
“휴… 괜찮아! 그저… 잠시 사레가 든 것뿐이야.”
“그러지 마시고 좀 더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쯧, 내가 그걸 몰라 이러고 있는 것 같나? 고작 한 달이야! 일 년도 아니고 단 한 달, 병을 치료하려 잠시 떠나 있었더니 십수 년을 노력해 구축한 기반 절반이나 날아갔단 말이야! 이렇게 엉망을 만들어놓고 내게 다시 휴식을 말하는 건가? 쿨럭쿨럭!”
사내가 분통을 터트리다 말고 다시 격하게 기침을 토했다. 최근엔 점점 심해지는 기침과 떨어지는 체력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이렇게 의자에서 보내거나 침상에 누워있어야만 했다.
“이번엔 어떻게 해서든 그 녀석을 잡아야 했어! 아니 하다못해, 벨하크와 대장장이들은 잡았어야 했단 말이다.”
“송구합니다.”
“흔적은 어떤가? 정말 찾을 수 없겠나?”
“동부를 벗어나기 직전 숲속으로 들어간 흔적은 찾았습니다만, 나온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기사단의 흔적도 말인가?”
“그렇습니다. 마차는 물론 뒤를 쫓던 에일 영지의 기사단 역시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어둠 속 탁한 목소리에 사내가 찻잔을 문지르며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기자, 탁한 목소리의 사내는 아무런 말 없이 사내의 답을 꿋꿋하게 기다렸다. 아마도 이런 식의 대화가 익숙한 듯 보였다.
“…마탑 소속이 아닌 고위 마법사가 몇 명이지?”
“암흑마법사를 제외하면 대략 6명 정도 됩니다. 이 중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의 행방은 이미 파악하고 있습니다.”
“두 명?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 같은데?”
“갑자기 흔적이 사라져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하아! 그런 중요한 일을 놓치다니…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 누군가?”
“일단 남부 하늘탑 출신의 평민 마법사입니다. 갑자기 하늘탑이 폐쇄되면서 사라졌습니다.”
“기억하기론 녀석을 포섭하려 사람을 파견한 것으로 아는데?”
“마법사가 예상보다 며칠 일찍 하늘탑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후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보고를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송구합니다. 당시 갑작스럽게 새로운 명이 내려와….”
“…휴, 좋아, 그럼 당시 녀석의 경지는 어찌 되었나?”
“하늘탑 유지를 위해 보낸 마법사라 고작 4서클 초급 정도입니다. 마법의 특성상 서클을 올리기도 힘들었을 겁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온 말에 사내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4서클이면 고위 마법사라고 하기엔 좀 애매하군.”
“그럼 다른 한 명은 누군가?”
“남부 아킨스 영지에 숨어 살던 마법사입니다. 마법진을 비롯해 각종 실험마법에 능한 자입니다. 일전에 보셨던 붉은 포션을 만든 것이 그 자입니다. 경지는 6서클로 추정됩니다만, 실험실 마법사의 특성상 공격 마법엔 문외한이라 보시면 됩니다.”
“흠, 그래 들은 기억이 있다. 좀 수상한 녀석이라 했었지?”
“그렇습니다. 감춰진 비밀이 있는 것 같아 감시만 하던 자입니다.”
“그럼 왜 갑자기 사라진 건가?”
“그것이… 아킨스 자작령이 멸문하면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 그 일이 있었군. 그럼 폭격으로 사망한 건가?”
“그럴 가능성도 배제하진 못하지만 아직은 살아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왜소한 사내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빠르게 두드리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쪽 마법사가 있나?”
“어느 정도를 생각하십니까?”
“최소 5서클은 되어야 할 것 같군. 녀석들이 땅속에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어떻게 죽었는지는 확인해야겠어.”
“알겠습니다. 즉시 파견하겠습니다.”
“좋아. 휴, 일이 이상하게 꼬이고 있어, 전쟁도 그렇고, 왕국에 비해 제국이 너무 조용하단 말이야!”
“폭풍이 오기 전엔 고요한 법 아니겠습니까?”
“큭, 자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군. 그래 폭풍전야!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건 말야….”
왜소한 사내가 얼굴을 찌푸리며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참았다.
“그, 폭풍이 어디로 부는가다.”
“네?”
어둠 속 목소리가 되물었지만 왜소한 사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찻잔을 들어 조심스레 차를 마셨다.
* * *
꽝-
단단한 자작나무로 만든 책상이 부서질 듯 흔들리며 그 위의 유리 찻잔이 넘쳐 바닥을 적셨다.
“사라지다니!”
“왕실 직영지까지 확인했습니다만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헛소리! 와이번 나이트를 제외한 기사단 전체가 움직였다. 모두 몰살을 당했다고 해도 시체, 아니 전투 흔적이라도 남아 있어야 할 것 아니냐! 설마 기사단이 전부 땅으로 꺼지기라도 했단 말이냐!”
에일 남작이 고래고래 소리를 쳤지만 사라진 기사단을 다시 찾을 수는 없었다. 결국 분통을 터트리다 지친 에일 남작가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그때 와이번들도 같이 보내야 했다.”
에일 남작이 지난 일을 떠올리며 자책하듯 말했다.
벨하크와 대장장이들의 탈주에 펠론 자작이 관여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 남작은 곧장 성문 수비대를 닦달해 벨하크가 서문을 통해 왕성으로 향한 사실을 알아내고 곧장 기사단을 파견해 추적을 시작했다.
“영주님, 이번 추적에서 와이번은 배제해 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인가? 녀석들을 가장 확실하게 잡으려면 와이번의 정찰 능력이 필요할 거야! 함께 가도록 하게.”
“아닙니다. 와이번 나이트 들은 펠론 자작을 도와 갈대밭을 수색해야 합니다.”
“갈대밭, 흠….”
에일 남작이 얼굴을 찌푸리자 라이튼이 남작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영주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백작께서 셋째 영애를 소영주보다도 더 총애하시는걸. 그런 영애가 납치를 당했습니다. 더구나 저희의 실수로 생사까지 불명한 상황이니 그분을 찾는 데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 불길 속에서 살아남는 건 불가능하네.”
“설령, 죽었다고 해도 적어도 펠론 자작에게 저희 에일 영지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은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만 백작의 분노를 조금이라도 누그러트릴 수 있을 겁니다.”
“끙… 아무리 백작이라도, 설마 무력까지 동원하겠나?”
“평소라면 모르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없습니다.”
“화, 확신할 수 없다니…!”
라이튼의 말에 에일 남작이 깜짝 놀라 물었다.
“곧 전쟁입니다.”
“그, 그래, 그렇군. 곧 전쟁이다. 미,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
전쟁이 벌어지면 국경 일대의 영지 하나둘 정도 쓸려나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아니, 백작이 마음만 먹으면 적군으로 위장해 영지를 쓸어버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즉 지금 남작에겐 백작의 심기를 살피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급박한 일이란 뜻이었다.
“영주님, 비록 와이번의 도움을 받지는 못하지만, 기사들 모두 제가 직접 가르친 정예들입니다. 커드 경은 추적에도 능하니 기사단만으로도 충분히 추적할 수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휴, 이거 내 욕심에 자넬 너무 힘들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아닙니다. 저 역시 그동안 대장장이들이 신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그들이 누렸던 모든 것은 영주님의 것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하, 그리 말해주니 마음이 놓이는군. 이번 일이 잘 풀리면 이 모든 영광은 자네와 함께 누릴 것이네.”
에일 영주가 미소를 지으며 라이튼의 어깨를 두들겼다.
“모든 것은 영예로운 영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겁니다.”
라이튼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에일 영주의 반지에 입을 맞추고 영원한 충성을 맹세한 뒤 추격에 나섰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영지의 최고무력이자 에일 남작의 절친한 벗이었던 기사단장 라이튼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허허, 이젠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제 에일 영지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영지 최대수입처인 대장간 골목에선 더 이상 뜨거운 열기도 시끄러운 망치질 소리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장간의 화로는 식었고 지나는 사람마저 아무도 없었다. 영지를 지키던 강력한 기사단은 그들을 찾아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말이다.
“술! 술을 가져오너라! 어서 술을 가져오란 말이다!”
에일 영주의 분노한 고함 소리에 하인들이 부랴부랴 술통을 찾아 지하로 황급히 달려갔다.
* * *
“사라졌다?”
“그렇습니다.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관의 말에 펠론 자작이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쓰다듬었다. 간혹 흔적을 지우기 위해 죽은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전투 흔적을 지우는 경우는 있지만, 완벽하게 전투 흔적을 지우는 건 불가능했다. 이처럼 완벽하게 흔적을 지울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마법이군. 벨하크의 도주를 도운 자 중 고서클 마법사가 있는 것이 분명해.”
펠론 자작이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래, 흔적이 마지막으로 남은 곳은 어디라고 하던가?”
“왕실 직영지와 인접한 작은 숲입니다. 면적은 그리 넓지 않지만, 구릉지 사이 좁은 숲길이 길게 이어진 곳이라 다들 어스웜 숲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지렁이 숲이라, 특이한 이름이군.”
“구릉 위에서 보면 꼭 지렁이 모습이라 그렇게 부른다고 합니다.”
“음… 기사들이 파묻힌 숲이라… 지렁이 숲도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군.”
펠론 자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고민하더니 부관을 향해 툭, 질문을 던졌다.
“에일 남작은 지금 뭘 하고 있지?”
“충격을 상당히 받은 것 같습니다. 한동안 소릴 지르더니 지금은 술독에 빠져있다고 합니다.”
“쯧, 똑똑한 줄 알았더니 멍청한 녀석이었군.”
펠론 자작이 고개를 흔들었다.
“에일 영지도 이제 끝난 것 같으니 이런 곳에 더 이상 고급인력은 필요 없을 것 같군.”
“알겠습니다. 바로 작업, 시작하겠습니다.”
“그리하게, 그리고 남작의 고통이 클 것 같은데,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주면 좋을 것 같군.”
“알겠습니다. 그것 역시… 은밀히 진행하겠습니다.”
“그…!”
꽝-
그때였다. 갑자기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검은 재를 뒤집어쓴 기사가 넘어질 듯 안으로 들어섰다.
“이게 무슨 짓인가!”
거친 숨을 몰아쉬는 기사를 향해 부관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헉헉, 흔적을… 찾았습니다.”
“뭐라!”
펠론 자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냐! 당장 가겠다.”
“자작님! 아직 불이 완전히 꺼지지 않았습니다. 위험하니 잠시 불이 꺼지길 기다리시죠.”
“그럴 시간이 없다. 이엘이 살아있을지 모르는데 지체할 시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펠론 자작이 앞을 막아선 부관을 밀치며 서둘러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 뒤를 따라 부관과 기사가 황급히 뒤쫓았다.
기사를 따라 달려간 곳은 아직 뿌연 연기를 내 뿜는 갈대밭 안쪽, 모래톱 바깥쪽이었다.
“이건…!”
“갈대로 만든 배입니다.”
“갈대 배라, 갈대로 배를 만들 생각을 하다니…”
“이자, 아마도 맴피스 왕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나 봅니다.”
“맴피스 왕국? 그건 또 무슨 말인가?”
펠론 자작이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편안한 얼굴로 물었다. 배를 만들었다는 것은 불길을 무사히 피했다는 뜻이기에 더는 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배가 떠내려온 방향만 살펴도 그들이 향한 곳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오래전 왕도에 갔을 때 맴피스 왕국에서 온 상인을 만났습니다. 그에게서 왕국 서부에 사는 소수부족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곳과 비슷한 넓은 습지에 갈대로 섬은 물론 집과 배까지 만들어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이자 역시 그런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습니다.”
“이런 배를 타고 이곳을 벗어났다니 믿을 수가 없군.”
“보기엔 어설퍼 보이지만 제법 튼튼합니다. 시험해보니 건장한 기사들 셋은 충분히 태울 수 있었습니다.”
“그럼 녀석들은 어디로 간 것 같은가?”
“아마도 물길을 거슬러 북쪽으로 향했을 겁니다.”
“북쪽….”
“듣기로 이곳에 밀수꾼들이 찾아온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그들과 조우했다면, 트루 공국으로 향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밀수꾼이라… 그럴 수도 있겠군.”
펠론 자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관을 돌아보았다.
“수색을 중단하고 와이번 나이트들을 모두 불러모아라! 트루 공국으로 직접 가겠다.”
“알겠습니다.”
서둘러 갈대밭을 빠져나가는 부관을 바라보다가, 펠론 자작의 시선이 북쪽 하늘에 잠시 머물렀다.
“이엘, 미안하다만… 널 절대 놓아줄 수가 없구나!”
자작이 붉게 물든 저녁노을 사이로 멀어져가는 검은 까마귀 한 마리를 보며 마음을 다잡은 뒤, 갈대밭을 천천히 빠져나갔다.